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난세(難勢)

농사 : 2009. 6. 29. 23:10


밭에다 쓰레기를 버리는 자가 있었다.
2007년에야 명확히 알게 되었지만,
그 전부터도 저들은 한쪽 귀퉁이를 전용 쓰레기장으로 사용 해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밭 입구에 정문을 마주하고 있는 某부대가 그 당자다.
쓰레기 버리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 주변에 이리저리 어질러 놓는 것도 사뭇 마땅치 않았음이라,
2007년 당시 농사를 처음으로 짓자고 나섰을 때부터,
부대 측에 옮겨 갈 것을 여러 번 촉구하였으나,
저들은 안하무인 제멋대로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주말마다 들르는 형편인 게라,
또한 군인들인즉 사정을 살펴주고자 일응 참아내기로 하였다.
게다가 정문 앞쪽은 부대 면회객들을 위한 주차장으로 터를 비워 할애까지 하였지 않았음인가?

그러함에도 지지난 주에 쓰레기들이 여기저기 몹시 흩뜨려진 것을 보고는,
저들을 다시 접촉하였다.

이번엔 기필코 부대장을 만나고자 하였으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부대장 이취임식이 벌어지고 있었다.
부대 정문 앞으로 선임하사와 대위 하나가 나를 맞이하러 나선다.
이전에도 그러하듯이 저들은 말이야 늘 반지르하다.

“불편함이 많았겠다.”
“바로 깨끗이 처리하겠다.”

나는 막아서며 그에게 이른다.

“그런 이야기는 3년째 이제까지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러한즉 그 말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저 아래 민가에 가보아라,
제 집에서 나온 쓰레기를 남의 집 앞에다 버리는 집이 단 하나라도 있는가?”
“마땅히 부대에서 나온 쓰레기는 부대 안에서 자체 처리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쓰레기를 더럽게 여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면서 필연코 나오는 쓰레기를 하시하여,
남의 터에다 버리는 행위를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그러자 응대하던 군인이 말한다.

“죄송합니다.”
“바로 위에 보고하고 부대 안으로 쓰레기장을 옮기겠습니다.”
“오늘 안으로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번 주 안으로 쓰레기장을 옮겨 가겠습니다.”

내리 삼년간 접촉하여도 요지부동, 안하무인 방자하게 굴던,
부대 측의 처사가 단번에 바로 잡히고 말았다.

부대장이 그 날 새로 취임하고 난 이후에,
도리가 바로 서고, 염치가 되돌아온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하기에,
만사 모든 일이란 총 우두머리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임이라.

부대장 하나가 일을 제대로 바로 잡고자 하니,
일거에 곤두질 쳤던 일이 바로 서지 않았는가 말이다.

내가 늘 다니는 우리 동네 북한산 국립공원에도
근 4년 이상 한 곳에 모여 앉아 거의 연중,
화투 질에, 음주, 고성방가, 쓰레기 투기하는 불한당들이 있다.
장소도 특정되었고, 인물도 특정된 사안인데도,
북한산 관리사무소 측에 수차 고정해도 전혀 통제가 되지 않고 있다.
나는 이것이 바로 사무소장의 업무 집행력내지는 리더십에 중대한 결함이 있음을 예증한다고 본다.

직원은 물론 소장과 직접 면담을 하여도 처리가 되지 않는다.
참으로 고약한 노릇이다.
저들 철완(鐵碗)들이란 과시 대단하다.

그러한들, 이를 해결하자고 장관 또는 대통령을 만나자고 해야 하겠는가?
이까짓 일에 장관이, 대통령이 나서야 해결된다면,
그 나라는 진작에 망해도 사뭇 늦었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명박 대통령이 전봇대 하나 없앴다고 우쭐 뽐내었지만,
전봇대 하나 없애는데 일국의 대통령이 나서야 되는 실정이라면,
더이상 무엇을 기대하랴?
(※ 만약 이게 진짜배기 필요한 일인지, 아닌지 설왕설래가 있지만.)

그런데,
생각이 이 지점에 이르자,
여기에 그쳐서는 사뭇 모자란 느낌이다.
한즉, 이내 한비자의 난세편(難勢篇)을 나아가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회광반조(回光返照) 공부 삼아 아래 되짚어 본다.

참고로 번역문 가운데 세(勢)라 함은,
한비자 사상의 삼대 요목(要目)인
법(法), 세(勢), 술(術) 중의 하나로서,
지위에 의해 확보되는 배타적인 절대 권세 정도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예컨대 왕이 가지는 권세는 왕이란 지위를 갖게 되면,
자동으로 창출되는 대세(對世) 불가침적인 절대적인 권력과 세력이다.
이는 특히 본문 중에 출현하는 신자(愼子),
즉 흔히 신도(愼到)라 불리우는 이에 의해 주장되었다.
한비자는 상앙(商鞅)의 법(法)과 신불해(申不害)의 술(術),
그리고 신도(愼到)의 세(勢)를 아우르고 있으니,
기존의 법가 이론을 종합하여 완성한 명저이다. 

韓非子 難勢

慎子曰:“飛龍乘雲,騰蛇遊霧,雲罷霧霽,而龍蛇與螾螘同矣,則失其所乘也。賢人而詘於不肖者,則權輕位卑也;不肖而能服於賢者,則權重位尊也。堯為匹夫不能治三人,而桀為天子能亂天下,吾以此知勢位之足恃,而賢智之不足慕也。夫弩弱而矢高者,激於風也;身不肖而令行者,得助於眾也。堯教於隸屬而民不聽,至於南面而王天下,令則行,禁則止。由此觀之,賢智未足以服眾,而勢位足以詘賢者也。”

신자(愼子)가 말했다.
비룡이 구름을 타고, 등사가 안개를 노닐지만, 구름이 개이고, 안개가 걷히면 지렁이나 개미와 매한가지로 날 수가 없다. 현인이 어리석은 자에게 굴복하는 것은 그 권위가 가볍고 지위가 낮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가 능히 현명한 자를 복종시킬 수 있는 것은 그 권위가 무겁고 지위가 높기 때문이다. 요(堯)도 필부에 불과하였다면 세 사람도 다스리지 못했을 것이며, 걸(桀)이 천자였기에 천하를 어지럽게 하였다. 그러므로 권세와 지위야말로 족히 의지할만한 것이며, 현명한 지혜라는 것이야말로 그리 부러워할 바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무릇 쇠뇌(弩)가 약하더라도 높이 나르는 것은 바람을 타기 때문이다. 그 몸이 별 볼 일 없을지라도 명령이 행해지는 것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협력을 받기 때문이다. 요가 (보통의 신분이었다면) 노예에게 가르침을 주려한다한들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을 터다. 하지만 천자의 신분이 되자 명령하면 바로 실행이 되고, 금한즉 바로 그치게 되었다.
그러므로 덕이나 지혜는 그것으로 백성을 따르게 할 힘이 없지만 권세나 지위를 갖게 되면 그것으로 현자도 굴복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應慎子曰:飛龍乘雲,騰蛇遊霧,吾不以龍蛇為不託於雲霧之勢也。雖然,夫釋賢而專任勢,足以為治乎?則吾未得見也。夫有雲霧之勢,而能乘遊之者,龍蛇之材美也。今雲盛而螾弗能乘也,霧醲而螘不能遊也,夫有盛雲醲霧之勢而不能乘遊者,螾螘之材薄也。今桀、紂南面而王天下,以天子之威為之雲霧,而天下不免乎大亂者,桀、紂之材薄也。

신자(愼子)의 이 말에 대하여 어떤 이가 이리 반박하여 이른다.

비룡이 하늘을 타고, 등사가 구름을 노닌다 하였음이라! 나는 이들이 구름이나 안개의 힘에 의탁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무릇 현명함을 놓아 버리고 오로지 세(勢)에만 맡기면 잘 다스려질까나? 나는 그런 예를 본 적이 없다. 무릇 구름이나 안개가 있어 그를 잘 타고 노닐 수 있는 것은 용과 등사가 그 재주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름이 제 아무리 짙게 피어오르더라도 지렁이는 그것을 타지 못할 것이며, 안개가 자욱하다한들 어찌 개미가 노닐 수 있으랴. 짙은 구름과 자욱한 안개가 있다한들 그것을 타고 노닐 수 없음은 지렁이와 개미의 재주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지금 걸주(桀·紂)가 천자가 되어 천자의 권위를 마치 구름이나 안개로 삼아 정치를 한다한들 천하가 크게 어지러운 것을 면치 못하는 것은 걸주의 재주가 용렬하기 때문이다.

且其人以堯之勢以治天下也,其勢何以異桀之勢也,亂天下者也。夫勢者,非能必使賢者用已,而不肖者不用已也,賢者用之則天下治,不肖者用之則天下亂。人之情性,賢者寡而不肖者眾,而以威勢之利濟亂世之不肖人,則是以勢亂天下者多矣,以勢治天下者寡矣。

요가 천하를 다스렸던 것과 걸이 천하를 어지럽혔던 것에 무엇이 다른 바가 있음인가? 
대저, 권세라는 것은 반드시 현명한 자가 사용하여야 하며, 어리석은 자가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허나 현명한 자가 그것을 사용하면 천하가 다스려지고, 어리석은 자가 그것을 사용하면 천하는 혼란에 빠진다.인간의 본성이란 현명한 자는 적고 어리석은 자는 많다. 위세의 이익으로써 세상을 어지럽히는 어리석은 자를 돕는다면 위세로써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이 많아지고, 위세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은 적어질 것이다.

夫勢者,便治而利亂者也,故《周書》曰:“毋為虎傅翼,將飛入邑,擇人而食之。”夫乘不肖人於勢,是為虎傅翼也。桀、紂為高臺深池以盡民力,為炮烙以傷民性,桀、紂得乘四行者,南面之威為之翼也。使桀、紂為匹夫,未始行一而身在刑戮矣。勢者,養虎狼之心,而成暴亂之事者也,此天下之大患也。勢之於治亂,本末有位也,而語專言勢之足以治天下者,則其智之所至者淺矣。

무릇 세라는 것은 세상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도, 어지럽히는 데도 편리하다. 그래서 周書에도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마라. 날개를 달아주면 장차 마을에 뛰어들어 사람을 잡아먹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에게 세를 타게 한다면 이는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격인 게라. 걸주는 높은 대와 깊은 연못을 만드느라 백성들의 힘을 빼앗았고, 포락의 형을 만들어 백성들의 생명을 상하게 했다. 걸주가 이런 난폭한 짓을 행할 수 있음은 천자의 권위라는 날개를 달아주었기 때문이다. 걸주가 만일 일개 필부에 불과하였다면 그런 짓을 하기도 전에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하다면 세라는 것은 호랑이나 이리의 마음을 기르고, 난폭한 일을 일으키는 것이니 천하의 큰 재난인 것이다.

세의 다스려지고 어지러운 바는, 본래 어떤 일정한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세만 있으면 천하가 다스려진다고 애오라지 말하고 있는 것은 그 지혜가 천박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夫良馬固車,使臧獲御之則為人笑,王良御之而日取千里,車馬非異也,或至乎千里,或為人笑,則巧拙相去遠矣。今以國位為車,以勢為馬,以號令為轡,以刑罰為鞭筴,使堯、舜御之則天下治,桀、紂御之則天下亂,則賢不肖相去遠矣。夫欲追速致遠,不知任王良;欲進利除害,不知任賢能;此則不知類之患也。夫堯、舜亦治民之王良也。

가령 명마와 튼튼한 수레가 있다한들 무능한 자에게 맡기면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왕량에게 몰게 하면 천리를 달리게 할 수 있다. 마차는 다를 바 없는데도 한쪽은 천리를 달리고, 한쪽은 웃음거리가 된다. 이는 기술의 교묘함과 졸렬함이 크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이제 나라를 차에 비유하고, 세를 말에 비유하며, 호령을 고삐에 비교하고, 형벌을 채찍으로 비유하고, 요순이 마부라면 천하를 잘 다스릴 것이요, 걸주라면 천하가 어지러울 것이다.
이는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너무 멀리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무릇 멀리 달려가려함에 왕량을 쓰지 않고, 이익을 얻고 해를 없애려는 자가 현명한 자를 쓰려하지 않는다면 도대체가 이런 따위의 우환을 모르는 소치이다. 요순도 백성을 다스리는데 있어 왕량과 같음이다.

復應之曰:其人以勢為足恃以治官。客曰“必待賢乃治”,則不然矣。夫勢者,名一而變無數者也。勢必於自然,則無為言於勢矣。吾所為言勢者,言人之所設也。또 다른 이가 이에 다시 반론을 펴서 말한다.

신자는 세가 관리를 족히 다스릴 수 있다고 말했으나, 어떤 이는 이에 반대하여 현명한 사람이어야 다스려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잘못 된 생각이다. 무릇 세라는 것은 말은 하나이지만 실은 여러 의미가 있다. 세가 자연적으로 필히 생겨난 것이라면 이에 대하여 말할 바 없다 하겠으나, 내가 말하는 세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을 이름이다.

今日堯、舜得勢而治,桀、紂得勢而亂,吾非以堯、桀為不然也。雖然,非一人之所得設也。夫堯、舜生而在上位,雖有十桀、紂不能亂者,則勢治也;桀、紂亦生而在上位,雖有十堯、舜而亦不能治者,則勢亂也。

이제 앞에서 어떤 이가 말하길, 요순이 세를 얻으면 잘 다스려지고, 걸주가 득세하면 어지러워진다고 했다. 나는 요순, 걸주가 그리 같지 않음을 굳이 시비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는 인간이 만든 세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니다. 무릇 요순이 태어날 때부터 높은 자리에 있었다면 비록 걸주가 열이 있어도 어지러워지지 못했을 것이다. 자연 세에 의해 다스려졌을 것이다. 또한 걸주가 태어났을 때부터 높은 자리에 있었다면, 비록 요순이 열이 있다한들 천하는 다스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즉 자연 세에 의해 어지러워졌을 것이다.

故曰:“勢治者,則不可亂;而勢亂者,則不可治也。”此自然之勢也,非人之所得設也。若吾所言,謂人之所得勢也而已矣,賢何事焉?何以明其然也?客曰:“人有鬻矛與楯者,譽其楯之堅,物莫能陷也,俄而又譽其矛曰:‘吾矛之利,物無不陷也。’人應之曰:‘以子之矛陷子之楯何如?’其人弗能應也。”以為不可陷之楯,與無不陷之矛,為名不可兩立也。夫賢之為勢不可禁,而勢之為道也無不禁,以不可禁之勢,此矛楯之說也;夫賢勢之不相容亦明矣。

그러한즉 세에 의해 다스려질 때에는 어지럽혀질 수 없으며, 반대로 어지러울 때는 다스려질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모두 자연으로 형성된 세인 경우인 것이다.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경우가 아니다. 내가 말하는 세란 사람이 만든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전제하에서는 현명함은 어찌 문제가 되랴? 왜 그러한가?
창과 방패를 파는 사람이 있었다. 그 자는 방패의 튼튼함을 말하기 위해 어떤 것으로도 이를 뚫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돌연 또 창을 자랑하길 내 창은 예리하여 뚫지 못할 물건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물었다. 당신 창으로 당신 창을 뚫으면 어찌 되는가 하고 물었더니 그 자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뚫리지 않는 방패와 뚫지 못하는 것이 없는 창이란 함께 양립될 수 없다. 현명한 자의 뜻은 세로서 금할 수 없다. 반면 세는 금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금할 수 없는 현명함과 금지 시키지 못할 것이 없는 세라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므로 현자와 세는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명백하다.

且夫堯、舜、桀、紂千世而一出,是比肩隨踵而生也,世之治者不絕於中。吾所以為言勢者,中也。中者,上不及堯、舜,而下亦不為桀、紂。抱法處勢則治,背法去勢則亂。今廢勢背法而待堯、舜,堯、舜至乃治,是千世亂而一治也。抱法處勢而待桀、紂,桀、紂至乃亂,是千世治而一亂也。且夫治千而亂一,與治一而亂千也,是猶乘驥駬而分馳也,相去亦遠矣。

또한 요순걸주는 천세에 한번 나타날까 말까한 사람들이다. 세상의 치자란 보통 중간 정도의 인물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다. 내가 세에 대해 말할 경우에는 바로 이런 중간 정도를 대상으로 한다. 중간치들은 위로는 요순에 미치지 못하고, 아래로는 또한 걸주에 이르지 못한다. 법에 구속되고 세를 따르면 다스려진다. 법을 어기고 세를 버리면 어지러워진다.
지금 세를 폐하고 법을 어기면서 요순을 기다리고 있다면, 요순이 나타날 때 다스려지리라. 이는 천세는 어지럽다가 일세만 다스려지는 결과가 될 것이다. 법을 껴안고 세를 따르며 걸주를 기다린다고 하자. 걸주가 나타나면 어지러워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천세는 잘 다스려지고 일세는 어지러워질 것이다. 천세가 다스려지고 일세가 문란해지는 것과 일세가 다스려지고 천세가 문란해지는 것의 차이는 마치 준마를 타고 정반대의 방향으로 달리는 것과 같아 그 거리는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

夫棄隱栝之法,去度量之數,使奚仲為車,不能成一輪。無慶賞之勸,刑罰之威,釋勢委法,堯、舜戶說而人辯之,不能治三家。夫勢之足用亦明矣,而曰必待賢則亦不然矣。
(※ 隱栝 : 用以矯正邪曲的器具 )

무릇 나무를 휘게 하는 기구를 버리고, 도량을 재는 도구를 여읜다면 해중에게 수레를 만들게 하더라도 단 하나 바퀴조차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그렇듯이 상으로써 권면하거나, 형벌로써 위엄을 밝히지 않고, 또한 세를 놓아 버리고 법을 포기한다면 비록 요순일지라도 세 집조차 다스리지 못할 것이다. 그런즉 세가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명백하다 하겠다. 그런데도 현명한 사람을 반드시 기다린다는 것은 역시나 잘못인 것이다.

且夫百日不食以待粱肉,餓者不活;今待堯、舜之賢乃治當世之民,是猶待粱肉而救餓之說也。夫曰良馬固車,臧獲御之則為人笑,王良御之則日取乎千里,吾不以為然。夫待越人之善海遊者以救中國之溺人,越人善游矣,而溺者不濟矣。夫待古之王良以馭今之馬,亦猶越人救溺之說也,不可亦明矣。

또한 백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좋은 밥과 고기를 기다린다면, 굶고 있는 자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지금 요순을 기다려 당세의 백성을 다스리고자 하는 것은 마치 좋은 밥이나 고기를 기다려 기아를 구휼하고자 함과 같다. 저 앞에서 말하길, ‘좋은 말과 견고한 마차를 무능한 사람이 몰게 된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며, 왕량이 마차를 몰면 천리를 달릴 수 있다’라고 했지만,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대저 월나라의 수영 잘하는 이를 기다려 중국의 물에 빠진 자를 구하려 한다면, 제 아무리 월나라 사람이 수영을 잘한다한들, 물에 빠진 자를 구해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옛 사람인 왕량을 기다려 이제 말을 몰게 한다는 것은 월나라 사람에게 중국에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게 하는 것과 같이 명백히 그르다.

夫良馬固車,五十里而一置,使中手御之,追速致遠,可以及也,而千里可日致也,何必待古之王良乎!且御,非使王良也,則必使臧獲敗之;治,非使堯、舜也,則必使桀、紂亂之。此味非飴蜜也,必苦萊亭歷也。此則積辯累辭,離理失術,兩末之議也,奚可以難,夫(or失)道理之言乎哉!客議未及此論也。

좋은 말과 마차를 부리는데 는 50리마다 이를 준비하였다가, 그저 평범한 마부에게 그것을 몰게 한다면 속히 달려 먼 거리를 달릴 수 있을 것이며, 가히 천릿길도 하루 만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하니 옛 사람인 왕량을 하필 기다릴 필요가 있으랴. 
또한 왕량에게 말을 몰게 하지 않고, 종에게 맡기면 실패한다는 것이며, 정치 역시 요순이  다스리지 않으면 걸주가 맡을 때처럼 필히 어지러워진다고 하였지만, 이는 마치 엿이나 꿀이 아니면, 꼭이나 쓴 나물이나 약밖에 없다는 것과 같다. 이런 말은 그저 말놀음에 불과한 것으로 도리를 벗어난 잘못이라 할 것이다. 어찌 이치에 맞는 말을 비난할 수 있는가? 이 사람의 말은 신자(愼子)의 말에 미치지 못한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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