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그릇을 닦거나, 혹은 닦지 않는다.
이틀간 사정이 있어 강아지를 돌보지 못했다.
(※ 참고 글 : ☞ 2009/02/19 - [소요유] - 언제 아침이 될거나?)
물그릇 안에 물이 구정물로 변하고 있는 중이다.
까치나 비둘기가 남은 먹이를 바로 앗아가기 때문에,
사료는 그릇에 남아 있질 않는다.
물그릇도 저들 똥으로 더렵혀지기 일쑤다.
주인집은 늘 괴괴할 정도로 적막이 흐른다.
저들의 무심함은 배워둘만하다.
무엇이든 알고 싶다면.
며칠 전 어두운 저녁.
강아지를 보려고 들렸는데,
어두운 구석에 주인 아들이 서 있었다.
한창 개를 어르고 있는 중이었다.
불각시에 나를 마주치자 그는 심히 당황한 눈치다.
인사도 변변하게 치루지 못하는 비루한 인간이지만,
구레나룻을 번지르하게 기른 모습이 자못 그럴싸하다.
거죽으로 무엇인들 말하지 못할쏜가?
말하는 것은 모두 삼세번 부정해야 한다.
그것이 말이든, 얼굴이든, 글이든 회의해야 한다.
진실을 보려면.
시베리안 허스키는 본래 아들이 기르던 것이라고 한다.
제 아버지 집에 맡기고는 주말에만 들르는 처지라 한다.
해서 그 개를 두고는 정이 적지 않다고 언젠가 내게 말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이리저리 변명을 늘어놓는다.
세상에, 사정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으랴.
또한 남의 형편을 어찌 헤아려 이해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하지만, 개를 어를 짬이 있다면,
물그릇이라도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평소 물 한 방울, 먹이 하나 주지도 않는
저 인간의 모진 박정함 속에서도,
자기 개라고 어를 틈은 있단 말인가?
저들 집에 기식하는 이들, 식구 넷,
그 영혼은 내게 탐구의 대상이다.
아니 인간 일반이라한들 그리 빗겨나갈까 하는 의구심과 함께.
오늘 동산을 넘어 아랫동네로 넘어가는데,
작년에 새로 차린 횟집 수족관이 눈에 확 들어온다.
수족관이 말끔하게 닦여 있다.
그 안에 고기들이 제 앞날을 아는지 모르는지 곧잘 헤엄을 치고 있다.
나는 가만히 읊조린다.
“사람들은 그릇을 닦거나, 혹은 닦지 않는다.”
방금 지나친 강아지 물그릇은 며칠 돌보지 않았다고 구정물로 변하고 있다.
주인은 물그릇뿐이 아니라, 먹이 그릇도 내팽개쳐 둔다.
고물주이답게 그릇들은 많다.
하나같이 더럽고 불결해서 그렇지.
아마도 올 여름엔 저 중에 하나는 저승길로 가게 될 공산이 크다.
나의 숙제.
수족관은 늘 깨끗이 닦여진다.
그렇다한들, 그게 그 안에 잠시 갇혀 있는 물고기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
다만, 주인의 주머니를 두둑이 불릴 속셈만이 수족관을 깨끗이 할 동력일 뿐.
“사람들은 그릇을 닦거나, 혹은 닦지 않는다.”
별러 보아도,
이 양자 사이에 그럴듯한 차이가 얼마나 있는지,
아직 나는 잘 모르겠다.
최소한 某月 某日 현재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