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자식같이 키우다.'란 말에 이는 욕지기

소요유 : 2009. 2. 25. 22:37


동물을 키워 생업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름하여 목장(牧場)을 운영하는 이들이 되겠다.

목장은 혹간 동물농장이라 달리 불리기도 한다.
농장(農場)이란 농업이 이루어지는 곳이니,
동물농장이라고 칭하게 되면,
일견 동물뿐 아니라, 식물도 다루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요새는 목장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지니까,
부러 이리 농장으로 고쳐 부르는 이도 생겨나고 있다.

목장이라 하면 넓은 초지에 그림 같은 집 한 채,
거기 자유롭게 뛰어노는 사슴, 염소, 소 등이 연상되면서,
잃었던 꿈의 고향으로 우리를 이끌기도 한다.
하지만, 이게 우리 어렸을 때의 철없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 큰 이제야 모를 까닭이 없다.

정작, 목장이든, 동물농장이든 그게 거지반 여느 공장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게라.
아니, 공장보다 더 차갑고 무서운 곳.
외려 살아 있는 동물들이 쇠창살로 만들어진 좁은 우리에 갇혀,
한시도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씨름하다 제 명을 채우지 못하고 스러져 가는 곳임을
어찌 모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6년 전쯤 충주를 개인적인 일로 자주 방문하던 때가 있었다.
거기 목적한 곳인 모처의 임야를 오르다 보면,
이웃하여 사슴목장이 하나 있다.

산에 오르기 전에 커다란 엘크사슴이 쉬고 있는 것을 보고 올랐는데,
내려올 때 보니, 그 사슴이 없어지고 울타리가 텅 비어 있는 게 아닌가.
이게 웬일인가 하고 잠시 주춤하고 있는데,
목장주인이 나타나더니 나를 그의 집으로 이끈다.

이 장면은 내가 언젠가 다른 곳에서 썼던 글을 옮겨 이어본다.

갇혀 있는 사슴 눈을 쳐다보면,
거기엔 슬픔이 호수처럼 고여 있습니다.
너무 순수해서 차마 더 쳐다 볼 수가 없습니다.

이쪽 동네의 죄로
그를 오래 대하기엔 이내 부끄러움이 일기 때문입니다.

6년 전쯤 저의 산 앞자락에 있는 사슴목장을 지나
산에 갔다 내려오니,
조금 전 마주 쳐다보던 그 사슴이 없어져 버린 기억이 있습니다.
커다란 엘크.

그 사슴목장 주인이 반갑게 저를 부르며, 집으로 안내합니다.
그 집 거실에 일군의 남녀들이 쉬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사슴 고기 포를 뜨며,
우정 제게 권하며 먹으라고 합니다.

방금 잡았다고 하더군요.
의기양양 입맛을 다시던 죽 둘러선 그들.

돌아서며,
텅 빈 철망 속
그가 서 있던 그 자리를 지나
저는 제 길 따라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그 산에 널려 있던 올무, 덫들.
죄다 걷어 내려오다,
덫에 걸린 동네 강아지를 구해 내려온 적도 있습니다.

천축 구법 여행기 법현전을 보면,
온 나라가 고기를 먹지 않는 곳이 있더군요.
그게 대략 5세기 정도의 일입니다.

저는 광우병에 희망을 걸고도 싶습니다.
소들의 항거.

독립운동가 김산은
"테러는 폭력이 아니고 자유에 대한 열망이다"라고 절규합니다.
저들 동물들에게도 김산이 나타나길 바래봅니다.
제가 김산은 못 되어도,
그들의 입이 되어 대신 절규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필경은 외면당할 슬픈 몸짓임을 알기에....

나는 동물을 대상으로 생업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소망이 있다.
제발 바라건대,

“자식같이 키운 ...”

이런 말 좀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이 말들을 들으면 울컥 욕지기가 일어난다.

구글을 통해 검색한 기사 내용을 보자.

https://mentalhome.joins.com/news/wellbing_article.asp?total_id=3113462&chk=w&serv=005
"자식같이 기른 닭을 모두 땅에 묻는데 차마 눈뜨고 못보겠고 정말 참담합니다."

http://hantoma.hani.co.kr/board/view.html?uid=183948&cline=&board_id=ht_rights:001026
분노에 찬 농민들은 자식같이 기른 소를 자신의 손으로 때려 죽였으며, 심지어는 어떤 농민들은 스스로 목숨까지 꿇은 일도 있었다.

http://www.sdg43.com/b8.html
사슴농장주인들은 사슴을 매일 같이 자식처럼 돌보기 때문에 사슴에게 조그만 변화가 있어도 알아냅니다.

이런 화법에는 화자의 끈적끈적한 욕망이 숨어 헐떡이고 있다.
게다가 하나의 말속에 모순되는 두 가지 뜻이 상호 충돌하고 있다.

기르던 동물을 끝내는 명을 끊어내는 길로 몰아내게 될 터인데,
제 자식도 길러 이리 사지로 인도할 수 있음인가? 

기를 때, 제 아무리 정성을 기우린다한들,
우유든 고기든 증체(增體)하려고 욕심을 내지 않았던가?
또한 사료는 적게 먹이려고 애를 쓰지 않았던가 말이다.
천하의 그 어떤 부모가 자식을 기르면서,
제 자식 고혈(膏血)을 쥐어 짜내려고,
이리 이악스런 짓을 자행하겠는가 말이다.

생업을 짓는 것,
백번 양보하여 그게 제 아무리 도리 없어 모진 것이라 한들,
보내는 마지막 길에 멈춰 서서, 죄스럽다는 감정을 갖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그저 묵묵히 여읠 염량이라도 가질 수는 없을 것인가?

이게,
인간과 동물,
강자와 약자로 나뉜 차가운 현실 속에서,
그나마, 우리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동물이든, 인간이든,
모두 혈관에는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음이라.

이를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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