Bongta      

바람 부는 날

소요유 : 2009. 1. 14. 18:26


바람 부는 날.

추위가 매섭다.
나는 이런 추위가 좋다.
세포 하나하나가 팽팽히 살아나며 정신이 말짱하니 깨어난다.
산에 오르는데 바람이 산등성이로부터 불어온다.
지난 가을에 진 낙엽들이 우르르 허공으로 날아오르다가 힘에 부치는가 싶자,
이내 왼편 골짜기 쪽으로 좌르르 떠밀려간다.

사라지는 낙엽들을 쫓다 불현듯 생각 하나가 지피어 오른다.

바람은 볼 수 없는 것 아닌가?
다만 바람이 불러일으키는 흔적만을 우리는 지켜볼 따름이 아닌가 말이다.
바람이 켜 일으킨 품세에 낙엽이 허공을 나를 때,
우리는 비로소 바람이 불고 있음을 ‘눈’으로 본 양 시피 여긴다.
본 것은 낙엽이로되, 불러 이르길 바람이 분다고 말한다.

퇴락한 사찰 처마에 풍경(風磬)이 아직도 매달려 있는 사연은 무엇인가?
바람이 처마 끝을 지날 때 풍경을 건드리자 가냘프게 딸~랑 딸~랑 소리가 허공을 번진다.
그 소리로서 아직 여기에 내가 있음을 알리고 있다.
낡고 바랜 단청이 이제는 거의 잿빛으로 변해가고 있지만,
아직은 사찰이다라는 사실을 홀로 밝히는 증명법사(證明法師)인 양,
풍경은 제 도리를 다 하고 있음이다.
구부정한 허리를 겨우 펴 다리며, 노승이 운판(雲版)을 겹게 두드리자,
때는 문득 사시공양(巳時供養)임이라,
바람결에 때가 전해오고, 건너간다.
‘귀’로 쇳소리를 듣되,
다만 우리는 바람이 분다라고 말한다.

뱀은 혀를 날름거리며 바람을 핥는다.
개는 코를 씰룩 씰룩 대며 바람을 맡는다.
사람은 깃발이 날리는 것을 눈으로 보고,
풍경 소리를 귀로 듣고서야 바람이 이는 것을 안다.

나는 20년도 더 된 바람의 기억을 아직도 가끔씩 떠올릴 때가 있다.
설악산을 다 타고 내려와 용대리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벗은 팔뚝 위로 감미로운 바람이 스치고 지나자,
숨구멍 하나하나가 열리고, 솜털이 깨어나며
정신은 그대로 황홀지경으로 빠져들었다.
그 순간 천년세월을 조우(遭遇)한 양,
넋은 그저 무량광(無量光), 무량수(無量壽) 피안으로 달려가던 그 날 그 때.

이렇듯 바람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입처(六入處)를 통해 불어온다.
정작 바람은 보이지도 않는데, 느낌, 감각만 남아 있는 게 아닌가?
도대체가 개시허망(皆是虛妄), 모두 바람처럼 허망한 노릇이다.
바람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
바람을 어디메에서 찾으려는 게 과연 마땅한 도리인가?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비풍비번(非風非幡) 이야기는 또 어떠한가?

혜능 스님이 오조 홍인스님으로부터 전법 받아 남해 땅 법성사에 이르렀을 때다.
인종(引宗)법사가 열반경 강의를 하고 있을 때였다.
절 앞에 깃발이 펄럭이며 날리고 있었다.
당시는 설법시, 기(旗)를 높이 달아 그 표시를 했다.
이 때 두 중이 서로 대론하되,
하나는 깃발이 날린다고 하고, 하나는 바람이 분다라고 서로 자기의 주장을 할 때,
육조가 이르길,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오,  깃발이 날리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일 뿐이다.”

두 중이 송구스러워했다.

육조가 마음이 움직인다고 말했으나,
그것으로 종결되었는가?
그나마 총기 있는 이라야 일으켜내는,
또 불같이 일어나는 이런 질문은 어찌 할 것인가?

“그럼 그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사실 공안(公案)을 대하여 언어란 잣대로 헤젓는 짓거리는,
마치 화로의 식은 재를 부젓가락으로 뒤져,
작년 그러께 구워먹다 남은 군밤 부스러기 찾는 격이지만,
깊어가는 겨울밤 이 또한 한 가닥 정취라 그리 노닐어 본다.
내 군밤이 이미 익었으니 무슨 허물이 되리요.

비풍비번(非風非幡) 인자심동(仁者心動)은 만법귀일(萬法歸一)과 다를 바 없다.
공안이 1700개라지만 대개는 이런 양식적(樣式的) 구조를 갖는다.
일단 부정하고 이내 다시 긍정하는 패턴 말이다.
하지만 남은 그것 하나도 긍정할만한 것이 한 톨도 없다라는 사실에 이르지 않는 이상,
저 은성철벽(銀城鐵壁)은 절대 깨뜨릴 수 없다.

성철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山是山兮 水是水兮)이라는 것도,
산은 물이요, 물은 산이로다.(山是水兮 水是山兮)의 경지를 갈마들어,
반본환원한 경지가 아니겠는가?

看山是山,看水是水
看山不是山,看水不是水
看山還是山。看水還是水。

이런 삼단의 양식이 공안이란 언어구조의 주요 기층(基層)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를 흔히 항간에서 하듯 삼중경계(三重境界)로 나누어 보면, 결코 강을 건널 수 없다.
전격적 일격으로 한꺼번에 꿰뚫어 해치워버려야 한다.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면,
도대체 그 하나는 어디메로 돌아드는가 ? 일귀하처(一歸何處)?
우인(愚人)에겐 이런 의문이 당연 유발되고 만다.

마찬가지로,
인자심동(仁者心動)이라, 마음이 움직일 따름이라면,
도대체 그 마음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런 질문을 일으키는 자도 아직 한참 덜 익었지만,
이런 자에게
비풍비번(非風非幡) 인자심동(仁者心動)이라든가,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고 일러주는 이는 또 얼마나 답답하였을까?
혹은 속여먹는 재미가 사뭇 찰찰진진했을까?

그렇다한들, 혜가(慧可)가 달마(達磨)에게 단비구법(斷臂求法)하며 문답을 나눈 장면을 보면,
중생에겐, 그 마음이라는 것의 행방이야말로 묘연한 것임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제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스님 저를 편케 해주십시오.”

“그 편치 못한 마음을 가져오면 편안케 하마.”

“마음을 구하려 해도 구할 수 없습니다.”

“내 이미 그대의 마음을 편안케 하였느니라.”

어느 스님은
즉심즉불(卽心卽佛)은 무병구약(無病救藥)의 구(句)이고,
비심비불(非心非佛)은 약병대치(藥病對治)의 구(句)라고 말씀하셨지만,

언제가 쓴 대매화상(大梅和尙)의 이야기에서처럼
즉심즉불(卽心卽佛)이나 비심비불(非心非佛)이나
다 우는 아이 입에 물려주는 눈깔사탕 같은 것에 불과하다.
(※ 참고 글 : ☞ 2008/02/11 - [소요유/묵은 글] - 매실 이야기)

비풍비번(非風非幡), 인자심동(仁者心動),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고
스리슬쩍 눙치며 사기를 쳐도,
멍멍하니 할 말 잊고 잠시 우는 것을 멈출 뿐, 허나 그 때 그 뿐,
중생은 모두 미령(未寧)하니 경각간 이내 다시 울며 보채길,
멱심(覓心), 일귀하처(一歸何處)니까? 하며 뗑깡을 부리고 만다.

***

바람은 공기의 흐름이다.
이것이 깃발을 날리기도 하고,
때로 풍경 소리도 되고,
때로는 마음 밭에 내려 잔잔한 여운을 남기고는 사라진다.

그렇다.
허공중으로 사라진다.
바람소리는 결코 남겨지지 않는다.

이 바람소리를 잠자리 잡듯 채집망 속에 잡아두자는 시도가 있었다.
서빙고, 동빙고에 얼음을 캐다가 쟁여두고는 여름철에 꺼내 쓰는 이치는 무엇인가?
얼음은 여름에는 얼지 않기 때문이다.
허니, 겨울철에 꽁꽁 언 한강의 얼음덩이를 썩 베어다가 빙고(氷庫)에다 저장해둔다.
그리고는 여름철에 요긴하게 꺼내 쓴다.

바람소리 역시 귓가를 스치고 지나면 연기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
얼음을 빙고(氷庫)에 가두듯,
바람소리를 저장하고자 고안된 것이 축음기(蓄音機) 아닌가 말이다.
바람이 허공중에 지나가는 궤적의 문양을 레코드판에 새김으로서,
영원히 잡아채어 창고 혹은 감옥에다 가두는 것,
그것이 축음 기술, 조작질인 것이다.

녹음(錄音)이란 말은 소리를 기록하는 뜻임이되,
애초엔 이 말보다 축음이란 말을 썼다.
녹음이란 말에는 축음(蓄音)이 지시하는 ‘저장한다’, ‘감춘다’라는 근원적인 뜻이 거세되고,
그저 연필로 무엇을 ‘기록한다’, ‘적는다’라는 정도의 범상(凡常)한 뜻만 남아있다.

어쨌거나, 이 기술은 허공중에 그려진 바람의 흔적을 그려내는 데 일견 성공한 듯 싶다.
공기 중에 에너지가 퍼져나가며 밀(密), 소(疎)의 패턴을 만들어낼 터인데,
그것을 흉내 내어 레코드판에 새김으로서 허공중에 사라지고 마는 소리를 잡아 붙든 것이다.
레코드판에 새겨진 이랑과 고랑이 만드는 문양이란 실로 소리에너지의 패턴인 것인데,
이것에 철심이 밭갈 듯 지날 때 흔들리는 진동을 전기 에너지로 포착, 환원하여,
스피커를 때림으로서 원래의 소리를 재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역시나, 사진(寫眞)이란 것이 무엇인가?
빛(光)이란 진실의 세계를 베끼는 기술이 아닌가?
축음은 소리를 베끼는 것이로되,
사진은 빛을 베끼는 것이니,
이게 모두 거짓(假)을 지향하는 것임이라.

하지만,
이게 그저 단순한 거짓(假)이 아님이라,
진실의 세계로 틈입(闖入)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같은 것이 아닐까?
어찌나, 저리도 성실한 모습이라니 ...
하마 달려가 손이라도 잡아 주고 싶다.

저들 서양 기술자들의 정신세계란,
비풍비번(非風非幡)의 세계와 얼마나 다른가?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날로그 세계에선
그나마 저 소리의 문양을 소박하니 그리고, 충실하게 따라 재현하는 것이지만,
이제 디지털 세계에 들어와서는 사뭇 달라졌다.
저 문양은 숫자로 바꿔버린 것이다.

01000101100100111111 ......

소리가 문(紋, 文)으로, 다시 수(數)로 환치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운수(運數)라는 것도 거칠게 말하자면,
운(運) 즉 삶의 운동(運動)이란 것을 수(數)로 풀어 보자는 것이다.
금목수화토 오행(五行)만 하여도 수(數)로 배대(配對)하길
1.6수, 2.7화, 3.8목, 4.9금, 5.10토 이리 하지 않는가?

실체를 수(數)로 바꾼다는 것은 곧 고도의 추상화 작업인 것이다.
바람도 우리의 삶도 구체적인 것이다.
바로 이 현장, 이 때,
운동(運動)하고 있는 여여(如如)한 것이거늘,
왜 수(數)를 등장시켜야 하는가?
인생을, 삶을, 현실을 엿 바꿔먹기라도 한 것인가?

나는 이에 대하여 이미 몇 차 이야기를 한 폭이다.
(※ 참고 글 : ☞ 2008/02/15 - [소요유/묵은 글] - code - ① ~
                      ☞ 2008/02/17 - [소요유/묵은 글] - code - ⑥ 終回
                  ☞ 2008/02/20 - [소요유/묵은 글] - 바이어스(bias) )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구체적 현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도통 제대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즉 기호화, code화하여 추상적인 틀(frame)을 마련해둠이 아니겠는가?
수(數) 역시 code에 다름 아니다.
복잡다단한 현실 세계를 도식화된 단순한 틀을 통해 역조명(逆照明)함으로서
마치 장님이 지팡이로 더듬 더듬 개울가를 건너듯,
그리 이 미망의 세계를 어렴풋이 짐작하여 지나려함이 아니겠는가?

수(數), code, 기호, 상징은 여전히
바람 대신 깃발인 것.
만약 바람을 찾는다면 깃발을 부러뜨려야 온전히 바람을 만날 수 있으리라.

그렇다한들 그 누가 깃발 없이 바람을 볼 수 있으며,
풍경(風磬)없이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음인가?
어느 장부(丈夫)가 있을런가?
(※ 장부(丈夫) : 불성(佛性)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

육조 혜능 스님은

“비풍비번(非風非幡)”

이 한 마디로 바람을 재우신 것인가?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萬法歸一
一歸何處

바람 부는 날.
계곡 안으로 우우 소리를 내며 낙엽이 몰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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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09. 1. 14. 1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