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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조(問弔)

소요유/묵은 글 : 2009. 1. 20. 22:28


용산에서 일어난 사망 소식에 마음이 잿빛으로 잠긴다.
이 엄동설한에 무엇이 그리 급하단 말인가?
기껏 등 따스히 누울 공간 하나 허용이 되지 않는 우리네 삶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살아있는 사람들이 떠나간 고인들에게 이제와서 '용서하시라' 울먹인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런가?
참으로 아득하니 부박(浮薄)스런 세상이다.

오늘 더이상 글을 깍아 내놓을 염치도, 기력도 없다.

지난번 조상의 글을 썼던 적이 있다.
그 글 부서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기며,
그저 슬픔에 잠길 따름이다.

삼가.

***

問弔

oo 선생님께,
삼가 늦은 禮 차립니다.

애례(哀禮) 모시었던 선생님 생각하자니
아까 문득, 곡용(哭踊)이란 말이 떠올랐습니다.

애통하여 곡하며 발버둥치니, 마치 춤추는 양 싶음을 이르는 말이지요.
서양 영화를 보면 모두 경건하니 침착한데,
우리네 풍속은 온몸을 내던져 통곡호읍을 하고 맙니다.
돌이킬 수 없고, 이제 끊어져 이을 수 없는 인연은 사무쳐 저리도록 아픕니다.

이도 모자라면,
곡비(哭婢)를 품 사서,
울음조차 젯상에 괴어 올립니다.
구슬피 잘 우는 곡비는 품삯이
나락 수 섬, 베 두어 동을 치루고도
차례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쯤 되면,
가진 재물이 없으면,
고인에 대한 예도 제대로 차릴 수 없게 됩니다.

장자는 아내가 죽자 두 다리 뻗고,
고분이가(鼓盆而歌), 즉 항아리(악기) 두들기며 노래를 불렀다지요.
하지만, 이게 충분히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게,
장자가 아내를 잃자 마자, 바로 항아리 두들긴 게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제 아무리 장자라한들,
이 역시 부자연스럽고, 조금은 위악적인 게 작위적인 노릇이라 할 것입니다.
그 역시 처음엔 놀라고 슬퍼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만 근본을 돌이켜 보면 생이란 없는 것임이니,
생에서 사로 돌아갔을 뿐이라 이리 깨달았기에
슬픔을 그쳤다고 하지요.  

열역학 제2법칙에서 유도되는 엔트로피증가의 법칙은 비가역적입니다만,
죽음은 비가역적일 뿐 아니라, 생사간 불연속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남겨져 겪는 이들의 슬픔은 뼈에 새겨집니다.
하지만, 시간의 강물 따라 그도 흐려지며,
인연의 터럭은 엔트로피처럼 가뭇없이 흩어져 산화되고 맙니다.

장자가 말하는 생이 사로 돌아갔다고 할 때,
그는 계절 순환하듯이 사에서 생으로 되돌아 올 수도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저들이 말하는 생사불여의 이치를 온전히 알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생사간 去來가 기든 아니든,
당시를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저편에 망각의 강이 있다고 하는 이들이 저는 우습습니다.
정녕 그것이 있다면,
그들도 건넜을 터인데,
그들은 어이하여 잊지 않고,
유독 그 강 이름은 기억해내고 있는 것입니까 ?
그것은 망각(忘却)이 아니고,
망각(妄覺)일지니,
곧 환각내지는 망령스런 생각이지 않겠는지요 ?

저의 경우엔 한참 우니까,
purification,
그야말로 순수 정화상태,
머리가 티끌 하나 없이 텅비어
오히려 맑디 맑아,
흔히 쓰는 말이 아니지만,
징징(澄澄)한 상태에 놓이더군요.  (澄: 맑을 징)

원래 상가에선,
조문객과 상두꾼만
술질이 아귀 같고,
쌈질이 수라 같아,
철 맞난 매미처럼,
아우성 치며,
난장을 벌입니다.

정작 상제는 이들 뒤치닥꺼리 하느라,
읍곡(泣哭) 제대로 할 새가 없습니다.
그 부산스러움 속에,
슬퍼할 짬도 없이
장례를 치릅니다.

저는 청해진 바조차 없이 지나는 객이나,
본시 이런 뜨내기가 더 냅뜨는 법.
이리 한 동이 가득
본데없는 주책을 쏟아내고 맙니다.

따지고 보면,
이게 다 상제들의 슬픔을 잠시 앗아가고자 하는
이웃들의 곡진한 부조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상제의 슬픔은 장례 치르고 난 이후,
정작은 그 때부터 스멀스멀 스밉니다.

소슬하니 바람 불 제,
달님만 보아도,
별빛만 보아도,
눈가엔 절로
이슬이 고이게 됩니다.

객들은 하마 아지 못하는
진짜배기 아픔.
순백 눈꽃의 서러움은
소중한 것이 언제나 그러하듯이
홀로 찾아듭니다.

선생님은 새벽 별 헤아려 모시는 마음으로
고인을 마중하셨을 테니,
곡용, 곡비 없다한들
자리를 고이 지키셨으리라 짐작됩니다.

엇그제 읊조린 바,
“바르도(bardo)의 길은 그의 길일 뿐,
나도, 그도 나뉘어 길을 걷는다.”

이렇듯 각자는 모두 제 길을 걸을 뿐입니다.
갈라 돌아서자 마자,
정작 이제부터 진혼(鎭魂)하여야 할 것은 산자이니,
망자와는 벌써 이리 베 가르듯 길을 달리합니다.
그래서 이별은 더욱 슬픈가 합니다.

***

선생님이 제 글을 읽으셨으리라 짐작되는,
곧 저 위에 나타날 다음 차례,
바카라 통조림을 쓰레기통에 버리셨을 때쯤,
저 역시 이를 신호로 제 글들을  
내일 해 뜨고, 바람 불면 사라질,
오늘 저녁 이내(嵐氣)를 따라
흩고져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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