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배너, 삐라 그리고 삐끼

소요유 : 2009. 10. 19. 21:10


며칠 전부터 북한산 국립공원 앞에 현수막(플래카드, 배너)이 붙어 있다.
입구 가까이 있는 B 사찰에서 붙여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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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인즉슨 이러하다.

“천일기도 입재”
“관세음보살님 중생의 행복과 이익을 위하여”

‘이익’이라는 글자를 보자 영 어색스럽다.
이를 보고 산에 들었는데, 간간히 마음이 개운치가 않았다.
내가 이제껏 배운 불교와는 전혀 달라 제법 생경스러웠던 것이다.

불경에 이익(利益)이란 글자가 없는 것이 아니다.
내 pc에 db화 되어 있지만,
가령 편한대로 CBETA(Chinese Buddhist Electronic Text Association)를 통해 검색을 해보았다.
‘利益衆生’, ‘衆生作大利益’, ‘利益無邊衆生’, ‘成就大悲法門利益衆生’
등으로 위 현수막 문구처럼 중생과 이익이 결합한 문구가 혹간 발견되고 있다.

그 내용은 관세음보살 명호(名號)를 외거나 설법을 듣고,
불사를 잘 지으면 중생에게 이익이 무량하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위 현수막의 내용과 얼핏 그리 다를 바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나는 왜 이 문구 앞에 멈춰 서서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대개는 행복이란 지은 업대로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이지만,
이익이란 나서서 적극 취하여 얻는 것이다.
나의 이런 자의(字意) 풀이에 구속되는 한,
행복은 그런대로 넘어갈 수 있지만 이익이란 자귀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왜 그런가?
본래 부처의 가르침은 탐진치(貪嗔痴)를 삼독이라 이르듯,
이익을 탐하는 것을 극력 경계하고 있다.

닦음도 없이, 덕을 폄도 없이,
관세음보살 앞에서 명호를 부른다고 내게 이익이 돌아오고,
설법을 듣는 것만으로 내게 이익이 되는가?

물론 불경엔 이리 적혀 있기도 하다.
그렇다한들 그 본의는 거죽으로 이리 하면 그리 된다는 말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가르침대로 행하고, 진심으로 마음을 비워낼 때라야 행복이든 이익이 나려온다는 뜻이다.
이는 다만 방편으로 중생을 견인하기 위한 교설일 뿐이다.
또한 그렇다한들, 이 경전의 가르침은 개인의 안녕과 이해를 넘어,
중생 일반을 향해 그 복을 회향하고 있는 것에 그 진의가 있다.
염불종에서 염불을 지극정성으로 외면 성불한다고 가르칠 때도,
역시나 수행의 방편으로 받아들여야지,
달착지근한 과실만 바라고 덤비면 과연 자신에게만 복이 나려올 것인가?

원래 대승불교에 이르러 지어진 불경들이라는 것은,
석가모니가 살던 원시불교시대와는 사뭇 멀어진 까닭에,
출처 불명의 위경도 적지 않고 포교의 방편상 중생을 격려하고 꾀는 식의
내용으로 꾸며진 경전이 다수 출현하였음이다.
물론 반야, 공(空) 등 위대한 대승불교철학이 꽃을 피었기도 하지만,
이들은 고도의 사변적인 내용이라 대중에게 접근이 어려웠던 고로,
정토, 선(禪) 등이 등장하게 된다.
염불만 하면, 또는 그 어려운 경전을 보지 않아도 성불할 수 있다니,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있을 터인가?

하지만, 이게 말법으로 흐르게 되면,
현세의 구복과 후세의 구원만을 강조하게 되며 급기야는 종말론적으로 흐르게 된다.
그리하여 관세음보살, 미륵보살, 아미타보살 등의 타력신앙이 등장하게 된다.
원래 대승은 자비희생을 근간으로 중생에게 요익되게 함을 으뜸으로 하는데,
이쯤 되면 개인의 복을 구하거나 해탈만을 구하는 소승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아니, 대승 저들이 낮춰 부르는 소승은,
차라리 불교 고유의 순백(純白) 교설이 오롯하게 보존되어 있다.
또한 거기엔 엄정한 계행과 치열한 수행이 아름답게 불타고 있다.
대승보다 더 지순하니 순결하며 그윽하니 근원적이다.

하지만 대승이 이쯤에 이르게 되면 그저 단순한 기복종교로 전락하게 된다.
현세의 안락과 후세의 극락왕생만을 비는 미신, 푸닥거리 수준으로 타락하게 된다.
법구경, 숫타니파타 등에 보이는 원시불교는 얼마나 소박하며 아름다운가 말이다.
나는 번다한 팔만장경이 다 소용없고,
다만 이곳에 석가의 말씀 그 진수가 다 들어 있다고 본다.
이러한 것이 시절인연 따라 대승의 허공을 휘젓는 화려한 공중곡예로 발전하다가,
지금은 땅으로 꼬꾸라져 진흙 구덩이 처박힌 꼴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찔끔 오는 비 따라 오르다 이내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만 이무기 짝이 아닌가 말이다.
저 현수막 밑으로 지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모름지기 마땅히 법다운 승(僧)은 신자들을 정도(正道)로써 이끌어야.
삼보(三寶)에 걸맞는 위상을 지켜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할 수 없다면, 잿빛으로 물들인 승복은 어이 하여 입는가?
차라리 저잣거리에 나서 난전 좌판이라도 벌이고 베 옷일랑이든 얼추 줏어 입고 곰보 각시나 끼고 살지.
취처(取妻), 취주(取酒)도 하지 못하고 애면글면 절집에서 애옥살이할 까닭이 어디 있겠음인가?

“관세음보살님 중생의 행복과 이익을 위하여”

나는 이 캐치프레이즈를 보자,

“행복하세요.”
“부자 되세요.”

이내 이리 말하던 某회사의 광고 카피가 떠오르며 의식에 몽롱하니 겹쳐진다.
요즘 시쳇말로 이 얼마나 섹시한 모둠발질이냐?
네 타는 가슴팍을 발 모아 날아오르며 처지르지 않는가?
고추 자지 끝 부르르 떨리메, 화답하듯 자지러지는 계집 감창소리가 이보다 더 사무칠까나?

출세간(出世間) 종교까지 이제는 이익을 앞장 세워 신자를 꾀고 있음이다.
이 목소리를 듣고는,
세간법에 의지하는 여느 상인들의 호객 소리와 더불어 그 차이를 찾아낼 수 없음이다.
그러하다면 부처의 교설은 과연 이제 어디에 나자빠져 있단 말인가?
삼법인(三法印), 사성제(四聖諦), 육바라밀(六波羅蜜), 팔정도(八正道), 십이연기법(十二緣起法)
불교의 기초적인 그러나 골수 중의 골수, 핵심 중의 핵심 교설 중,
여기 어디에 이익을 두고 가르침이 펴진 바가 있던가?

원효는 호리병 옆에 차고 저잣거리로 내려왔다.
그가 속세에 내려와 요석을 취하였고,
화쟁회통(和諍會通)하였음이야말로
‘利益衆生’을 위한 바다.
이야말로 피 뚝뚝 흘러 절절한 자비가 아니랴.

하지만,
저 현수막에 적혀 있는 ‘이익’ 이란 게,
과연 중생 일반을 향한 것인가?
관세음보살에게 절 많이 하면,
개인에게 사적 이익이 있다는 것이고,
명호를 많이 부르면,
복이 많이 내린다는 꾐의 말이 아니던가?

고작 그런 관세음보살이라면 높은 산에 계시올 필요가 없다.
진작 시장 한 구텡이 차고 앉으셔서 좌판을 벌이셨어야 한다.

‘절 한번 하면 복이 한 덩이요,
절 열 번 하면 한 광주리 이익이 돌아갈 것이니라.’

이리 장사를 하셨어야 함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런 거래를 잘 하는 것은 기실 관세음보살이 아니라,
거기 진작 터 잡고 있는 장사꾼이다.
그러하다면 관세음보살은 여기서도 설 자리가 없다.
콩나물 장사 아주머니는 돈 1000원을 내면 반드시 1000원어치 콩나물을 주신다.
여리꾼은 발장단 맞춰 단 돈 만원에 십만 원짜리 물건을 안겨 주겠다고,
구름 잡고 용 타고 올라 기염을 토한다.
그래도 하나도 밉지 않고 외려 귀엽다.

무릇 장사꾼은 이문 취함을 본령으로 하고,
계집은 사내를 위해 분단장을 하지 않던가?
하지만, 내 견문이 적고 지혜가 얕아 그런지 몰라도,
이제껏 불가(佛家)에서 이익을 탐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아무리 그대가 예쁘게 차려 입고 고이 108배(拜)를 바치온들,
관세음보살이 그만치 복을 돌려주실런가?

유마거사가, 지장보살께옵서,
설혹 복을 비는 이를 아파하고,
이익을 구하는 이를 가엽게 여기실지언정,
제 하나의 욕심을 구하는 이를 돕기 위하여,
부처의 위(位)를 물렸을 터인가?
제 아무리 구고구난(救苦救難)의 관세음보살일지언정,
그리고 그가 천수천안(千手千眼)의 위신력을 지니신다한들,
무작정 엎드려 빈다고 천 개의 눈을 여시고, 천 개의 손을 내어 잡아주시겠는가?
여기 사바세계에 이리도 환란(患亂)에 든 이들이 아직도 많은 것을 볼작시면,
이는 결코 제불보살(諸佛菩薩)의 위신력이 약함이 아니라,
그 대자대비 자비심을 내려주시려 한들,
이들이 어리석고 욕심이 많아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 까닭이 아니랴?

나는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성철스님도 삼천번 절해야 자신을 만날 수 있다고 사기를 치시지 않았던가?
이는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입으로 그리 말씀하셨음이다.
(※ 참고 글 : ☞ 2009/07/07 - [소요유] - 대웅(大雄))
그러하다면 관세음보살에겐 삼만번 아니 삼십만번은 절을 해야,
겨우 천수천안 중에서 눈 한번 힐끗, 손가락 하나 튕겨 주시지 않겠는가 말이다.

아아,
영험하시다던 관자재보살은 이제 어디메로 떠나가셨음인가?
정녕 그러하심인가?
아니리이니, 결코 아니리이니,
이야말로 자재신통하신 관자재보살의 진정 깊은 자비심의 경로라 할 것이로다.
어찌 장사꾼과 같이 눈웃음이 설고 손이 헤프리오.
천수천안(千手千眼)은 익고 무겁기에 도리어 넓고 깊다 하리니.
이를 일러 비로소 관자재보살이라 불러 모심이라.
제중(諸衆)은 이 도리를 아시겠는가?

출세간이든 세간이든,
바야흐로 세상은 이제 성속(聖俗)이 하나로,
통정야합(通情野合) 손잡고 난리 브루스를 치고 있는 짝이다.
이를 화간(和姦)이라 부른들 무엇이 그릇됨이 있으랴.

내가 사는 북한산에 이르르면 산 속에서,
짜릿 짜릿 신선한 공기가 삼태기 째로 붓듯, 연신 쏟아져 내려온다.
정녕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부처의 위신력이 아니겠는가?
여기 산자락에 사는 나에겐 이 향그러운 공기가 곧 부처의 가피와 일호도 다름이 없다.
산정으로부터 달려 내려오는 정결한 공기를 마시면,
나는 하나님의 성령만큼 깊은 은혜 충만함에,
느껴 겨워 전율한다.

나에겐 숲이 경전이다.
구름은 운판이며,
계성(溪聲)은 종소리고,
나무가 바람에 부대낄 때 이내 목탁소리를 듣는다.
가랑잎새에 비라도 후두둑 떨어질 새면 이내 북소리가 울린다.

어찌 나 뿐이랴,
소동파 역시 나와 다르지 않았음이다.

溪聲盡是廣長舌,
山色無非清淨身,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舉似人?
(蘇東坡)

이 광기에 쌓인 속세지만,
그래도 종교만은 성역을 마지막까지 지켜,
연기 자욱한 서울 하늘 일곽을 외롭게 파수하는 북한산처럼,
길음(吉音)을, 복음(福音)을 쏟아 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티끌세상, 한 줄금 인줄 친 소도(蘇塗)로 꿋꿋이 남아 주셔야 하지 않겠는가?
어리석고 가여운 이 필부의 소박한 소망이 그리 잘못 되었는가 말이다.

저들 종교, 예까지 오염되어 속세와 하나도 다름없는 말을 쏟아낸다면,
저들이 과연 무슨 낯짝으로 감히 저 높은 곳에 황금기와 올린 가람을 짓고,
은빛 찬란한 지붕을 인 성소를 언덕 위에 우뚝하니 차지하고는,
아래를 내리 굽어보며 거드름을 펼 수 있음인가 말이다.

아,
두어라!
어쩔시구 태평연월이라,
성속이 따로 있나,
음양(♀♂)이 따로 있나,
원효와 요석이 밑절구질 하듯이,
성속이 엉겨 붙어, 쩐(錢)방아를 석삼년 공방살 찌든 과부처럼 연신 찧고 지고!

이익이 최고다.
그러하기에 그 잘난 이명박 경제 대통령을 뽑아댄 것이 아닌가?
돈만 잘 벌면 까짓 전과가 문제랴?
도덕이 대수랴?
염치가 문제랴?
부처도 내게 돈을 벌게 해주지 못하면,
변소간 옆에 버려진 몽당 빗자루 도깨비보다 더 못한 잡귀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도 부자 되게 해주지 못하면 마귀와 그 무엇이 다르랴?
성속이 어디 따로 있다든?
보탬이 되지 않으면 다 쓰잘데기 없는 허접부스러기에 불과할 뿐인 것을.

그러하니 저 현수막에 어찌 잘못이 있을 것이며,
저리 내다 건 주지스님은 또한 무슨 허물이 있으랴.
모두 용타.
현수막이어든, 승(僧)이어든, 부처이어든, 대통령이어든, 너든, 나든 모두,
머리에 용뿔 해다 박은 쩐신(錢神)인지 쩐귀(錢鬼)라 한들 어찌 흉타 하랴.

두어라,
어화둥둥~
요리조리 잘도 돌아가는 세상이로새.
흉허물은 그만 보고 어여 방아나 찧어 보자꾸나.
어~ 어리두 방아야,
가죽 방아, 가죽 절구 잘 손질하여,
이리 나와서 모두들 방아타령이나 불러보세나.  

얼쑤,

“부자 되세요.”
“돈 많이 버세요.”

스님도 보살도 모두 다,
억수로 돈 많이 벌어,

금당(金堂) 짓고,
금단(金壇) 짜서,
금불(金佛) 모셔보고 지고.

***

지난 주 밭에서 삐라 하나를 주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깨알같이 작은 글씨가 박혀 있는 것이,
줍기도 전에 북에서 넘어 온 것이거니 했다.
나는 어렸을 때 많이 보았던 그것과 비교하여,
지금은 선전 내용이 어찌 변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줍기는 주웠지만 앞뒤로 빼곡히 적혀 있는 것을 읽으려니 시간이 아깝다.
나는 나중에 한가할 때 읽으려고 일단은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다.
그러다가 집에 돌아와 책상머리에 올려 두었는데 며칠이 지나도
손 하나 대지 않고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집어 들고는 한가하니 산에 올랐다.
쉬는 틈에 듬성듬성 읽어 보았다.
나는 이게 북한 삐라인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남에서 북으로 보낸 것이었다.
아마도 기류를 잘못 타고 거꾸로 흘러들었던가 보다.
발신처는 북한구원운동 운운의 개신교 연합 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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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도 참 좋다.
비닐에 박은 글자가 아주 여문 게 종이에다 인쇄된 것과 하나도 다름이 없다.
게다가 겹으로 되어 있어 쩍 벌리면 봉투로 쓸 수도 있게 만들어졌다.

최대한 많은 글을 실으려다 보니 문장들이 토막이 쳐져 있다.
대체로 인용한 통계들은 사실에 근접해보였으나,
대북한 주민 선전의 근거로 삼는 것은,
거개가 개신교 교리에 견강부회하는 식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 중 한 구절이 눈에 띈다.

“그 중 많이 배우고 부자일수록 좋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음”

순간 이게 앞에서 말한 사찰 현수막의 내용과 겹쳐져 내 의식을 가른다.

그 흔하디 흔히 인용되는 마태복음의 구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

이는 그렇다면 무엇인가?

세상에 예수처럼 가난한 사람이 또 있었던가?
예수의 말씀을 부정하는 저들 자칭 목자라는 이들은,
결국 예수를 등에 업고 무엇을 팔고 있음인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을
바람에 날려 북녘으로 보낸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들,
아! 누구던가?
저들이 과연 목자란 이름을 가진 이들인가?
(※ 유치환 [깃발] 부분 인용)

부자가 악인이고 빈자가 선인은 물론 아니다.
세상엔 선한 부자도 많고 악한 빈자도 있음이다.
그러하기에,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
“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며 침방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공중의 새가 그 소리를 전하고 날짐승이 그 일을 전파할 것임이니라”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성경은 이리 부자, 빈자를 차별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저 삐라에서처럼 어찌,

“많이 배우고 부자일수록 좋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음”

이 따위 말을 해댈 수 있음인가?
그럼 거꾸로,

“적게 배우고 가난할수록 나쁜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음”

이리 말할 수 있음인가?

이게 정녕 이 땅의 개신교를 이끌고 있는 단체들,
(거기 삐라엔 개인까지 포함하여 발신 주체가 20여개 이상 적혀 있다.)
그들이 온정신으로 말하였다 할 수 있는가?

저들 교회는 매주 성회에 모여,
양처럼 순진한 무리들에게 연봇돈 많이 내면 부자 된다고 가르치기라도 한단 말인가?
부자가 좋은 사람일 가능성이 많으니 부자만 가려 사귀라고 권하기라도 하는가?

나는 그러므로 감히 말한다.

“현수막은 곧 삐기다.
삐라는 삐끼다.
종교는 삐끼다.”

오늘,
배너(banner), 삐라, 삐끼
그리고 이 시대의 대표 삐끼 종교를 잠깐 이리 생각해보았다.

배너에서 만나는 불교.
삐라에서 접하는 개신교,
삐기질로 낚이는 종교,
이게 어찌 일반현상이겠느냐만,
또한 저러한 이들이라 한들 잠깐 실수였지 어찌 차마 뱃속까지 전체가 그러하련만,
저들이 참으로 종교인이라면,
속인(俗人)보다는 되우 깨어 있는 정신으로,
포교와 사역 또는 불사에 임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를 이리 경계하노라.

鳳凰不戒旦。
봉황은 아침을 계(戒)하지 않는다는데 ...

두어라,
가을 산빛이 이 아니 아름답지 않더냐?

숲은 경전이요,
시내는 나의 기도가 되어 울어 밤길 예놋다.
북한산의 가을밤은 이리 젖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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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09. 10. 19. 2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