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손가락 없는 부처

소요유 : 2010.02.22 12:55


일을 하시는 분과 말씀을 나누다,
그의 손가락 하나가 뭉툭 잘려나가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니, 아마도 무엇인가에 심하게 눌렸다든가,
망치 같은 연장에 맞아서 문드러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미안스럽기도 하고 차마 자세히 볼 수 없어 이내 눈길을 거두었다.

한참 전에 그리 된 것인지,
이미 자리를 잡아 야물게 아문 상처에선,
마치 오래된 관솔옹이처럼 녹록치 않은 연륜의 흔적이 느껴진다.
그에 비하여, 어쩌다 보게 되는 스님 네들의 단지(斷指)는 도회적인 절제감이 느껴진다.

도를 구하겠다(求法)는 의지의 외적 표상, 자기 가슴속에 들어 올린 서릿발 같은 깃발.
밥을 구하다 의지와 무관하게 몰아닥친 아픔, 서러움.
이런 대비가 있어 삶은 아스라하니 저마다 제 길을 제 각각 떠나는 것이다.
제 길은 저마다 제가 감당하는 것.

순간 왠지 서러움이 내 가슴께를 번진다.
상하수도, 철공 등 온갖 궂은일을 평생하시며 사셨을 것이니,
그 동안, 왜 아니 망치질에 손을 찧고, 떨어지는 철봉엔들 맞지를 않았겠는가?
저 손으로 밥을 벌고, 식구를 부양하고, 사랑하고, 아파하였으리라.

수고로운 저 손들이야말로 마땅히 대접을 받아야 할 터,
하지만 현실은 야박하니 저들을 핍박하고 놀려댄다.

누군가 저들 몫을 거저 절취하였기에 저들 생활이 곤궁을 면치 못하는 게 아닐까?
굴뚝 청소하는 사람은 그 일로 보람을 찾고,
상수도 배관하는 이는 그 일로 자부심을 갖어야 하는데,
막상 현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때로는 피를 흘리는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한 줌에 불과한,
이 강고한 삶의 구조는 저으기 폭력적이다.

나는 그에게 부러 일거리를 몰아 맡기려 한다.
그의 전문 분야가 아니어서 다소 서툰 부분의 일도 그에게 알아보라고 채근하였다.
나로서도 그에게 도움을 받으면 좋은 일이다.
그는 구지(俱胝)의 일지(一指)가 아니라,
무지(無指)의 활불(活佛)로써 우리 곁에 있음이다.

선사들은 각기 장기(?)가 있다.
예컨대 임제(臨濟)는 할(喝), 덕산(德山)은 봉(棒), 조주(趙州)는 끽다거(喫茶去) 따위로
도(道)의 당달봉사들, 법(法)의 청맹과니들을 훈도했다.

구지(俱胝)는 일지(一指),
즉 도를 묻는 이에게 손가락 하나를 들어 마음껏 우롱했다.

어느 날 구지선사에게 도를 물으려 스님 하나가 찾아왔다.
그날은 마침 구지선사는 출타하고 없었다.
그러자 시중드는 동자가 법을 구하는 이에게 나섰다.
동자승은 법을 묻는 그에게 구지를 흉내 내어 손가락 하나를 들어올렸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구지선사는,
그 동자승을 불렀다.

“화상은 어떤 것이 법의 요체인지 설해주시겠습니까?”

동자승은 선사처럼 손가락 끝을 번쩍 세웠다.
그러자 선사는 칼로 그 손가락을 냉큼 잘라버렸다.
동자는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는데, 그 때 선사가 소리를 지르며 부르니,
동자가 고개를 돌린다.
선사는 동자에게 손가락을 세우라 했다.
그 때 동자는 활연 대오 크게 깨우치게 된다.

有一童子於外被人詰曰:「和尚說何法要?」童子豎起指頭。歸舉似師,師以刀斷其指頭,童子叫喚走出,師召一聲,童子回首,師卻豎起指頭,童子豁然領解。
(※ 豎 : 아직 관례를 올리지 않은 사람을 말하니, 우리말로는 떠거머리쯤에 해당된다.
관례를 올리지 않으면 아직 사람 축에 들지 못하는 어린애에 불과한 것.
그러하니 동자승, 풋중을 뜻한다.
한편, 豎起는 세우다란 말이기도 하다.
豎는 竪의 이체로 역시 세우다란 뜻이다.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후자로 새기는 것이 옳다고 본다.
)

보통은 이 장면에서 동자가 손가락이 이미 없어진 것을 모르고 세우려 했으나,
이미 없어지고 없는 바라 이에 크게 깨달았다고 풀이하고 있다.

실인즉, 손가락의 유무가 문제가 아니란 이야기렷다.
지월(指月)의 문제가 여기에도 또 다시 등장하고 있음이다.
그러하다면 연출 소도구로 발가락이면 어떠할 테며,
팔뚝이면 어떠할 텐가?
과연 그런가?

그럼 묻겠느니,
당신의 모가지가 싹둑 잘렸다 하여도 매한가지인가?
그래? 그럼,
손가락하고 모가지는 다른 것인가?
정녕?

이게 궁금한 자는 내게 오라,
내 시험 삼아 그대 모가지를 잘라 이를 보이리.

거기 이차돈의 자른 목에서처럼 젖빛 피가 솟을 것인가?
해당화처럼 붉은 피가 쏟아질 것인가?

그런데 젖빛이든 핏빛이든,
그 비린내 나는 더러운 목을 지나던 까마귀인들 탐할까?
나는 이게 도무지 의심스럽다.

이미 자를 손가락조차 없어진지 사뭇 오래인 저 일꾼 아저씨는 그럼 무엇인가?
만약 구지선사가 이 아저씨 앞에서 손가락을 들어올리기라도 하였으면,
아마도 족족 열 손가락 모두 잘리고 말았을 터.
구지는 그를 만나지 않은 것을 천만 다행인줄 알라.

덕산 방이니, 임제 할, 구지일지(俱胝一指)라는 것,
모두 다 해망(駭妄)스럽다.
자를 손가락조차 없는 사람 앞에 구지가 재롱을 피우고 있음이고나.

정녕 당신은 자를 손가락조차 없는 사람의 도(道)를 아는가?
좌복 깔고 앉아 참선합네 하는 것은 사치스런 노릇인 것을,
그는 절곡기에 손이 굽고, 절단기에 손가락이 날아가는 가운데,
평생 서러움을 길어 올리고, 슬픔을 두레박질 했음이니,
이것이야말로 참도(眞道)가 아닌가?

가승(假僧),
좌복 위에 턱하니 폼 잡고 앉아,
신도들이 갖다 바치는 공짜 시줏밥 축내고,
잿밥 핑계로 신도들 신심을 훔치지 않았는가?

단지(斷指)하여 끊고, 소지(燒指)하여 태우고,
연비(燃臂)하며 끄슬리고, 심지어는 하초하근을 끊어내기까지 한들,
(이를 나는 오락(娛樂)을 떠올리며 그저 도락(道樂)이라 이른다. 삼가.)
(※ 참고 글 : ☞ 2008/03/08 - [소요유] - 공진(共振), 곡신(谷神), 투기(投機) ③)
구체적 생활전선에서 손가락 잃고, 목을 따이는 저들 일꾼 아저씨와 감히 견주랴.

시줏밥은,
공연히 땡중에게 갖다 바치며, 없는 복을 빌 것이 아니라,
저들에게 맡겼으면 싶은 것이다.
손가락 마디 뿌리만 가까스로 남은 저 서러움들,
정녕 이른다면,
부처는 저들이 아닐까?

나모(南無) 무지보살(無指菩薩).
나모(南無) 원왕보살(冤枉菩薩).
나모(南無) 조막손 부처님.
나모(南無) 서로움 부처님.

삼가.
손곧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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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은유시인 2010.02.22 17:04 PERM. MOD/DEL REPLY

    재미있으면서도 의미심장합니다.
    열심히 일한만큼 번다!
    성실히 일하는 사회건설!
    옛날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까마득한 전설이 되었지만,,,

    잘 사는 사람들은 제가 영특하여, 또는 자본을 투자하였기에
    잘 사는 것이 극히 당연하다 합니다.
    그렇다면 열심히 일하고도 잘 살 수 없는 사람들은?
    바보입니다.
    죽어 마땅한 자들이지요.
    그래서....
    세상의 모든 바보들이 한꺼번에 다 죽어자빠졌음 합니다.
    잘 사는 사람들 여전히 잘 살 수있게....

    사용자 bongta 2010.02.22 22:54 신고 PERM MOD/DEL

    열심히 살면 어느 정도는 잘 살아야겠지요.
    성실하지도 않으면서 잘 산다면,
    양심을 속였거나, 요령을 잘 부렸을 경우도 있겠습니다.

    비록 열심히 살았지만, 총명하지 못하여 뒤처지는 경우는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여도 이들을 개인의 책임이라고 미루기만 한다면,
    이 세상은 조만간 정점에 선 그 잘난 인간 하나만 살아남아야 할 것입니다.
    약자를 배려하는 세상을 인자(仁者)의 나라라고 합니다.

    제가 오늘 사료 한 부대를 사서,
    고물할아버지에게 들렸습니다.
    앞서 저는 고물할머니에게 누차 전했습니다.
    시골에서 일을 꾸려야하기 때문에 시간을 내고 싶어도 낼 형편이 아니니,
    이젠 직접 남아 있는 시베리안허스키를 챙기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사료 사는 요령부터 물주기 등을 일러주었습니다.
    제가 2월까지는 돌보지만, 3월부터는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으니,
    지금부터 사료를 사서 강아지 밥 주는 연습을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랬더니만, 다 죽어가는 얼굴을 짓더니만, 시베리안허스키도 마저 데려가라더군요.
    내가 서울 시골을 오갈 텐데 저 큰 녀석을 데리고 다닐 수도 없고,
    겨울엔 거기에 있지 않을 터이니 어렵다고 했지요.

    원래 허스키는 그 집 아들이 임자입니다.
    아들이란 작자는 주말 이틀 동안은 집에 쉬러 오지만,
    어르기만 할 뿐 이제껏 밥 한 끼 준적이 없습니다.
    할아버지 부부, 아들, 손자 이리 넷이 사는데도,
    저들은 누구 하나 밥은커녕 물도 주지 않았던 것이지요.

    저런 작자들을 보고 직접 돌보라며 타이르고 있는 저도 답답한 사람이지만,
    까딱하다가는 굶어죽을 판인 허스키는 또 어떤 운명이란 말입니까?
    지금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간간히 챙겨 주고 계시고 있으니,
    당장은 큰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그 아주머니도 제게 어려움을 토로하고 계시는 형편인지라,
    앞길이 편히 밝지는 않습니다.

    역시나 시간의 역사(役事)를 믿어봅니다.

    고물할아버지에게 사료를 전해주면서 당부를 했습니다.
    이 자는 뻣뻣하게 서서 이야기를 듣는 듯 하더니만,
    제가 조금 강하게 나가자 우거지 인상을 쓰면서,
    자신이 지금 아파서 힘이 든다고 하는군요.

    ‘사람도 아프면 힘이 들지요.
    강아지는 배고프면 아픕니다.
    사람이든 강아지든 아픈 것은 모두 괴롭지요.’

    이리 말해주지만,
    저 자가 이런 말이 귀에 들어오기나 할 것이며,
    가슴팍에 모기침만한 충격이라도 줄 것이겠습니까?

    이 자가 지난해 언젠가도 다그치며 왜 밥을 주지 않느냐 하였더니만,
    뒷골을 만지면서 내가 혈압이 있다며 곧 쓰러질 듯한 포즈를 취하며,
    은근히 저를 협박하더군요.
    ‘네가 더 이상 나를 곤란하게 하면 나 쓰러진다.’ 이런 식이지요.
    그러다가는 짬을 얻으면,
    ‘그럴려면 들르지 마라, 내가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할 테다.’
    제게 이리 결정적인 펀치를 날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러던 자인데 이번에도 또 예의 ‘자신의 병’을 무기로,
    곤란한 순간을 피해나갑니다.

    자신의 병을 무기 삼아 휘두르며 과오를 덮는 인간과
    자신의 딸을 팔아 호구지책을 마련하는 인간과 무슨 차이가 있음인가?

    내내 당당하던 저 인간.
    이야기를 마치고 몸을 틀어 돌아가는 제 뒤에 대고 그제서야
    ‘감사합니다.’라고 뱉어냅니다.
    최근 토사곽란으로 앓은 적이 있어 아픈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힘은 남아 저 인간이 사료를 번쩍 들어 올려 옆구리에 낀 모습이었으니,
    그래도 마지막엔 자신의 저런 모습을 보이긴 민망하였을런가?

    그동안,
    1년 반이 넘도록,
    제가 할 일 없다고 저런 인간하고 거래를 트겠습니까?
    무엇이 부족하다고 이야기를 섞었겠습니까?

    “아, 중생의 삶은 너무 아프고뇨.”

    남겨진 허스키의 안녕을 구합니다.

    자,
    이야기 앞으로 다시 되돌아갑니다.
    만약 잘난 인간만 잘 사는 것이 마땅한 것이라면,
    진작 허스키와 같이 불행한 처지에 빠진 사람들은 거세되어야 했겠지요.
    그런데 오늘 다시 깨닫지만,
    잘난 사람이란 것이 심히 의심스런 화법이라는 것이지요.
    악한 사람도 잘난 사람으로 포장되지는 않을까요?

    잘난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선악(善惡), 현우(賢愚)가 아니라,
    약자(弱者)도 함께 어울려 잘 살 수 있는,
    그런 인자(仁者)들의 나라를 꿈꾸는 게 잘못입니까?

    선생님,
    오늘 밤도 이렇게 갑니다.
    허스키의 안녕을 빌어주세요.

  2. 은유시인 2010.02.23 20:50 PERM. MOD/DEL REPLY

    저는 잠자다가도 몇 번 일어나 강아지 예삐를 껴안습니다.
    요 녀석이 만만한게 저인지라 제게는 꽤나 앙탈을 부리지요.
    그렇지만 누구한테든, 하다못해 제 그림자에도 놀라 꼬리를 사리기 예삽니다.

    전 테레비에서 강아지들이 학대받는 장면만 나오면 우리 예삐를 껴안습니다.
    다른 강아지한테까지 신경 못 쓰지만 그럴 수록 예삐한테라도 잘 해줘야 겠다는 다짐이 생깁니다.
    헌데 요녀석이 입이 고급이라 소고기통조림에 비벼준 사료도 먹질 않습니다.
    클났습니다.

    사용자 bongta 2010.02.24 00:07 신고 PERM MOD/DEL

    예전에 기르던 강아지는 저나 그나 모두 열이 많아서,
    열이 퍽퍽 납니다.
    껴안으면 녀석이 싫으면서도,
    인사치레로 잠시 동안은 가만히 버팁니다.
    그러다가는 한 눈 파는 사이에 슬그머니 빠져 나가지요.

    도대체 어느 동물이 인간과 이리 가깝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어느 별로부터 지상으로 유배된 영혼들이기에 이리도 살가운가?

  3. 은유시인 2010.02.24 01:29 PERM. MOD/DEL REPLY

    예삐 녀석도 껴안으면 잠시만 가만있지 조금 지나면 몸부림을 칩니다.
    그다지 바쁠 것도 없는 녀석이 디게 바쁜 척을 하거든요.

    사용자 bongta 2010.02.24 11:48 신고 PERM MOD/DEL

    강아지들은 인식령(靈)이 없고 냄새령(靈)만이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그들은 머리로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냄새로 그리 할 뿐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을 다 믿을 것은 아니로되,
    밖으로 데려나가면 냄새 맡느라고 볼 일 다 봅니다.
    게다가 오줌 찜으로 하루가 다 가지요.

    의젓하니 고개 쳐들고 숲의 바람을 갈기 털로 음미하며 서 있는
    그런 기품 있는 녀석을 곁에 두고 싶기도 합니다.

  4. 은유시인 2010.02.25 16:43 PERM. MOD/DEL REPLY

    제 강아지도 냄새맡기에 분주하고 이곳저곳에 오줌을 재리지요.
    큰 귀와 넙쩍한 주둥이를 땅바닥에 늘어뜨리고 졸졸졸 굴러가는 모습이 꽤나 코믹하답니다.

    사용자 bongta 2010.02.27 08:30 신고 PERM MOD/DEL

    오늘 늦게 들어왔더니만,
    이 녀석이 좋아서, 제가 씻는 동안 초고속으로 이리저리 오가며 날뛰었다더군요.
    이 모습에 속아 또 10여년 넘게 녀석에게 봉사하게 될 것입니다.

  5. 은유시인 2010.02.27 22:12 PERM. MOD/DEL REPLY

    강아지를 좋아하는 모습이 저랑 너무 똑같습니다.
    저희 누님도 강아지를 너무 사랑하여 늘 두세 마리를 키우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엔 강아지 세 마리가 곰팡이사료를 먹고 두달여 새에 250만원이 넘는 치료를 받았습니다.
    하루 2~3만원버는 헌옷 수선하는 여자에겐 엄청 부담스런 금액이었지요.
    하나도 아깝지 않다 하였습니다.

    혹자는 아프리카에 굶주려 죽는 이들을 도와주지 왜 그깟 강아지한테 그리 큰 돈을 쓰냐고 합니다.
    그런 자야말로 제돈 털어 많은 사람들 도와줄 마음이 없음은 물론
    어리석음은 쉽게 탓하는 자들입니다.

    사용자 bongta 2010.03.01 08:44 신고 PERM MOD/DEL

    “혹자는 아프리카에 굶주려 죽는 이들을 도와주지 왜 그깟 강아지한테 그리 큰돈을 쓰냐고 합니다.”

    이런 논법을 저는 바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천박하고 고약한 정신이 드러난 것인데,
    가령 동물/사람을 단순히 이분법으로 나눈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지요.

    이런 사람은 사람/사람도 조건에 따라 쉬이 나누고 볼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컨대 부자/빈자, 키 큰 사람/ 키 작은 사람, 검은 사람/흰 사람 …….
    이리 세상을 분절하기 바쁘지요.

    그리 나누다 맨 나중에 귀착되는 곳은 어디겠습니까?
    자기 가족,
    그리고 이내 넘어서는,
    곧 자기 자신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니 그가 말하는 아프리카와 강아지를 구별하자는 것은,
    따지고 보면 자신과 타자를 철저히 가르자는 이야기에 다름 아닙니다.

    “혹자는 아프리카에 굶주려 죽는 이들을 도와주지 왜 그깟 강아지한테 그리 큰돈을 쓰냐고 합니다.”
    이 말은 곧 저런 속셈을 교묘하니 은폐하고 있는,
    아주 비겁한 화법이지요.

    그 외에도 저런 자들의 잘못은 여러 관점에서 얼마든지 따져볼 수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그만 참지요.
    저는 더이상 저들을 가르칠 용기가 없습니다

  6. 은유시인 2010.03.01 16:49 PERM. MOD/DEL REPLY

    사하구의 1년예산이 2700억입니다.
    그중에 3분지1은 공무원 월급이랍니다.
    공무원 수가 700여명입니다.
    그렇다면 공무원 평균 년 1억이 넘는 돈을 수령한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실제로 공무원한테 물어보면 월급 3~4백만원이 넘지 않습니다.
    저희들끼리 입을 맞춘 겁니다.
    사하구 1년 복지예산이 700억입니다.
    그렇지만 복지수혜자에겐 50억도 제대로 배정되지 않습니다.
    사하신문을 발행할 때 2007년경에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하구 예산의 흐름을 정밀하게 분석하여 알기쉽게 풀이해보려 했습니다.
    사하구의회의 비용만 파악하고 이후론 시간이 없어(글을 쓰면서) 중단했습니다.

    앞으론 대한민국이 공무원복지국가가 된다는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가장 거대한 조직이 하나의 권력으로 대한민국을 조정할 수 있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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