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석숭(石崇)

소요유 : 2009. 9. 21. 11:36


예전에 우리 어렸을 적에는 바둑을 두다가 상대가 수가 막혀 쩔쩔매면,
‘조남철이 와도 수가 없어.’라며 우쭐대었다.
당시 조남철9단은 과히 입신(入神)에 이르른 바둑의 명인이니,
이를 호명(呼名)함으로써 그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정작은 곧 바둑, 바둑의 神임을 바꿔 가리켰다.

이렇듯 유명한 이를 빌어,
그가 거닐던 지경(地境)을 가리키거나,
업적, 신분, 지위 등을 환칭(換稱)하는 예는 적지 않다.

가령 춘추시대 도척(盜蹠)은 도적의 대명사로 널리 쓰이고,목사의 단꿈과

비간(比干)은 충신, 백이숙제(伯夷·叔齊)는 절의(節義)를 대표하며,
석숭(石崇)은 고래로 부자를 가리킬 때 많이 쓰인다.

내가 어느 날 책을 읽다가
‘大貴當時富石崇’란 구절을 만났다.
흔히 석숭(石崇)을 부자의 대명사로 일컫곤 하는데,
과연 그가 어느 정도의 인물인가?
이를 기화로 그 자의 면면을 이 자리에 잠깐 적어두고자 한다.

이 석숭(石崇)은 아주 특이한 개성의 소유자였다.
석숭은 진(晉)나라 사람이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공명의 라이벌 사마중달.
그의 손자인 사마염은 조조가 세운 위(魏)를 빼앗고 진(晉)을 새로 세운다.
뻐꾸기가 남의 집 둥지를 털 듯 조조의 공을 한 입에 털어 넣은 것이다.
사공명주생중달(死孔明走生仲達)이라지만,
중달 스스로 이런 소문을 방치함으로써,
정적의 예기를 꺾고 은인자중 다음 수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의 원모심려도 없이 어찌 남의 나라를 빼앗을 수 있으랴.
하여간 사마염 그가 바로 진무제(晉武帝)다.
석숭은 바로 이 당시의 인물이다.

속언(俗諺)에
‘人無橫財不富’
‘사람은 횡재를 얻지 못하면 부자가 되지 못한다.’란 말이 있다.

하지만 석숭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도 많지 못하였으나,
역사상 과히 비교할 자가 없을 정도로 대단한 부자가 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부자가 되었는가?

그가 어느 때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있었는데,
가렴주구로 백성들로부터 고혈을 짜내었다.
또한 해상의 상선(商船)으로부터 물건을 강제로 약탈하여 적지 않은 재물을 모았다.
횡재를 맞지 않으면, 대신 이리 남의 것을 빼앗아야 부자가 되는 것일까?
그러하기에 ‘爲富不仁’이라 했다.
즉 부자가 되기 위해서 어질지 못한 짓을 많이 한다라는 뜻이다.

도척은 양지에서 드러내놓고 도적질을 했지만,
석숭은 벼슬로 해를 가리고 음지에서 도적질을 한 것이다.
이러하니 고금(古今)을 가리지 않고,
정치하는 이를 달리 ‘면허 갖춘 도적’이라고 부르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하여간 이리 재산을 모은 석숭은,
당시 왕공, 귀족의 부와 겨루고도 남음이 있었다.
당시 부자로 알려진 이는 왕개(王愷)、왕제(王濟), 양수(羊琇) 등인데,
이들은 사치와 황음(荒淫)으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가령 왕제라는 사람은 진무제가 자기 집에 친림했을 때 주연을 베풀었다.
상에 올려진 여러 음식 중 특히 돼지고기가 맛이 있어,
진무제가 이리 물었다.

“이 돼지고기는 참으로 맛이 있군,
요리하는데 무슨 비결이라도 있는가?”

“예, 그 돼지고기는 사람의 젖으로 키운 것이옵니다.”

아마, 제 아무리 거부라 한들,
제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가진 재물의 많고 적음을 떠나,
사람이라면 차마 이런 짓을 감히 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즈음 이리 정신병자와 같은 부자들이 많았던 것은,
한(漢)이 망하면서 천하가 전란으로 황폐화하여,
사람들의 심성이 극단으로 치달아,
허랑방탕해진 것이 아닐까 싶다.
삶에 더 이상 의의를 찾을 수 없고,
현생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즐기며 탕진하고 말면 그 뿐인 것을.
도대체 무엇 때문에 미래를 염려하랴.
뭐 이런 심산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왕개와 석숭의 사치 경쟁도 끝이 없었다.
왕개가 집안에서 솥을 닦을 때 엿물로 닦자,
석숭은 자기 집 부엌을 밝힐 때 쓰는 촛불 대신 장작을 태워 휘황찬란하게 했다.
또 한 번은 왕개가 자기 집문 앞 대로 양쪽으로 40리에 걸쳐 자사포(紫絲布)로 막을 치자,
석숭은 비싼 비단으로 만든 포막으로 50리를 쳤다.

이제 따라 피어오르는 생각을 쫓아 잠시 갓길로 스며 들어가 본다.

급고독(給孤獨) 수닷타(須達多)는 부처에게 정사(精舍)를 지어 바칠 결심을 한다.
그가 이리저리 터를 물색하는데,
제타(祇陀)왕자가 가진 동산이 정사를 짓기 마땅해보였다.
수닷타는 제타왕자에게 그 땅의 양도를 청했다.
하지만 제타는 거절한다.

“황금을 동산 일대에 깔고 쌓아올린다 하여도 양도할 수 없다.”

수닷타는 다음 날 동산에 황금을 깔기 시작했다.
반 정도 황금을 깔자 제타는 놀라 양도를 승낙하고 만다.
그리고 지어진 정사가 기원급고독정사(祇園給孤獨精舍, or 祇樹給孤獨園 or 祇多樹給孤獨園)다.

수닷타의 황금이라지만,
석숭의 비단도 당시엔 황금과 맞먹는 가치를 지녔다.
석숭은 비단으로 자신의 위신을 한껏 높였지만,
수닷타는 황금으로 부처의 법산(法傘) 속으로 뛰어 들었다.

최초의 정사인 죽림정사는 빔비사라 왕이 부처에게 기증했다.
도대체가 무소유를 가르치는 불교지만,
그들이 머무는 곳은 왕이 아니면 부자들이 기증한 곳이다.

종교단체에 부자들이 거만금을 헌금하고,
성전이네 사찰이네 새로 짓자며 황금을 투척한다.
그러하다면 무소유란 무엇인가?
주위를 둘러보아도,
사찰, 예배당, 성당처럼 크고 웅장한 곳이 드물다.

무소유를 주문처럼 외치지만,
실상 저들처럼 부유한 집단도 드물다.
만약 저들 옆에 부자가 없었다면,
저들이 외치는 무소유가 아직도 유효할까?
무소유란 고깔모자를 쓰고 있지만,
그들 어깨 뒤로는 기실 황금과 비단 망토가 나붓나붓 흔들리고 있음이다.

천막교회로부터 출발하여,
동양 아니 세계 최대의 성전으로 성장했다고 기염을 토한다.
이 교회에 오면 당신들도 이처럼 세상의 권세와 부를 가질 수 있다고,
주일마다 따사로운 은혜의 말씀을 초라한 신자들 정수리에 한껏 부어준다.
아아, 자애로와라.

나는 가끔 생각한다.
차라리 석숭처럼 자신을 위해 사치하고 방종한 것이 나은 게 아닌가?
급고독(給孤獨)처럼 황금을 종단에 기부하기 시작한 것이,
외려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한 첫 출발이 아닐까?
석숭의 경우는 그 폐해가 당대에 그치고 만다.
하지만 급고독의 전통은 수천 년 내리 흐른다.

帝問曰。朕即位已來。造寺寫經度僧不可勝紀。有何功德。
師曰。並無功德。

양무제(梁武帝)가 달마(達磨)께 묻는다.

“짐이 즉위이래,
사찰을 짓고, 경을 베껴 간행했고, 스님을 공양한 것이 셀 수가 없을 정도이오.
그 공덕이 얼마나 되겠소?”

달마가 말한다.

“아무런 공덕도 없습니다.”

(景德傳燈錄 卷第三)


양무제가 일생 새로 조성한 불상이 30만이라던가?
그런데도 달마는 일언지하 '無功德'이라 하였다.

차라리 그 황금으로 직접 빈자(貧者)를 도왔으면,
수 만을 바로 구할 수 있었으리라.

천막교회, 판자사찰은 과연 불가능한가?
꼭이나 황금으로 깔 정도의 정사라야 부처를 모실 수 있음인가?
꼭이나 동양 최대 성전이라야 하느님이 게에 임재하시는가?

최근 우리 동네 교회 공지판을 본 적이 있다.
거기 '우리 교회의 최대 당면 목표'란 제목으로 내걸린 공지사항을 읽어보았다.

'성전을 크게 지어서 넓히는 것'

황금이, 비단이 필요하다는 말씀이렷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주민이 더 늘어날 것도 없는 동네 형편인데도,
성전을 더 키우는 것이 저들의 목표라는 것이다.
가난한 신도들은 또 얼마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까?
모르긴 몰라도 성전 확장 헌금으로 기백은 내야하지 않을까 싶다.
황금, 비단은 아니라도 베포 한 동도 아니 바치고,
어여쁜 신자가 되려 하였다면 사뭇 염치없는 짓이렷다.

그 교회 아랫녘에 산허리를 깎고는 엄청나게 큰 ㅂ교회가 새로 들어섰다.
일대 수십개의 교회를 합쳐도 모자랄 정도로 큰 대형교회다.
가뜩이나 좁아터진 동네에 기존 교회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음이 역력하다.
아, 내가 교회 목사님이라면,
신자 중에 석숭이나 급고독(給孤獨) 같은 이가 나타나,
황금을 땅에 주르룩 까는 단꿈을 매일 밤 꾸지나 않을는지?
나는 오늘 밤 하루 목사가 되어 나를 한번 시험해보기로 한다.
목사의 단꿈과 나의 꿀꿈은 누가 더 달까?

다시 되돌아와 석숭과 왕개는,
이런 식으로 사치 경쟁을 벌였는데,
그들 이야기는 이에 그치지 않고 끝없이 이어진다.

왕개는 진무제의 외척이었는데,
진무제가 그에게 산호수(珊瑚樹) 한 그루를 선사했다.
높이가 두 척이 넘고, 가지가 무성하니 빽빽했다.
세상에서 보기 드문 극히 진귀한 보물이었다.
왕개는 이를 귀히 여겨 손 안에서 놓지를 못했다.

왕개는 이를 석숭에게 보였다.
석숭이 보기를 마치고 고개를 돌려 왕개를 보니 득의만만해 있었다.
석숭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산호수를 낚아채서는 철여의(鐵如意)로
가루가 되도록 부셔버렸다.
(※ (鐵)如意 : 나무, 옥 또는 철로 만든 것으로 몸이 가려울 때 긁는 기구)

워낙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왕개는 미처 제지하지도 못하였다.
바닥을 보니 산호 파편이 어지럽게 흩어져 나뒹굴고 있다.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 석숭을 향해 엄히 말한다.

“여보시게나, 석숭이.
그대가 간덩이가 큰 줄은 알겠는데.
감히 내 척수를 깨뜨릴 수 있는가?
이게 얼마나 진귀한 보물인지 모른단 말인가?
네가 필시 내게 무엇인가 말하고자 함이 있으렷다.”

석숭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한다.
“그게 뭣이 대단한 일이라고, 네게 하나 배상하면 되잖아.”

왕개가 꾸짖어 말한다.
“배상이라! 네가 지금 배상해준다고 했는가?”

석숭이 말한다.
“심부름꾼을 보내라,
내 집안에 있는 산호수를 전부 끄집어낼 터니,
그대가 친히 보고는 하나 골라 가져가시게나.”

석숭이 이리 말하자,
집안사람들이 산호수를 몇 개 끄집어냈다.
가지, 줄기마다 광채가 눈이 부시도록 빛난다.
높이가 3, 4 척이 넘는 게 예닐곱이고,
2, 3 척짜리는 여러 개다.

왕개가 이를 보고는 어안이 벙벙해지고 만다.
석숭의 재력이 황제조차 못 따라올 지경이다.
왕개는 사뭇 낭패인지라, 결국엔 그 중 하나를 택해서는,
고개를 늘어뜨리고는 기가 죽어 집으로 돌아갈 뿐이더라.

석숭은 3일에 한번 잔치를 벌이고, 5일에 한번은 큰 잔치를 벌였다.
손님은 끊이지 않았다.
한번은 승상 왕도(王導)와 대장군 왕돈(王敦)이 초대되었다.
(※ 참고 글 : ☞ 2008/12/07 - [소요유] - 봉타(棒打) 하나.)

초대한 귀한 손님을 소홀히 할까봐,
특별히 집 안에서 제일 아름다운 시중드는 여인네로 하여금 술을 권하도록 분부했다.
또한 이들에게 이리 일렀다.

“만약 누구든 손님께서 사양하여 술을 마시지 않게 되면,
나는 사람을 보내 너희들을 죽이리라.”

왕도는 평상시 술을 많이 먹지 않았다.
하지만,
석숭이 시중드는 여자에게 격살령(格殺令)을 내렸음을 알았기에 열심히 술을 먹었다.
한잔 한잔 먹어대어 한 배 가득 채워 대취해버렸다.

반면 왕돈은 주량이 원래 대단했다.
그 역시 격살령이 내려졌음을 알았다.
하지만 왕돈은 의도적으로 술을 먹지 않았다.
석숭이 어찌 처리할는지 보고 싶었던 것이다.

석숭은 진짜로,
왕돈에게 술을 마시도록 권하지 못한 여인네를 셋이나 죽여 버렸다.
왕도는 더는 볼 수 없어 왕돈을 책하여 말한다.

“대장군이시여,
당신은 어찌 여인네들의 목숨을 희롱하시나요.
너무 지나치심이 아닙니까?”

“승상은 어찌 저를 이리 책망하시니이까?
석숭은 자기 집 사람이 자기 집 사람을 죽였을 뿐입니다.
나하고는 무슨 관계가 있으오니까?”

왕돈의 냉혈, 담대함은 하늘을 껴안을 정도다.
과연 그는 나중에 소위 무창(武昌)의 난(亂)이라 부르는,
반역을 일으킨다.

석숭에게 사랑하는 양녹주(梁綠珠)라는 첩이 있었다.
조왕(趙王) 사마윤(司馬倫)이 신임하는 손수(孫秀)라는 이가 있었다.
손수가 이를 탐하여 자신에게 넘기기를 청했으나 석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후에 조왕 사마윤이 전권을 잡자 석숭은 이에 반대하는 측에 서게 되었다.
싸움이 일자, 석숭이 양녹주를 위해 지었던 금곡원(金谷園)을 손수가 포위하였다.
양녹주는 금곡원 누각 밑으로 몸을 날려 죽고,
석숭은 손수에게 참수를 당하고 만다.

그런데,
후에 북위(北魏)의 호태후(胡太后)는 석숭을 두고 이리 말하며 기염을 토했다.

“나는 석숭의 사치 같은 것은 보고 싶지 않다.
다만 석숭에게 내 사치를 보여 주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호태후 시대에 북위는 건국이래 축적한 부를 일거에 다 낭비했다.
불교신자인 호태후는 영녕사(永寧寺)를 지었는데,
그 화려함이 실로 대단했다 한다.
9층탑의 높이가 90장이었는데,
탑 위 방울이 울리면 10리 밖에서도 그 소리가 들렸다 한다.
낙양에 당도한 서역 승려들은

“이곳이야말로 극락이 아닌가!”

이리 찬탄하였다고 한다.

달마도 역시 영녕사를 보고는,

“150세가 되도록 여러 나라를 다녔지만 이처럼 훌륭한 절은 보지 못했다.”

이리 말하고는 여러 날 합장하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사찰처럼 큰 건물이 어디 흔한가?
게다가 성당, 교회는 또 왜 아니 이다지 크고 화려한가 말이다.
저들은 입을 열 때마다 동양 최대의 성전, 와불을 자랑스레 외쳐대지 않던가?
무릇 종교의 이름을 빌려 사치와 교만을 펴는,
작태가 어디 고금(古今)을 달리 하랴.
이 또한 부의 불인함 ‘爲富不仁’의 모습이라.
참으로 종교는 여러가지를 증명하고 있음이다.

***

돌아보건대,
부자로 사는 것이 조상의 음덕 때문이라든가,
전생에 선업을 닦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음이니,
이는 내가 앞에서 잠깐 끼적거려본 글과 함께,
(※ 참고 글 : ☞ 2009/09/08 - [상학(相學)] - 횡재(橫財))
‘人無橫財不富’ 라는 속언에 가닿는다.

허나,
‘爲富不仁’라는 속언이 있듯이,
부자이면서 어진 사람을 찾기 어지러운 세상임을,
우리는 또한 적지 아니 목도한다.

저들이 조동부리 헐어,
파이를 키워야 골고루 나눠먹고 잘 산다고 외쳐대었지만,
아직도 이 말을 믿어야 할 까닭을 이 땅에서는 더 이상 발견할 수 없다.

88만원 비정규직이 40~50%를 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박정권이래 수십 년 이리 이끌려 왔지만,
파이를 키워서 골고루 나눠 먹자는 정치적 구호는
아직도 여전히 이 땅에 동원되고 있다.
사뭇 뻔뻔한 노릇이다.
하지만, 이게 또 여전히 먹히는 것이 이 땅의 현실이기도 하다.

천문학적인 배임횡령을 한 재벌은 사법세력의 비호 하에,
법망을 피하여 멀쩡히 살아남는다.
‘人無橫財不富’는 진위를 잘 알 수 없다 하여도,
‘爲富不仁’은 이 땅에서는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라는 말씀은 ‘爲富不仁’의 개신교 판 선언이다.

그런데,
예배당에서는 과연 이를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가?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기에 앞서 교회에 먼저 충성하고 십일조를 받치라고 하지는 않는가?

예수가 부자 청년에게 자발적 가난을 권하는 까닭은,  
가난이 선이고, 부가 악이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부 때문에 저 석숭처럼 사치하고 교만하며 음란해짐을 경계함이 아니겠는가?
이는 곧 진정한 자유와 사랑을 가르치는 복음의 말씀일 게다.

ps)

산호수(珊瑚樹)
오늘 고물할아버지네 마당가 탁자 위에서 산호수를 발견했다.
어디선가 버린 것을 주어왔을 터이고,
비록 3, 4 척은커녕 아기 주먹만한 것이지만,
마침 이 글에 등장하고 있으니 덧붙여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소요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석대  (0) 2009.09.28
상은 불속에 있다.  (4) 2009.09.26
뻐꾸기  (5) 2009.09.24
벌초와 쓰레기 2  (0) 2009.09.17
破窯賦  (0) 2009.09.16
무측은지심 비인야(無惻隱之心 非人也)  (2) 2009.09.15
Bongta LicenseBongta Stock License bottomtop
이 저작물은 봉타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행위에 제한을 받습니다.
소요유 : 2009. 9. 21. 11: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