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숭례문 애도는 신화가 아니다

소요유 : 2008. 2. 16. 11:09


오늘 아침 오마이뉴스 기사 하나를 읽었다.

☞ Link : '국보 1호'라는 숫자의 신화에서 벗어나자

기사가 드러내고자 하는 뜻을 가지런히 풀어내지 못하여, 조금 산만하지만,
얼추 추스려 새겨보면, 국민들의 숭례문에 대한 안타가움 표출이 과도한 것을 넘어,
인격화하고 신성시 하고 있으니 자제하자는 것이다.
나아가, 그 열렬한 마음을 거두워,
대신 ‘의인 들의 무덤’이라든가 다른 문화재 일반에 대한 사랑으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리 말하고 있다.

“당국은 재활용할 수 있는 부재와 그렇지 못한 부재들을 분류해 재활용이 불가능한 부재들은 덤프트럭에 실어 일반 쓰레기장에 내다 버리고 있다. 그런데 그게 또 문제가 되고 있나 보다. 깨진 기왓장 한 장도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인데 그걸 일반 쓰레기로 쓰레기장에 내다 버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기자는 한 마디로 불 타버린 것은 곧 쓰레기에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
참으로 놀랍니다.
수천년 전 고대인의 유적을 발견하고는,
인줄 치고, 학자 동원하여 수년 동안 발굴 조사에 임하는 것은 그럼 무엇인가 ?
땅 파내어 이미 썩어 버렸을지도 모를 유물들을 수만금 들여 파내고자 하는 뜻은 무엇인가 ?
만약 이게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기자도 인정한다면, 나는 그에게 되묻겠다.
숭례문의 불타버린 잔해들이 지금 기자 말대로 쓰레기에 불과하다면,
다른 곳에 애써 버릴 것도 없이, 그 자리 땅에 바로 파묻어야 하지 않을까 ?
수천년 후엔 그럼 고고학의 대상이 될 터인데,
이야말로 쓰레기를 마이더스 손으로 고귀한 문화재로 바꾸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
그렇다면, 지금 기자 눈에 쓰레기로 보이는 이것이야말로,
수천년 앞당겨 그대로 보물 아닌가 ? 물론 원하는 바 아니었지만.
기자는 왜 이 단순한 이치를 모르고 있을까 ?

이 극히 기능적이고, 차가운 기자의 인식 능력에 나는 아연 놀란다.

기자는 또 이리 말하고 있다.

“그리고 과공은 비례이듯 불 탄 숭례문을 지나치게 인격화하고 신성시하는 것도 볼썽사납다. 거기에 바쳐져야할 국화라면 남을 위해 고귀한 희생을 한 의인들의 무덤 앞에 먼저 바쳐지는 것이 옳다.”

참으로 놀랍다.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뜻은 한마디로, 숭례문 애도가 마땅치 않다라는 것이겠지만,
지금 우리 눈앞에 임한 그 현장에서,
국민들이 느끼는 울분, 안타까움 그 감정들 그 자체는 그것대로,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을 다른 곳에 빗대어 가치 고하를 논하는 정신상태야말로,
나태하고 비겁한 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눈앞에 당존(當存)하고 있는 현장에 충실하자.
지금, 현재(Now & Here)
이를 외면하고 어느 다른 곳, 어느 천년후로 미루어 무엇을 도모하려는고 ?

기자는 이어 이리 말하고 있다.

“그리고 불 탄 숭례문은 인격체도 추모의 대상도 아니다. 숭례문의 폐허 앞에 절하는 마음으로, 국화꽃을 바치는 그 마음으로 살아있는 우리 문화재를 바라보자. 그 절절한 마음으로 우리 문화재를 아끼고 사랑하자.”

조선 순조 때 유씨부인이 조침문(弔針文)을 지었다.
자녀도 없이 오로지 바느질로 낙을 삼던 여인네가,
쓰던 바늘이 부러지자, 이리 제문을 지어 그 안타까움을 한탄하고 있다.

농부가 수년 호미질을 하다 이빨이 빠져 못쓰게 되면,
뒷곁 처마 밑에 고이 매달아 두고, 차마 버리지 않는다.
우리네 농부들은 예전에 이리 곱게 살았다.

이게 모두 바늘, 호미를 단순히 인격화 하기 때문인가 ?
기자 말대로 하자면, 사람이 아닌 것은 추모도 하지 말고,
인격화 하지도 말아야 하는가 ?
오로지 인간 말고는 모두 숨이 없는 차가운 물질이란 말인가 ?

나와 함께 한 유정물과 인연이 다하였음에,
조침문 같이 글을 짓거나,
혹은 처마 밑에 모시는 행위는 무엇인가 ?

두레박.
그것은 정성을 긷는 두레박인 게다.
거기 옛 정이 서려있고,
함께 한 세월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두레박을 빌어 우리의 감정을 길어 올린다.
그 때 비로서 우리는
바늘, 호미가 한갓 물질이 아니라,
혼이 깃든 유정물이었던 것을 안다.

기자는 행여 이 도리를 알까 ?

수백년 영욕을 함께 한 숭례문 앞에 소복 입고 절을 하는 여인네는
최소한 기자와 같은 차가운 금속성 피가 아닌,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음이랴.

이 역사현장.
슬프면 슬픈대로,
느끼는 바 그대로 표출함이 사람답지 않을까 ?

‘비가 왔다고 말하고 싶으면 비가 왔다고 말하면 된다.’
체홉이 이리 말했다고 한다.

오늘 숭례문을 조상하지 않으면,
그럼 두었다가 내일 하랴.

감정을 형해화하여,
물질화하고,
범사를 기능적인 차원으로 환원하고 마는,
기자의 저 조급하고, 황량한 마음보가 안타깝다.

백번 양보하여, 저들의 태도를 정히나 시답지 않게 생각한다면,
그냥 지나치면 된다.
사람은 모두 한결 같지 않다.
지나치면 될 일을 저리 폄하까지 할 필요가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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