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진국

소요유 : 2010.02.19 21:21


내가 진국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은 정작 그들이 진국이라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한 인간의 표상(表象)일는지 모르겠다.
왜?

먼저 진국이란 무엇인가?
알아본다.

津국이라 풀이 하면,
津이 본래 나루를 뜻하기도 하나,
침, 땀이 나는 것을 이르기도 한즉,
오래 국물을 끓여 맛이 좋은 국물을 뜻한다.
설렁탕처럼 오래도록 끓이면 고기, 뼈다귀에서 진액이 나와 깊은 맛을 내게 된다.
그러한즉 津이란 반응 주체가 어떠한 외부 자극에 즉응하여,
체액(體液)을 외부로 발출(發出 or 拔出)하는 연출 상황을 상정하면,
얼추 글의 본뜻에 근리(近理)하니 다가 설 수 있다.

감히 체액까지 내놓다니,
자극에 얼마나 감흥이 북받쳐 일기에,
제 존재의 물적 토대를 근원으로부터 쥐어짜서,
그리 함께 흐느끼겠단 말인가?

흔히 흥미진진(興味津津)하다고 할 때,
진진이라는 것은 너무 맛이 좋아 질질 침이 고이는 모양을 연상하면,
대개 그 어의(語義)에 가깝게 다가섰다 하리라.
거기다 눈물, 콧물까지 더하면 여간 걸맞지 않으리라.

왜 아니,
좃물을 빼놓으랴.

계집 앞이 아니더라도,
제 존재를 밑바닥까지 겁박(劫迫)하듯 도도양양(滔滔洋洋) 밀려드는 감흥(感興)에
좃부리 끝이 자르르 떨리며 실정(失精)이라도 한 적이 있다면,
이 자야말로 흥을 제대로 알 만하다, 이리 이를 수 있지 않을까?

계집이라면 개짐 속이 지릿지릿 하니 젖다 못해 흥건하니 질척일 게다.
이런 계집이라면,
풀숲에 엎어만 놓아도,
달디단 요본감창(搖本甘唱)에,
허리가 부러질듯 요분질로,
달밤을 온이슬로 지새우리니,
과시 천하의 남자가 품길 원하는 명기(名器)리라.

그러한 것이거늘,

진진(津津).

과연,
그대는,
삼삼칠칠(三三七七),
사무치도록 무엇인가를 사랑한 적이 있는가?

眞국이라 풀이 하자면,
이는 말 그대로 진짜배기 국물이다.
그게 국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가짜배기가 아니라,
참살이, 진짜란 얘기다.

全국이란 국, 술 따위에 물을 타지 않은 온전한 것을 뜻한다.
처음 술을 거른 것을  전국이라 한다.
이를 때로는 진국이라 부르기도 한다.

내가 예전에 ‘달의 눈물’이란 만화책을 본 적이 있다.
술집 도가(都家)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데,
‘맛의 달인’식으로 전문 직업 영역을 그리고 있되,
순정소설 양식을 빌리고 있어,
제법 달콤짭짜르한 눈물을 흘리게 한다.

나는 그 이야기에 취해,
저으기 아름다운 동화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 때 불현 듯,
이 책을 누군가에게 선물을 해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던 적이 있다.

그게 누구인가 하면, 배상면 국순당 주인이다.
왜 그런지, 나는 그 책을 읽으며 생면부지 국순당네를 떠올렸다.
아마도 평소에 신세를 많이 졌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당시 막 나오기 시작한 백세주를 사랑하고 있었다.
아니 이런 훌륭한 술을 그 누가 만들었단 말인가
나는 그 분이 마냥 고마웠다.

소주 아니면 맥주, 그리고 양주, 막걸리 이 뻔한 세상,
그 척박한 토양에 우리 술을 현대화하여 내놓으신 저 분이 너무 신기롭게도 고마웠다.
그야말로 全국 같은 분,
나는 그 분, 그리고 그의 아들, 딸들이 이어 만드시는
국향(麴香) 가득한 내력을 사랑한다.
최근엔 우연히도 배상면 그 분의 책을 구입하여 읽기까지 하였으니,
과시 내 홀로 그 분을 흠모하였든가 보다.
내내 국향(麴香)을 국향(國香)으로 승화시켜,
전국을 아름다운 몽유향(夢遊鄕)으로 만드시길 빈다.

자정 가까이 취객이 포장마차에 앉아 있다.
포장마차 주인은 저 자식들이 제 잘났다고 떠드는 것이 영 시답지 않다.
오늘 장사도 시원치 않다.
같지 않은 데데한 것들이 꼴에 위세가 떠그르르하다.
닭똥집 하나 시켜놓고 수 시간을 버티던 것들이,
소주 하나를 더 내오라고 큰 소리를 지른다.

이 때 몰래 준비한 소주를 내놓는다.
어제 손님이 남기고 간 소주를 모은 것,
거기다 물까지 타서 내놓는다.
저 놈들이 꼭지가 돌았으니 물이든 술이든 알 턱이 없으리라.
술커녕 물국인 것이다.

예전에 술국집에 가면,
全국은 잡인 몰래 단골손님을 이끌어내어 따로 맛을 뵈었다.

근래 내가 진국이라고 부른 이들이 있었는데,
나중에 이들로부터 영 석연치 않은 모습을 보게 되어,
내 감식안의 허술함을 자탄한 적이 있다.

내가 어느 날 농업 관련 서적 기사를 보고,
관련 정보를 더 전해 달라고 기자께 메일을 보냈다.
그 기자는 내가 평소 눈여겨보며 내심 그야말로 진국이고뇨,
하며 존중하던 이이기도 하다.

그가 친절하게도 바로 답장을 주어 문제의 서적을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이미 절판이 되었지만 다행이 원서는 인터넷 상에서 용이하게 구할 수 있었다.
그러저러한 인연으로 메일을 한 두 번 주고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한데 어느 날 그로부터 메일이 왔다.
우정 내게 책을 주겠다고 한다.
나로서는 읽고 싶었던 책이었던 바,
기꺼이 주십사하였다.

그런데,
그에게 다시 메일이 왔다.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관여하는 카페를 소개하길,
거기 돌려 읽는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다음 순번으로 신청하여 책을 받아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내가 언제 책을 달란 것도 아니오,
우정 자신이 나를 생각하는 양 은근히 인사치레를 한 후,
책을 거저 주겠다고 하고서는,
이리 사정이 달라지니 마음이 좋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어찌 생각하면 돌려 읽는 프로그램을 활성화하기 위해,
나를 동원하였다고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싶다.

그는 모 인터넷 매체에 시민기자로 활동하며,
TV 프로그램에도 몇 차 등장하였던 모양이다.
그가 설마하니 악의를 가지고 그리했다고 믿지는 않지만,
실수라 하여도 이리 선후가 다른 태도를 보인 것은 무례한 일이라 생각한다.

나로서는 진국인,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리 되어 영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또 하나는,
안면을 튼 지 오랜 사이는 아니나,
술자리에서 듣건대 썩이나 반듯하고 정의감에 충일한 언사를 늘어놓기에,
한촌에 제법 의기로운 사나이가 숨어 있었구나 이리 내심 생각하였다.

그러한데,
소문을 듣자하니 그가 셈이 흐려 이리저리 이웃에 폐를 끼치고 있다고 하질 않는가?
나는 설마하니 그럴까 싶어 그냥 무시하고 지냈다.
그런데 최근 내가 직접 그런 일을 겪어보니 아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하기에,
나는 늘,
말도, 글도, 얼굴도 믿을 것이 아니 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  참고 글 : ☞ 2008/02/22 - [소요유/묵은 글] - 링컨의 얼굴)

그러한데도 나는 근래 관상을 공부하고 있음이다.
상(相)이란 것이 과연 믿음의 표상(表象)이 될 수 있는가?
나는 이를 시험하고자 한다.
상(相)을 통해 상(象)을 건지어 올릴 수 있겠는가?

내가 최근 실수하였듯이 진국은 과연 심상(心相)이 아니라,
면상(面相) 또는 체상(體相)으로 극복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관상불여심상(觀相不如心相)이라고 하지만,
나는 외려 역으로 뒤집어 관하고자 하는 것이다.

순역(順逆)을 나눠하면,
조금 나아지려는가?
후한(後漢)의 허소(許劭)는 월단(月旦)이란 인물평으로
당세(當世)에 이름을 크게 날렸다.
그 역시 관상을 보았다고 하는데,
과연 관상만으로 지인지감(知人之鑑)을 하였을까나?

여하간,
현재로선 내겐 관상도 걸음마 단계요,
게다가 지인지감(知人之鑑)도 서투니 한참 모자르구나.
갈길이 사뭇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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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은유시인 2010.02.20 21:54 PERM. MOD/DEL REPLY

    사람으로부터 진국을 찾겠다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진주를 찾는 것만큼 어려운 줄 압니다.
    그저 내게 잘해 주면 좋은 사람이겠거니....
    그저 내게 섭하게 대하면 나쁜 사람이겠거니 하는 것이 세상의 인심입니다.
    그리고 열 번 잘해주다가도 한 번 잘못 대하면 토라지기 예사이지요.

    사실 조건없이 베풀어야 되는데 그렇질 못하니
    그게 인지상정인가 봅니다.
    이젠 강아지한텐 조건없이 베풀 수 있겠는데,
    사람한테는 그렇지 못합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사용자 bongta 2010.02.21 21:27 신고 PERM MOD/DEL

    한유(韓愈)가 유종원(柳宗元)의 묘비명에 쓴 다음 글은,
    이 부분에 관한 한 거의 절창(絶唱)급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 사람이란 곤경에 처했을 때라야 비로소 절의(節義)가 나타나는 법이다.
    평소 평온하게 살아갈 때는 서로 그리워하고 기뻐하며
    때로는 놀이나 술자리를 마련하여 부르곤 한다.
    또 흰소리를 치기도 하고 지나친 우스갯소리도 하지만,
    서로 양보하고 손을 맞잡기도 한다.
    어디 그뿐인가.
    '서로 간과 쓸개를 꺼내 보이며(肝膽相照)' 해를 가리켜 눈물짓고
    살든 죽든 서로 배신하지 말자고 맹세한다.
    말은 제법 그럴듯하지만 일단 털 끌만큼이라도 이해 관계가 생기는 날에는
    눈을 부릅뜨고 언제 봤냐는 듯 안면을 바꾼다.
    더욱이 함정에 빠져도 손을 뻗쳐 구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깊이 빠뜨리고
    위에서 돌까지 던지는 인간이 이 세상 곳곳에 널려 있는 것이다."

    강아지에게 조건 없이 베풀 수 있는 것은 기실 ‘기대’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간은 베풀고 보상을 기대하기에 나중에,
    아쉬움, 배반감 따위가 스믈스믈 기어 나오지요.
    하기에 베풀고는 잊어버려야 하는데, 범인(凡人)의 경우엔 이게 쉽지 않지요.
    하기에 저는 시불망보(施不望報)의 고사를 잊지 않기 위해 늘 노력합니다.
    하지만 저 역시 욕(慾)의 존재이기에 크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시불망보의 주인공 양설힐의 출세 이력입니다.
    가문도 좋고, 청렴결백한 것으로 호가 났지만,
    재상까지는 올라가지 못하였습니다.
    최고 위정자가 사람이 너무 강직하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다기다양한 여럿을 통솔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고 본 것이겠지요.

    아니면 정운찬 총리처럼 재상이라는 것이,
    본인의 인격이라든가 역량 보다 때로는,
    모종의 요인이 역할을 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관포지교에서 포숙아의 경우도,
    포숙아가 능히 자신에게 떨어진 재상의 자리를 관중에게 양보한 것은,
    곧은 자기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포숙아는 관중을 통해 자기의 정치적 포부와 이상을 실현하되,
    책임으로부터는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할 수 있습니다.
    재상이라는 것이 책임이 막중하여 당시로는 늘 목숨을 내놓아 하였는데,
    포숙아는 재상은 아니 되었지만 이런 위험부담은 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정치적 암계(暗計)내지는 흥정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관중의 정치적 뛰어난 역량을 믿었기에 가능하였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관중과 포숙아는 서로간 죽밥이 잘 맞는 사이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저만 하여도 고물할아버지네 강아지를 돌보긴 합니다만,
    정작 인간 고물할아버지에게 인정을 베풀지는 못하겠더군요.
    이것은 인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만,
    본질적으로는 제가 아직 수양이 덜 되어,
    배포와 금도(襟度)가 협착되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일응 인간이 가졌다고 보는,
    자유의지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엄정히 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만,
    이게 흔히 동물의 동종, 이종 간에 따라,
    차별적인 취급을 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이들의 비판을 받곤 하지요.

    특히 공자의 조수불가여동군(鳥獸不可與同羣)을 빙자하며,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이는 제대로 공부가 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 ※ 참고 글 : http://bongta.com/322 )

    어쨌건,

    “이젠 강아지한텐 조건 없이 베풀 수 있겠는데,
    사람한테는 그렇지 못합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이리 말씀해주셨는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나마 동물에게 잘할 수 있다면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은커녕 동물에게도 제대로 베풀지 못하는 사람은 그럼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질문법,
    즉 “사람에게도 잘못하면서 왜 하필 동물에게는 잘하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동물에게도 잘 못하는 게 어찌 사람에겐들 잘할 수 있으랴?”
    이리 되묻게 되면 필시 대답이 궁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동물, 인간에 대한 차별적 대우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해석의 이동(異同)이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즉 사랑이란 동물, 인간의 단순한 종별 차이 때문에 선택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현상 일반에 무차별적으로 작동되는 원리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기실은 생명에게만 제한할 필요도 없지요,
    나아가 무생물인들 어찌 함부로 대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들이 모두 고통을 느끼며, 사랑을 하며, 배고픔, 추위를 느끼며 …….
    한마디로 희로애락의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인간외의 생명이 인간과 종별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인간을 위해 간단(間斷)없이 유린되어도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사랑의 원리가 이러한 것이라면,
    거꾸로 이 원리를 침해하는 이에겐 그에 상응하는 차별이 정당하지 않을까요?
    예컨대, 제집 강아지에게 밥은커녕 물조차 아니 주는
    인간이란 이름의 고물할아버지는,
    그에 상응하는 차별적 대우를 받아도,
    사랑의 원리에 입각하여 하등 그릇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여기서 잠정적으로 임의 규정하여 사용하는,
    ‘사랑의 원리’라는 것이 제한적이긴 합니다.

    예컨대 사랑이란 무차별적인 고로,
    죄의 유무까지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 또한 또 다른 논의의 대상이 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런 논의를 무작정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앞에서 말씀드린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리고 그 과정 가운데 엄연히 존재하는 패륜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생략된 채,
    전격 이리 도약한다면 이야말로 헛된 공론(空論)이 되고 말 것입니다.

    대자대비(大慈大悲)를 앞세우는 불교지만,
    사찰 앞에 사천왕을 모셔 두지요.
    이 구조 하에서는 죄(罪)와 악(惡)을 경계하고, 응징하는 역할은,
    부처가 아니라 사천왕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부처가 아름다운 이름을 얻는 참에 궂은일은 사천왕이 홀로 담당하고 있습니다.
    세상사 모두 이러하지 않나요?

    명예(名譽)와 이(利)는 주인이,
    노역(勞役)과 해(害)는 하인이.

    퍽이나 재미있는 설정입니다.
    종교 역시 세속의 이런 이중적 구조를 슬쩍 차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한비자(韓非子)’ 학도(學徒) 아니,
    감히 교도(敎徒)를 자임하곤 하지요.

    아아,
    사무치도록 사랑하기에 악의를 택한 한비자,
    그러하기에 저는 한비자를 사랑합니다.
    기꺼이 그의 교단에 투신합니다.

    이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적은 저의 글 한 토막을 이끌어 내봅니다.

    “…….
    한비자는 그런즉 정의를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악의를 선택하였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비자의 악의에는 인간을 향한 진한 애수가 번져 있습니다.
    그가 선택한 악의란 형태를 달리한 선의의 다른 이름일런지도 모릅니다.
    그가 말하는 악의란, 선의로부터 이탈된 인간의 선의에 대한 역설적인 갈망인 것입니다.
    한비자에겐 악의란 이 어지러운 천하를 독해낼 수 있는 유일한 key word이자,
    이를 통해 천하를 구원해낼 추동력으로 택하여진 것입니다.”
    ( ※ 참고 글 : http://bongta.com/67 )

    제가 최근 보고 있는 ‘핵폭발로 고립된 마을 제리코’란 미드가 있습니다.
    거기 이런 인상적인 말이 나옵니다.

    “착한 사람들도 힘을 가지면
    나쁜 짓을 하죠.”

    핵폭발로 미국 전토가 쑥대밭이 됩니다.
    그러자, 평소 선량했던 사람들이,
    무기를 손에 넣자 이내 이웃을 무자비하게 유린하고,
    식량을 빼앗습니다.

    선량함이란 그러하기에, 위험 속에서 물어져야 하지요.
    이 때라야 그 온전한 지위를 획득합니다.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는가?
    이게 인생에 있어서의 주요한 중심 과제 중 놓칠 수 없는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평온무사할 때 내려지는 선량함이란 평가는 아무런 입증 사실이 되지 못합니다.

    한비자는 이런 인간의 속성을 근원적으로 꿰뚫어 보고,
    실천적인 방안을 마련한 동양의 위대한 선각자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채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죽은 ‘비운의 영웅’.
    저는 악의를 그래서 마냥 염오하지 않습니다.
    다만 선의에 대한 역설로서, 그를 향한 갈망으로써,
    희극적인 전망을 기도하며 취해진 비극적 선택인 ‘악의’.
    전 이런 악의를 사랑하기에,
    한비자의 교단에 기꺼이 투신합니다.

    악의의 포지션을 취함으로써,
    당신이 가장 선의의 인간임을 증명한,
    인간 한비자를 저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면,
    대개의 경우는 선의의 포지션을 취해,
    악의를 감추지요.
    제 주위에도 이런 인간들을 많이 목격합니다.
    본인들은 자신들이 그런 추악한 인간이 아님을 포장하지요.
    그게 옷이 되었든, 학문이 되었든, 혹은 돈이 되었든
    어쨌건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것을 빌려,
    그자가 시시때때로 선의의 인간씩이나 됩니다.

    오로지 인간 한비자만이 악의의 인간으로써 우뚝 역사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진정 그는 선의의 인간입니다.
    이 역설을 딛고서야 정작 인간은 인간이 되어 갈 수 있지요.

    오늘 제가 시골을 다녀왔습니다.
    거기 막걸리가 제법 괜찮습니다.
    딱 한 병만 사옵니다.
    그 한 병을 다 마실 때 즈음이면,
    저는 천리 떨어진 서울에서 한가로이 밭일을 마감합니다.

    위 영화에서,
    정체가 폭로된
    해병대복을 입은 가짜 폭도는,

    시민들이 질타하는,

    “어떻게 제복을 입고 그런 짓을!”

    이런 질문에,
    이리 대답합니다.

    “이건 더 이상 제복이 아냐,
    그냥 천쪼가리지”

    굳이 영화 속이 아니더라도,
    우리 네 삶 속에서
    선의는 천쪼가리일 수도 있지요.

    진짜배기 진국이 어찌 없겠습니까마는,
    최근 시골을 드나들면서 외려 제가 여기 서울에서 겪었던 경우보다,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천쪼가리를 만나자니,
    이리 감상에 젖네요.

    하지만, 본원적으로 도농이라 어찌 차이가 있겠습니까?
    다만 사람 나름이겠으며,
    이리저리 사귀다 보면 그게 그거겠지요.
    사람 사는 세상 어디라고 크게 다르겠습니까?

    영화 속,
    주인공 아버지인 전임시장은
    정체가 폭로되어 시민측 세력에게 제압된 폭도들에게,

    “그냥 개구멍을 열어주는 수밖에
    후-라”

    이리 말하며 앞길을 터줍니다.

    한비자는 이 장면에서 이리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참(斬)!”

    이리 말하였을 것입니다.

    드라마에서는 개구멍을 열어줌으로써 흥행에 성공합니다.
    적절하니 휴머니즘 감성을 자극함으로써.

    하지만 한비자는 참(斬)함으로써,
    기꺼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법가(法家)란 오명(汚名)을 자청하여 얻습니다.

    하지만 정작 진짜배기 눈물을 흘린 것은 그가 아니었을까요?
    그의 눈물을 진정으로 닦아줄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지금 세상엔 저 혼자가 아닐까?
    2200년 전에 울분 속에 죽어간 그를 조상함으로써,
    저는 그의 혼을 현재의 제 몸속에 되지피어냅니다.
    감히 이런 오만의 형식에 기대,
    저는 기꺼이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하고자 합니다.
    오늘,
    雨水 이틀째,
    살금 다가온 봄의 길목에서.

  2. 은유시인 2010.02.22 00:26 PERM. MOD/DEL REPLY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한비자의 얘기는 가슴을 후련하게 해줍니다.
    죽일 놈은 죽여야겠지요.
    허나 그 자리엔 또 죽일 놈들로 채워지겠지만 말입니다.

    저는 인간이 싫다기보다
    거짓말을 밥먹 듯하고 남의 불행을 딛고 잘 살려는 인간의 속성에 넌더리가 납니다.
    한유의 비유는 참으로 타당하다 여겨집니다.
    당시도 지금과 인정이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을 보면
    역시 인간의 속성은 시대에 따라 변해가거나 어디 가는게 아닌가 봅니다.
    아주 잘디잔 이익 때문에 너무 쉽게 배반하는 것을 지적한 내용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올 11월 말엔 시골로 내려가기로 마음 굳혔습니다.
    남을 원망하며 사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사용자 bongta 2010.02.22 13:47 신고 PERM MOD/DEL

    한비자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시스템론자라 할 수도 있지요.
    왕권이 아무리 바뀌어도 변함없이,
    국가 체제가 유지 작동될 수 있는 영구정치시스템 같은 것을 꿈꾸었지요.
    멍청이 왕, 음탕한 왕이 등장해도 지장을 받지 않고 국가가 돌아가는 그런 시스템,
    그런 것을 법(法), 세(勢), 술(術) 따위로 풀어내었습니다.

    "또 죽일 놈들로 채워지겠지만 말입니다."

    바로 이런 구조적 악순환을 막아낼 비책을 가슴에 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당시로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저(大著)로서,
    10여만 자에 이르는 책을 엮었습니다.
    원래 한비자는 말더듬입니다.
    그래 그의 글은 더욱 명문입니다.
    아마도 소리로 토로할 수 없는 뜨거운 의기를,
    글로서 활화산처럼 쏟아낸 것일 터지요.

    무엇이 되었든 간에 10만을 넘는 단위 기능체는,
    시스템적으로 구조화 되지 않으면,
    제 자리를 지켜낼 수 없습니다.
    ‘아래아 한글’로 불리우곤 하였던 지금의 한글 워드는
    원래 코드 10만 라인 정도의 프로그램이었지요.
    지금은 엄청 늘어났겠지만,
    기실 워드로서의 기본적인 기능, 골격은 그때 이미 다 갖추었지요.
    저도 한창 때 이 정도 분량의 코딩을 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 정도 되면 각 기능 모듈은 물론이거니와 모듈 상호간의 통신도,
    시스템적인 접근이 없으면 절대 원활하게 돌아갈 수 없습니다.
    거의 커다란 빌딩을 구축하는 정도의 유기적인 설계능력과 건축술이 없으면,
    삼풍처럼 이내 허물어지고 말 것입니다.

    용케도 복합적인 하나의 세상이 만들어지긴 위해서는 얼추 10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방도시도 인구가 최소 10만 정도 넘어야,
    원활한 자족도시로서 기능하고 발전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이하일 경우,
    반드시 외부와의 교류와 물적 유입이 필요합니다.
    아니라면 내내 한적한 시골로 자족할 수밖에 없지요.

    진시황이 이 책을 지은 자를 한번 만나면 곧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던 그였지만,
    하지만, 뜻을 펴려는 찰나,
    동문수학한 처지인 이사(李斯)의 꾐에 빠져 죽고 맙니다.

    발밑을 조심하라.
    손자병법의 손빈 역시 동문에게 당해 종지뼈 밑을 도려내게 되는 참변을 당하지요.

    기실 가장 믿기 쉬운 게, 이웃이고,
    가장 당하기 쉬운 게 친구지요.

    따라서 이웃과 친구가 제일 위험한 관계라 이를 수 있을 것인가요?

    아아,
    아지 못할새라.

  3. 은유시인 2010.02.22 17:11 PERM. MOD/DEL REPLY

    재미교포 한인사회엔
    한인이 도지사 출마하려들면 팔 걷어붇이고 방해한답니다.
    중국이나 일본은 너도나도 앞장서서 지원한답니다.
    국민성의 차이도 있음직합니다.

    기실 이웃이 벼락부자되거나 출세하면 참지를 못합니다.
    가까운 이웃 잘되는 건 눈 뜨고 못 보거든요.
    따지고 보면 잘 아는 이들한테, 믿고 신뢰하는 이들한테
    사기도 당하고 모략과 배반도 당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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