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육식-채식-소식-단식-죽음-평화

소요유 : 2008. 2. 15. 14:17


육식-채식-소식-단식-죽음-평화.

이 일련의 고리들을 맘속으로 쫓아간 적이 있었다.

육식이란 뭣인가 ?
마트에 가면 랩으로 얌전히 포장된 음식이 마치 매끄러운 공산품처럼 진열되어 있다.
바로 얼마전 좁은 울타리에 갇혀 신음하던 그들의 간난신고(艱難辛苦),
한 많은 삶은 한 점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채,
인간의 야만적 폭력과 경제적 탐욕 속에 기.술.적으로 은폐되어 있다.
한 때 그들 핏줄에 따뜻한 피가 흐르고,
고개 들어 하늘 보며 프르르 물푸레질을 하던
저 순하디 순한 눈동자를 가진 그들을 기억해낼 수 있는가 ?

육식하며 입안에 가득 고이는 침이란 결국 이들의 짓밟힌 생명의 생생한 알리바이인 것.
진실로 이 현장을 정직하게 증언하는 자라면 차마 육식을 할 수 없음이다.

채식은 육식의 반성으로부터 출발되었거나,
아니면 첫 출발이었거나 일견 심적으론 부담이 없어 보인다.
과연 그런가 ?
"동물해방"이란 불후의 명작을 써낸 피터싱어는 음식으로 가능한 것은
그 질료가 고통을 느끼지 않은 것을 기준으로 선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식물엔 고통이 없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보통 채식주의자를 비난하는 육식주의자들은
식물이라고 고통이 없다는 것을 어찌 보장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식물이 고통이 있고 없고를 떠나, 생명 기준으로 보고 싶다.
한 생명이 생명 가진 타자를 먹거리로 하지 못하면 삶을 지속할 수 없는 현실.
문제는 이게 아닐까 ?
만약 생명을 넘어 무생명까지 의식의 지평을 확대한다면 ?
바위, 구름, 안개....
이들이라고 이 연환쇄(連環鎖) 고리를 빗겨갈 수 있으랴 ?

자이나교도의 경우 물을 먹을 때, 촘촘히 짜여진 천으로 걸러 먹는다.
혹 물 속에 있을줄 모르는 벌레를 걸러내기 위하여.
우리 풍속엔 한 여름철엔 성기게 짠 짚신을 장만하여 원행을 한다.
왜냐 ?
혹 내 발에 밟혀 죽을 미물이 있을까 봐.
우리네 어머니들은 더운 물을 수채구멍에 버릴 때, 더운물 나간다며 외친 후 버렸다.
수채구멍에 있던 생물들이 미리 피할 시간을 주기 위하여.
우리 어렸을 때만 하여도 소풍을 가서 먹기 전엔 꼭 음식을 떼서 주변에 던진 후 먹었다.
그 떼낸 음식은 주변에 있는 벌레, 새들의 먹이가 된다.
자연스럽게 모두 함께 생명을 북돋고 나누는 셈이다.
늦가을 넘어 감나무 가지에 남겨진 까치밥 역시 매한가지다.

그런데 지금은 고기가 공.산.품과 하등 다름없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그 양만큼 동물들의 恨과 고통은 하늘을 찌른다.
두렵다.
난 정말 두렵다.
인간들의 악행이.

이치가 이러하니 채식 또한 마냥 탐할 노릇이 아니다.
그저 몸이 축나지 않고 내 정신을 바로 차릴 정도면 족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채식이 좋다고 아침 저녁으로 녹즙 짜 먹고,
산속에 헛개나무 전부 작살 내고, 느릎나무, 오가피나무 전부 씨를 말리고들 있다.
예전 뱀술 팔던 그 정경이 이곳엔 최근 초란이니, 헛개니 하는 장면으로 바뀌었을 뿐
그 양자의 차이를 난 크게 못 느끼겠다.

요는 죽는 날까지 남의 생명을 축내 내 생명을 기르고 있음이니,
늘 삼가 분수를 지켜야 하겠다.
이러하니 필경 소식(小食)을 하지 않을 수 없음이다.

내 구태여 채식, 소식의 공덕(功德)을 논하지는 않겠다.
그러하면 이 또한 다른 욕심을 빗껴 보탠 것과 하등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단식은 그 자체 가치보다 요즘은 목적지향적인 행위 도구로 전락하여 제법 씁쓸한 말이다.
정치적으로, 다이어트를 위해, 질병을 위해, 기도를 위해...
하니 내 이번 글엔 차한부재(此限不在).

윤동주는 이리 부끄러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개를 기르는 것 또한 폭력적인 행동이다."란 소농자님의 가르침이
새벽 산사의 목탁소리처럼 또또르륵 가슴을 두드린다.
귀한 말씀에 맘이 시리다.

########

이 글은 년전에 ooo에 쓰고,
어느 채식단체 홈페이지에 전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지워지거나, 사이트 자체가 패쇄되어 찾을 길이 묘연하더군요.
하지만, google을 뒤지니 용케 구석에 쳐박혀 있더군요.

jjj님 글을 대하고는 댓귀로 적합할 것같아
이리 주섬주섬 챙겨 올립니다.
저는 피터싱어의 "동물해방"을 읽고
이 세상 그 어떤 책보다 더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성경, 불경보다 더,
제 인생에 깊은 각성을 준 그를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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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모음

bongta :

jjj님/

식물도 고통을 느낀다는 실험도 공표되고 있습니다.
이리 따지면 하나도 먹을 게 없습니다.
하지만, 내 입 즐겁자고, 타자의 고통을 외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1. 무엇이든 맛있게 먹자.”
이 말씀이야말로 내 입으로 들어온 그들을 맞는 극진한 예의라 생각합니다.

“무엇이든”에서의 무엇을 검열한다는 것은 그리 달갑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현대의 먹거리는 모두 착취, 음모의 소산이란 측면이 있습니다.
식물은 농약에, 동물은 착취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거기 생명에 대한 예의가 부재합니다.
이 뻔뻔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음이 우리들의 비극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이를 느끼려면, 가만히 멈추어 서서 그.들.을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대개는 그냥 지나치기 바쁩니다.
왜냐하면, 그리하지 않아도 입은 달달하니,
애써 고민하는 수고를 지불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

kkk님/

食少事煩(식소사번)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마중달이 제갈공명과 오장원에서 대치합니다.
촉나라 사자에게 사마중달이 제갈공명의 근황을 묻습니다.

사자는 말하길 식사는 적게 하고, 업무량이 많다고 아룁니다.
이 말을 듣고는 사마중달은
“공명이 그리 적게 먹고 일을 많이 하니 어찌 오래 살 것인가 ?”
(食少事煩 安能久乎)
이리 짐작합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공명은 죽고 맙니다.

그러하니, 한창 때는 많이 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밥을 많이 먹으면 활성산소가 많이 나오기 때문에
나이 들어서는 적절히 주의하는 게 옳겠지요.

저 역시 소식을 주장하지만, 원래 밥을 많이 먹는 편입니다.
밥 많이 먹는다고 집 식구가 투덜되면,
바로 위 식소사번 예를 들며,
많이 먹을 때가 좋으니라,
적게 먹으면 그 때야말로 야단인줄이나 알아라 이리 타이르지요.

하지만, 저는 하루 두끼만 먹습니다.
주말 노동을 하는 날은 예외입니다만,
언젠가 밥 많이 먹는 게 너무 미련해 보여,
한끼를 과감히 잘라내버렸습니다.

거북이가 오래 사는 것은 숨이 길기 때문입니다.
수천년 지나 발굴된 연꽃씨를 심어도 발아하는 까닭은 역시 그가 숨이 길기 때문입니다.
밥을 많이 먹으면 신진대사가 활발해져 생명시계가 빨리 돌아갑니다.
"life cycle이 만약 일정하다면, 가급적 그 싸이클을 느리게 돌리는 게
장수할 수 있는 이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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