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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피기(剝皮機)

소요유 : 2009. 12. 28. 18:41


대략 30년 전 얘기다.
한전, 전화국 등에서 불용(不用) 케이블이 수시로 처분 공고가 되었다.
이러면 고물상들은 다투어 케이블을 불하받으려고 경쟁을 했다.
고물상들은 폐케이블을 사다가 껍질을 벗기고 구리를 회수하여 수지를 맞추게 된다.
그냥 태우게 되면 공해가 발생하게 되기 때문에 무슨 수를 쓰든 재주껏 껍질을 벗겨야 한다.
당시 장안평 근처에 이를 처리하는 업체들이 많이 있었다.
그 기계 이름을 박피기(剝皮機, or 탈피기(奪皮機))라 하는데,
실로 구조가 간단하고 효율이 좋아 처음 보고는 그 창의(創意)의 남다른 재주에 놀란 적이 있다.

며칠 전 전기용품을 사려고 웹을 뒤지다 박피기를 보게 되었는데,
그제나 이제나 별로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기계 구조가 간단하고 더 이상 발전할 여지가 없기에 여전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박피 원리는 간단하다.
롤러 사이로 폐전선을 넣어 통과시키면 구리선이 납작하게 되는데,
그러면 얄팍하게 옆으로 펴져 마치 기다란 칼날처럼 변한다.
이 때 피복은 그 칼날에 도리 없이 찢겨 죽 반으로 배가 갈려 탈피가 되게 된다.
그러면 고물상들은 구리선은 구리선대로, 피복은 피복대로 팔아,
제법 짭짤하니 이문을 챙길 수 있었다.

고물상처럼 돈을 버는 입장에서는 제법 재미있었겠지만,
저것을 쳐다보는 나는 기분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밝은 세상, 편한 세상을 만들어주기 위해,
저들은 전신주에 걸려 비바람 맞으며 열심히 봉사하지 않았던가?
그러다가 늙고 쓸모가 없어지니까,
배를 쩍하니 갈라 용도폐기하는 모습이 뭐 보기가 좋으랴.

그런데, 내가 최근 눈 덮인 시골을 오가며 일을 하다 보니,
문득 박피기가 생각나는 것이다.
삼십년 전 저 멀리 기억의 창고에 쳐박혀 있던,
그것이 오늘따라 시나브로 떠오르고 있다.
정 많고, 순박한 시골 인심이란 수사가 都是 믿을 바가 없음이다.
이즈음엔 서울 사람을 시골 사람들이 벗겨 먹으려고,
염치를 접고 대드는 양이 실로 박피기를 방불하고 있음이니, 도척과 뭣이 다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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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 앞에 있는 판잣집엔 또 한바탕 질펀한 삶의 뻘밭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지난번 두 마리 중 하나를 죽여 우리 밭에다 던져놓더니만,
이제는 본격적으로 철망을 치고는 강아지들을 더 많이 들여놓았다.  
(※ 참고 글 : ☞ 2009/11/15 - [소요유] - 불한당(不汗黨))

삶이란 정녕 이리 남을 벗겨야 부지(扶持)되는 것임인가?

밭 위로 수백마리의 가창오리가 원무를 그리며 선회한다.
한참 일이 있어 그냥 보고만 있다가 나중에 조그만 무리만 촬영했다.
아스라하니 사라져 가는 저 오리떼들의 애환이 꿔~우~ㄱ 우는 소리 끝자락에 뚝뚝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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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09. 12. 28. 18: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