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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언(難言)

소요유 : 2010. 9. 9. 09:36


어느 가을 하루 인연 지음에,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문귀 하나를 문득 새겨보고 싶어졌다.

則愚者難說也,故君子難言也(故君子不少也)。
且至言忤於耳而倒於心,非賢聖莫能聽,願大王熟察之也。

... 그러한즉슨 이는 어리석은 자를 설득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군자는 말하기를 어렵게 생각합니다.

또한 지언은 귀에 거슬리고, 마음에 반하기 때문에,
현인이나 성인이 아니면 바로 듣지를 못합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이를 깊이 살펴 주옵소서.

참고) ‘故君子難言也’는 판본에 따라 ‘故君子不少也’로 달리 적힌 것도 있다.

***

어리석은 자는 아무리 이치에 닿는 말을 하여도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한다.
그러하기 때문에 군자는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잘못하다가는 어리석은 군왕에게 죽임을 당하기 일쑤인 것이다.
한비자는 앞에서 그러한 역사적인 사례를 거증(擧證)하며 이런 결론에 이르르고 있다.

지언(至言)이란 무엇인가?
여기서의 至란 영어로 하자면 extremely쯤에 해당된다.
궁극에 이르른 상태를 말한다.
그러하니 至言이란 지극한 경지에 이른 말, (최고로) 도리에 합당한 말을 이른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리석은 소인은 귀에 거슬리고 마음이 불쾌해지며 편치 않게 된다.
양약은 입에 쓰다고 하지 않던가 말이다.
화려하고 달콤한 말에 익숙한 사람이니 곧고 바른 말이 귀에 들려오겠는가?
제 귀에 달고, 제 마음에 달콤한 말만 가려듣는 이를 일러,
우인(愚人), 소인(小人)이라고 부른다.

말이 아무리 지극한 도리, 이치에 이른 것이라 한들,
상대가 성인쯤이나 되어야 접수가 되는 것이다.

세상의 이치가 이러한 것인데 어쩌란 말인가?
그러하니 한비자는 세난(說難)에서 이리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말이다.

凡說之難,在知所說之心,可以吾說當之。

무릇 설득의 어려움이란,
설득할 사람의 마음을 제대로 짚어,
나의 설득하는 바를 그의 마음에 제대로 맞추는 데 있다.

이쯤이면 이 얼어붙은 동토에 지언은 설 자리가 없다.
그래 과연 지언과 설득이 한 자리에서 동시 만족 될 수 있는가?
상대가 성인이 아니라면 이게 동시 만족되기는 지극히 어렵다.
만약 상대가 성인 아닌 우인인데도 지언으로 설득시킬 수 있다면
이는 과시 설득의 천재라 할 것이다.

외저설좌하(外儲說左下)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范文子喜直言,武子擊之以杖 “夫直議者不為人所容,無所容則危身,非徒危身,又將危父。”

범문자는 직언하기를 좋아했다.
범무자(범문자의 아버지)는 몽둥이로 그를 때리면서 이리 타일렀다.

“대저, 직언이란 남이 받아들이지 않는 법이다.
소용이 없으니 외려 몸이 위태로워질 뿐이다.
단지 네 몸이 위태로워지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장차 네 아비인 나도 위태로워진다.”

과연 범문자는 어리석은 사람일까?
범무자는 세상의 번연히 돌아가는 이치를 아는 현명한 사람일까나?

子產者,子國之子也。子產忠於鄭君,子國譙怒之曰 “夫介異於人臣,而獨忠於主,主賢明,能聽汝,不明,將不汝聽,聽與不聽,未可必知,而汝已離於群臣,離於群臣則必危汝身矣,非徒危己也,又且危父矣。”

자산은 자국의 아들이다.
자산은 정나라의 임금에게 충성을 다했다.
하지만, 자국은 노하여 말한다.

“대저, 많은 신하들과 다르게 홀로 임금에게 충성하려고 한다면,
그 임금이 현명하다면 너의 말을 들어 줄 것이다.
하지만, 현명하지 못하다면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것이다.
들어줄 것인가, 아니 들어줄 것인가 아직 아지도 못하면서,
너는 많은 신하들과 떨어져 외톨이가 되는 것이다.
뭇 신하들과 등지게 되면 너의 몸은 반드시 위태로워진다.
또한 단지 너만 위험해지는 것이 아니라,
네 아비도 덩달아 위태로워진다.”

범무자든 자국이든 말하는 바,
아들 혼자뿐이 아니고 family 전체가 위험에 빠진다고 경계하고 있는 게다.

그러하니 난언(難言)인 것이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말하는 이 하나를 넘어 구족(九族), 십족(十族)까지 위태로워진다.
(※ 십족은 범주가 혈연을 넘어 친구 등 관련 인사까지 아우른다.)

그러하니 지언이란 실로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이 없으면 감히 나올 수 없음이다.
만약 그런 위태함임에도 이를 무릅쓰고 나온다면,
여기엔 공명심이라든가, 벼슬을 사겠다든가, 출세를 하고 말겠다는,
무엇인가 꾀하는 간절한 원망(願望)이 숨어 있는 것일 테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라면 이미 지언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설득이 거의 불가능한 세계에 살면서 지언으로써 설득을 하는 사람은 도대체 무엇인가?
한비자는 난언(難言), 세난(說難)편을 두어 이를 신랄하게 경계하고 있음이다.

나는 생각한다.
내가 말한 것이 지언(至言)이어든가?
아니면 허언(虛言), 요설(饒舌), 요설(妖說)이어든가?

하지만,
실인즉,
이 판정은 내가 아니라 듣는 이가 가려 택해야 할 것임이니.

허공중에 던져 쏘아진 - 투사(投射)
은빛 비늘처럼 반짝이는 그 말의 편린들이란 얼마나 장히 아름다운가?
내가 뱉은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말이란 그 말 스스로의 명운(命運)을 득(得)한다.
태언난 말은 때로 악하기도 하지만 혹은 선하기도 한 것.
악한 것이어든,
선한 것이어든,
일단 태어난 것들을 나는 '장히 아름답다'고 감히 헌사(獻辭)를 바치고 있음이다.
그들의 운명은 역시나 그들에게 맡겨야 할 사.

아아,
내가 지른 말이,
지언이 되고 요설이 됨은 실로 그대에게 달렸음이라.

어느 서늘한 가을날.
너무 곱고 아름다운 하루의 인연 한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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