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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리(主理)와 주리(主利) - 남녀의 code

소요유/묵은 글 : 2008. 2. 12. 12:21


흔히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고 한다.

저 하늘에는 천도(天道)가 있으니,
천지자연과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할 이치가 있다.
땅은 제 몸을 헐어내고, 곡식을 내어 뭇 생명들을 키우며,
깨끗하거나 더러움을 가리지 않고 온갖 것을 받아들이며,
종내 제 몸으로 품어 정화한다.

남성은 벼리(綱)이니, 곧고 바른 이치를 주관하고,
여성은 천하만물을 온유한 덕성으로 품어 기른다.
하늘과 땅이 의식이 있어 인간의 이런 비유를 들으면, 기꺼이 동의할까 ?
여우가 교활하고, 돼지가 미련스럽다고 인간들이 나불대지만,
그렇다한들 여우, 돼지의 본바탕 제 품성이 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이렇듯 天地, 호시(狐豕) 등으로 사물을 이분하여 이치를 궁리함은 왜 그럴까 ?
사물의 이치를 다른 사물에 비추어, 보다 정확히는 기호화하여,
인식 처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

이에 대한 解를 던져줄 전형적인 것으로 나는 주역을 꼽고 싶다.
제대로 깊이 알지 못하지만,
위 물음에 답하기 위해 주역의 겉 구조를 간단히 살펴본다.

주역에 보면 짧은 막대기, 긴 막대기가 등장한다.
구멍 뚫린 짧은 막대기를 음괘, 긴 막대기는 양괘라 한다.
괘란 음, 양이란 추상을 겉으로 드러내기 위한 상징체, 기호와 다를 것 없다. 

태초인이 있어, 우주만물을 음, 양으로 일단 양분하고,
떡 하니 가부좌 틀어짓고 앉아 있다.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이 광대심원 막측(莫測)의 우주를 어찌 대하겠는가 ?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일단 둘로 나누어 보는 일 말고 무엇을 더 할 일이 있겠는가 ?

물론, 신을 만나, 혹은 만들어 그 하나의 길로 달려간 이들도 있고,
쪼개지 말고 있는 그대로 즉, 일체동근(一切同根) 일원상을 쫓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주역은 칼을 들고 일도양단 둘로 쪼개고 본 것이다.

이처럼 쉬운 게 또 있을까 ?
성주괴공(成住壞空), 일세가 돌아 지금의 세상이 결단나고,
또 다른 세상이 나타나고, 거기 인간같은 종자가 다시 씨 뿌려져 있다면,
아마 그들 역시 음양으로 일단 쪼개고 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음양이야말로 인식의 첫 출발이자, 첫 단위라고 생각한다.
첫 단위이니 최소의 단위가 된다.
단위는 최소지만, 그가 對하여 품은 대상은 제일 크고 거칠다.

주역을 누가 처음 시작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복희씨가 되었든, 주문왕이 되었든, 공자가 되었든...
혹은 신농씨, 황제씨가 되었든 그 분분한 족보는 그저 번거로움만 더할 뿐이다.

그게 아니고,
누군가 떡 하니 둘로 쪼개고 반석 위에 앉아
우주, 천지의 비밀을 觀하고 있었다라는 사실이 내겐 큰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명상이란 인도에서 발원한 것으로 알고들 있지만,
주역 공부하는 사람들도 觀法을 익혀 스님네들 참선하듯 우주의 이치를 궁리(窮理)한다.
유학도의 거경궁리(居敬窮理) 역시 궤를 함께 한다.
그 뿐인가, 국선도, 단이니 하는 한국 고유의 수행법을 말하는 이도 있다.

도가, 신선술 쪽이라 하여 다를 것은 없다.
더 나아간다면, 기독교의 기도도, 불교의 염불삼매도,
무속의 치성도 근원을 향한 염원, 愛知, 갈구란 점에서 같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들간 만가지 異同이 있으련만, 나는 다름에 주목하고 싶지 않다.
나는 다만 그들의 애끓는 절규를 들을 뿐이다.

하지만, 명상합네 하며, 갖은 폐단을 작출하는 이들을 많이 본다.
한거정처(閑居靜處)에서 삿됨을 여의고 마음을 고여히 가라 앉혀
지혜와 덕성을 닦는 것을 명상이라 한다면,
수행자니, 명상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대중을 상대로 어찌 알음알이 소식을 들고 나설 수 있음이며,
망상의 한 자락을 펴들고 뜬 구름 잡는 이야기를 흘려 낼 수 있으리오.

명상은 혼자 하는 것이다.

절대고독의 경지라야 명상을 할 수 있는 게다.
공중을 향해 나 명상하는 수행인이야 하고, 
나발 부는 것들은 전부 지옥에나 갈 놈들이다.
명상을 선전하는 것들, 도를 팔아 먹는 것들, 전부 박살을 내야 한다.
나는 그리 그들 앞에 구토하고 있는 것이다.

하니, 그들의 경지를 살펴 볼 것도 없이,
대중 앞에 공개리에 자신을 수행자라고 이른다든가,
비현실적인 시적 어귀를 늘어놓으며, 고상한듯 요설을 늘어놓는
이들은 그것만으로도 더 볼 것도 없이 모두 가짜다.

나는 년전부터 ooo에 들러 이런 이들 두어명을 질타하여,
그들의 정체를 가끔씩 폭로하였다.
이들의 출몰작태는 아주 참람스럽기 짝이 없다.

물론 그들 말은 일응 솜사탕처럼 달콤하다.
달콤한 것은 영혼의 충치, 양심의 수치 그 흉측한 현장 증언이다.
하지만, 무지몽매한 이들은 그에 취하고 있음이다.
이를 우리는 몽매인(蒙昧人, 夢寐人)이라 부른다.

그들은 욕심을 버리라고 하면서,
한편에선 아파트 딱지를 헤아리고 있다.
난 생존조건 확보를 위한 행위를 나무라고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의 이중성, 위선에 구토하고 있는 것이다.
분노하지 말라고 하면서, 저들은 제 자존을 지키기 위해,
댓글 뒷구멍에서 욕설을 퍼붓고,
본글로는 누추하게 제 더렵혀진 양심을 변호하기 바쁘다.

그러므로, 명상을 함부로 팔지 마라,
도를 대중에게 팔아먹지 말라고 나는 꾸짖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 삿된 무리들을 향해,
그냥 돌아가 아파트 딱지를 세는데 충실하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분노를 다스릴 수양이 부족하므로,
함부로 도를, 명상을 얘기하지 않는다.
다만, 내 욕망에, 분노에 충실할 따름이다.
그 욕망이나 분노가 나의 사적 이해에 복무하지 않는 한,
나야말로 이들의 형식을 빌어 나름대로 당당히 명상하고 있는 게다.

명상이, 도가 어디 별도로 있는가 ?
그들 삿된 무리들은 명상을 마치 훈장처럼 완장 차고 나타나 위세를 부리고 있음이다.
그들은 악마구리에 다름 아닌 것이다.
어리숙한 대중을 속이고 오도하는 惡人인 것이다.
저들이 자라면 사린의 옴진리교주가 되며, 말세를 팔아먹는 이장림이 되는 것이다.

ooo에서의 첫 나들이인 1년전과 마찬가지로
최근, 나는 여전한 그들과 다시 조우했다.
그 때 보다 마음보가 더 탁해진 그들을 보자, 다시 구토가 인다.
아직 진정이 덜 되어 이야기가 엉뚱한 데로 흘러갔다.
다시 길머리를 바로 잡고 내 이야기를 재촉해본다. 

####

얼마나 짜릿한가 말이다.
천지의 비밀을 둘로 쪼갬으로서 시작하였다라는 사실.
이게 종국엔 비극으로 끝날런지, 아닐지 모르지만,
그 어둠의 두려움 한가운데, 칼 들어 둘로 쪼개었다라는 그 행위.
난 그 첫 걸음에 놀라고 있는 것이다.

digital이론, 정보공학에서 정보를 계량, 분석하는 방법론으로 고안한 bit, byte...
이들과 주역의 인식체계의 단위 구조가 거지반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묘한 흥분에 싸였었다.

앞의 내 글 “팔진도와 반도체”에 숨어 있는 기반 인식 구조 역시 동일하다.
실제 오늘의, 반도체 대부분은 정보최소단위인 bit를 전자적으로 구현한 것이며,
이들을 조직하고, 엮고, 교환하고, 처리하는 기술의 집적체에 다를 것 없다.
현재 저들은 이를 더 작게, 더 빠르게, 省力化하기 위해 줄달음질 치고 있음이다.

그런데, 둘로 쪼갰으나, 삼라만상은 기실 얼마나 복잡다단한가 말이다.
음양괘, 兩괘로 이들을 어찌 다 살필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하늘은 양, 땅은 음, 남은 양, 여는 음...

하늘이라 하더라도 때에 따라 파란하늘,
저녁 놀의 하늘, 먹장구름 덮인 하늘... 땅 역시 눈 덮인 땅,
지진이 일어나는 땅, 사막, 황야....
실로 다기다양하다.

그러니, 태초인은 괘 하나를 더하여,
한번 더 사물을 나누어 배대(配對)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괘 하나면 음양으로 나뉘어지지만,
괘 둘이면 음음, 음양, 양음, 양양의 소위 사상(四象)이니
4가지로 나눌 수 있게 된다. 

이제 재미가 붙었음인가 ?
나누고 나누면 8괘(2^3), 64괘(2^6) 등으로 줄지어 나눌 수 있다.
나누기를 계속해가면.... 결국 삼라만상이 되고 만다.
그러니 중간에 그칠 수밖에 없다.
주역은 용케 분수를 알아 64에서 멈추었다. 
이것이 기호를 들어 사물의 이치를 겨냥하는 작법체계, 그 태동 전야의 실상이다.

이야기 하다 보니 옆 길로 들어서고 있음을 불현듯 깨닫는다.
주역을 얘기하고자 함이 아니라,
애초에 나는 주리(主理)와 주리(主利)를 얘기하고자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역을 먼저 얘기한 까닭은
앞으로 말할 주리란 이야기가 조금 거친 나머지,
성차별적 견해로 읽혀질 소지가 있으므로,
혹 비판이 있지 않을까하는 염려가 있었다.
그래 미리, 이것은 태초인의 음양법 같은 소박한 수준의 思考놀음 정도
보아주십사하는 사전 길닦음의 禮차림였다.

혈액형 성격감별법처럼 A, B, O, AB 혈액형별로 사람들의 성격을 나누어 보듯이
나 또한 남/여를 理와 利 두 개의 정보 단위로 나누어 쳐다 보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재미다. 충분한 근거를 댈 형편은 아니다.
그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험으로, 感으로 추수려본 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서론이 길었지만, 실은 결론은 아주 짧다.
남자는 理, 이치, 사리, 근원적 원리에로의 지향성을 갖고 있다.
반면 여자는 利, 이해, 생존, 생활, 구체적 현실 지향적이라는 것이다.
이게 남자, 여자를 나누어 보는 나의 code 체계다.

남자는 의리(義理)에 복무하지만, 여자는 이해(利害)에 복무한다.

사기에 보면,

- 이젠 인용하기도 겁난다.
내가 한자 쓰는 것도, 인용하는 것도 저들은 못 마땅하다는 것이다.
한자라야, 고3 정도의 수준에 불과한 것을 두고 말이다.
제 성향에 맞지 않음을 토로하는 것을 탓하는 게 아니다,

저들은 이를 들어 내가 내 명성을 사고, 명석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곡해를 하고 있는 것이 딱할 뿐인 것이다.
심지어는 소위 명상족들을 향한 열등감의 발로로 보는 축도 나타났다.
나는 그저 내 생긴 모습대로 살고 있을 뿐이다.
꾸미려한들 제 놈들에게 내가 잘 보여 떡 하나라도 더 얻어먹을 것이 있을런가 ?
참으로 주제를 모르는 용렬한 것들임이라. - 

士爲知己者死 - 사나이는 자기를 알아 주는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母爲悅己者容 - 여자는 자기를 즐겁게 해 주는 사람을 위해서 화장을 한다. 

이런 말이 있다. 흥미 있는 얘기인즉 출전에서 인용해본다.
이게 재미없는 분은 이부분을 건너 넘으셔도 좋겠다.   
저 아래 ####로,

예양(豫讓)은 춘추시대의 진국인(晉國人)이다.
453년,당시 진국에는 6대가족이 정권을 다투었다,
원래는 범씨(范氏), 중행씨(中行氏)의 수하로 있었으나,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귄신 지백(智伯)을 친구로 삼았다.  

조양자(趙襄子)와 지백(智伯)의 사이는 서로 원수지간이었다.
조양자는 한(韓)、위(魏)양가와 연합하여 지백을 멸하려하였다.
조양자(趙養子)는 자기에게 항거한 지백(智伯)을 쳤다.
그리고 끝까지 자기를 괴롭혔던 지백이 미워,
그의 두개골에 옻칠을 해서 술잔으로 사용하였다. 
그렇게 비참하게 최후를 마친 지백에게 충성을 약속했던
예양은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 이렇게 결심하였다,

"사나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士爲知己者死),
여인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이를 위하여 얼굴을 가꾼다(母爲悅己者容)"라고 하였다.
그리고 '지백이야 말로 진실하게 나를 알아준 사람이었다.
내 반드시 그의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
그래야 내 혼백이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라고 결심한다.

그는 우선 이름을 바꾸고는 죄인으로 가장하여 비수를 품고
조양자의 궁정으로 내시로 들어갔다.
몰래 조양자의 측간에 잠입하여 벽을 발랐는데,
조양자가 똥누러간 사이에 그를 찔러 죽이려다 사전에 발각되고 만다.
그러나 조양자는 지백을 위하여 원수를 갚으려 하였다고 당당하게 외치는
예양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 사람은 의로운 자다. 단지 내가 조심하여 피하면 그만이다.
게다가 지백이 망하고 후사조차 없는데도 그의 신하된 자로서 원수를 갚겠다고
저렇게 자기희생을 서슴치 아니하니 이 자야말로 천하의 현인이로다." 하고
말하면서 수하에게 그를 의인(義人)이라 생각하고 석방하게 하였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이번에는 얼굴을 바꾸었다.
예양은 몸에 옻칠을 하여 나환자로 변장하고,
목소리도 바꾸기위해 숯을 삼켜 벙어리가 되어 저자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다니니,
그 아내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 친구가 알아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그대같이 재주있는 사람이 조양자의 신하되어 섬기면 필시 총애를 받게 될 것이다.
그대가 이에 하고자 하는 일을 하면, 도리어 쉽지 않겠는가.
왜 자신을 이렇게 고생시키는가." 
예양이 답하였다.
"몸을 바쳐 신하가 되고서 죽이고자 한다면, 마음을 두 갈래로 품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장차 천하 후세에 남의 신하가 되어서
두 마음을 품는 자를 부끄럽게 하고자 함이다." 
예양은 이렇듯 자기의 방식대로 복수를 완성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첫 번째 기회가 무산되자,
거지의 행세를 하며 다시 기회를 기다렸다가
조양자가 외출할 때 다리 밑에 숨었다가 그를 찔러 죽이려고 하였으나,
말이 놀라는 바람에 다시 붙잡혔다.
조양자는 이번에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를 잡은 후에 조양자는 그를 책하며 말하였다.
"너는 범씨와 중행씨의 수하였다가 그들을 멸한 지백에게는 왜 복수를 하지 않았느냐?"
예양이 답하길,
"나는 범씨와 중행씨의 수하로 있었을 때는 그들은 나의 능력을 알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지백은 기꺼이 나의 능력을 인정하여 중용하였다.
내 능력을 인정해준 그를 위하여 어찌 내가 복수하지 않을 수 있으랴 !"

"아아! 예자여!
그대가 지백을 위해 충절을 다하였다는 명예는 이미 이루어졌고,
과인이 그대를 용서함도 이미 충분하다. 이제 그대는 각오하라!"
이에 예양은 울며 말한다.

"현명한 군주는 남의 아름다운 이름을 덮어 가리지 아니하고,
충신은 의로운 절개를 지키기 위하여 죽을 의무가 있습니다.
지난번 군왕께서 이미 신을 관대히 용서하시어,
천하에 그 어짐을 칭송치 아니하는 자가 없습니다.
오늘의 일로 말하자면, 신은 죽음을 당해야 마땅하오나,
원컨대 신이 군왕의 옷을 얻어 그것을 칼로 쳐서,
그로써 원수를 갚으려는 뜻을 이루게 해주신다면,
비록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이에 조양자는 옷을 벗어 주었다.
예양은 조양자에게 간청하여 그의 옷을 받아 펄쩍 뛰면서 칼로 세번 그 옷을 베었다,
“내 비로소 지하에서 잠이든 지백에게 보답할 수 있겠다.”는 말을 남기고
칼을 입에 물고 엎어져 태연히 자결하였다.
조나라의 지사(志士)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모두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한다.

####

士爲知己者死

여기를 보면 男이 아니고 士로 되어 있다.
같은 남자면 다 남자가 아니다.
선비 士이니 선비쯤 되어야 知己者死할 수 있는 것이다.
의리를 위해 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사나이,
목숨 보다 더 중한 것이 없는데,
죽은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얽혀진 명분을 위해
제 명을 내놓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일이다라며,
이를 필부지용으로 폄하하는 사람도 있기는 있다.

하지만, 이게 利害를 셈하며 제 뜻을 행한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해보인다.
설혹 제 이름을 남기기 위해,
즉 명예를 탐한 것이 아니냐 하는 핀잔을 퍼붓는 사람일지라도
그저 단순한 利를 탐한 것은 아니라는데 동의하실 것이리라.
즉, 예양이 밥을 구하고 있는 게 아니고,
돈을 구하고 있는 게 아님은 분명하지 않은가 말이다.

반면 여자는 얼굴을 가꾼다.
그들은 왜 얼굴을 가꾸는가 ?
남자를 위해서인가 ?
과연 그런가 ?

내가 여자는 主利라고 하였을 때, 그들이 利를 위주로 좇음을 말하고 있지만,
그 저변에 흐르는 근원의 동력은 따로 있다.
저 존엄한 숙명, 한편으로서는 슬프고, 한편으로는 잔인한 그 숙명.

그게 무엇인가 ?
생존본능, 생식본능, 종족보존.
이에 갇혀 있는 존재를 나는 여자로 보고 있음이다.

이게 여자의 책임인지, 조물주의 기획인지 모르지만,
나는 하여간에 여자에게 본원적으로 들씌워진 숙명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니 그들이 얼굴을 꾸미고 있는 것은 남자를 위함이 아니다.
아름다움을 구하고 있음도 아니다. 

남자를 구함으로서 생식조건을 확보하고,
종국엔 씨를 받아, 지상에 생명을 내놓는 것이다.
저 대지가 곡식을 내어놓듯이 그들은 종족보존의 위대한 대업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러하니, 저 어리석은(?) 사나이들,
예양과 같은 뜬 구름 의리, 명분이란 얼마나 헛되고 헛된 것인가 말이다.
예양은 빨간 피 도는 생명 한 톨도 이어가질 못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오히려 생명을 버리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여자는 그러하니,
이 거친 세상에서 생명을 이어나갈 조건을 가려 택하기 위해
셈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어여쁘다는 얼굴을 앞 세우고
가슴 속에 주판을 품고 살고들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 가슴은 남자와 다르게 불룩 튀어 나와 있음이 아닐까 ?

그 누가 여자는 약한 존재라고 하였는가 ?
바둑을 둬보면 나의 이야기가 그저 엉터리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남자 바둑은 원대한 포석으로,
유연한 판짜임으로 기리(棋理)를 추구해나간다. 

허나 여자 바둑은 다짜고짜 싸움으로 치달아 나간다.
한 집 짓는 게 급한 것이다. 돌 하나 따 먹는게 더 실속 있는 게다.
그들은 이해에 복무하고 있는 것이다.

사내가 철이 들 때는 언제인가 ?
계집 얼굴이 가면일 수도 있다라는 자각의 순간에 찾아든다.
저 아름다운 얼굴이 가면이 아닌가 하는 의심으로부터,
여자를 알게 되고, 차츰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가게 되는 것이다.
진실한 여자는 이 경계를 넘어섰을 때, 발견된다.
당신은 그런 여자를 하나라도 알고 있는가 ? 

당신 가까이 그런 여자가 있다면,
그대는 인생에서 반은 성공한 것이다.
그들은 당장의 빵, 집, 옷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보기엔 남자들은 전부 철없는 아해들인 것이다.

맞는 말이다.
사내 자식들 폼 잡고 우쭐대지만, 
게서 집이 나오나, 빵이 나오는가 ?
그들은 얼굴을 팔아,
사내 녀석들을 들로 보내, 사냥을 시키고, 투전판으로 내몰아
돈을 따오게 만드는 것이다.
의기 양양하게 들로, 산으로, 강가로 나가 열심히 싸우고 돌아온다.

그들에게 전해지는 보상은 그 짧디짧은 일순간의 사정(射精)의 열락뿐인 것을.
뒷전에서 그녀들은 앗아거둔 지폐를 세며,
조물주의 기획에 기꺼이 공범이 된다.

자 새벽이 된다.
사내들은 다시 일어나 전사(戰士)가 된다.
우쭐대며, 거드름 피며 계집 마중을 받으며 동굴속을 나오지만,
그들이 할 일은 여전히 피투성이 되도록 싸움박질 하는 것이다.
그녀들은 동굴속에 앉아, 개짐 개고, 기저귀 장만하고,
뱃 속에 자라고 있는 생명을 셈한다. 

하지만, 이들 철없는 사내 녀석들의 공상 속에서 우주의 진실이 벗겨지고,
이해를 벗어난 아름다운 우정이 빛나
우리의 가슴을 청량히 적시고 있는 게 아닌가 말이다.
사내들의 이 보상이 그래 넉넉한가 ?
이게 보상인가 ?
보복인가 ?
질곡인가 ?
음모인가 ?....

여기 aaa와 bbb간의 싸움에 등장하는
xx가 사기꾼인가 아닌가라는 명분, 진위가 아니라,
만약 여자들만의 다툼이었다면,
누가 얼마 쳐먹고, 누가 얼마 벗기어 먹었는가 하는데 더 집중하였으리라.

최근 ooo에서의 분란에서도 보면,
기실 여자들이 더 극성이고, 쌍욕도 더 많이 해대고 있지 않았는가 말이다.
물론 jo인지 ja라는 극히 여성스런 인사는 예외로 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는 이 자 아랫도리를 벗겨 보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했다.
이 자도 부랄이 달렸을까 궁금했으니까.
그런데, 그럴 기분이 이내 사그러졌다.
유무상관없이 퀴퀴한 다꽝 냄새 나기는 매한가지였을 터이니까.

묻는다.
당신은 주리주의자(主理主義者)인가 ?
주리주의자(主利主義者)인가 ?
당신은 사내인가 ?
계집인가 ?
나는 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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