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성불하십시오' 유감

소요유 : 2010. 9. 19. 11:35


'성불하십시오.'  

이 말씀을 듣잡자니, 한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다.
이 말은 신자들끼리도 덕담삼아 주고받지만,
스님에게도 무심결에 이리 인사를 차리고는 한다.
득도(得度)한지 일천한 스님 네라면 뭐 큰 허물이 아니 되겠지만,
대덕고승이라든가 조실(祖室), 주지승쯤 되는 분에게 이 말씀을 주저 없이,
내놓는 신자들이 적지 않다. 

'성불하십시오.' 

이 말은 헤아려 볼 것도 없이 아직 성불하지 못한 상태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하니 법덕 높은 스님에겐 자칫 잘못하다가는 욕이 될 수도 있다.
은연중 당신은 아직 도를 이루지도 못한 채,
그저 이름만 드높고 차림새만 요란 벅적하지 않는가?
이런 비꼼의 의도가 숨어 있지 않으란 보장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들 간엔 '성불하십시오.' 이런 인사를 얼추 나눌 수는 있지만,
스님에게 차릴 인사로는 과히 염려스런 점이 많은 인사법이라 하겠다. 

우리가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음식점 주인이 음식을 내놓고 돌아서면서,
‘맛있게 드세요.’
툭 던지는 이런 말을 듣고는 한다.
그래 마치 싸구려 식탁 위에 성의없이 젓가락 탁 던져놓고 사라지듯이.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음식이 맛있다면 그럭저럭 참고 봐줄 수 있지만,
만약 음식이 맛이 없다면,
이것은 비록 맛은 없지만 맛있는 척이라도 하라는 이야기인가?
이때에 이르면 이는 모욕을 넘어 폭압적인 언사가 되고 만다.

강요도 이리 억지스런 강요가 어디에 있는가?
모름지기 음식은 손님의 혀로서 식감(識鑑)되는 것,
이러한 것을 미리 마음에 준비시켜 응감(應感)케 하려는 것인가?
그러하다면 이는 장삿술로서는 제법 교묘한 수작질이 되겠지만,
오로지 자신이 혀로서 음식의 감고(甘苦)를 평하려는 손님에겐
외려 누(累)가 될 수도 있다.

사실 고급음식점일수록 ‘맛있게 드세요.’ 이런 말은 듣기 어렵다.
보통 헐한 음식점일수록 이런 말들이 남발된다.
격식 차리지 않는 여느 시장통 구석에 낀 식당이라면,
이 또한 가끔씩 반찬에 섞여 나오는 머리카락 젓가락으로 건져내며,
아무렇지 않은 듯 계속 먹어대듯이 그냥 그러려니 여기고 지나칠 수 있다. 

하지만 음식뿐이 아니고 품위 있는 접객 서비스를 함께 구매하였다고 할,
고급 음식점이라면 저런 말들은 공연한 월권이요 주제를 넘는 참견이다.
왜냐하면 맛을 느끼는 것도 손님 자신이요,
그 맛을 평가하는 것도 손님 자신의 전속권인 게다.
그러한 것인데 오히려 서비스를 제공하고 평가를 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자가,
감히 맛있게 먹어라 말라 이리 참견할 주제는 아닌 것이다.
주인은 손님이 잡숩는 동안 황송한 듯 양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서는,
뒤로 물러나 손님이 어찌 평하시려나 하며 마냥 공구(恐懼)하니 기다려야 할 입장이 아닌가?

음식을 먹는 동안 단지 그 음식만이 아니라,
왕처럼 기품 있게 먹겠다.
그러하기에 비싼 돈 주고 고급음식점에 들른 것이 아닌가?
예하건대, 감히 왕에게 맛있게 먹어라 말 할 수 있음인가?
오히려 자신이 만든 음식이 혹여 손님인 왕께 미치지 못할까봐,
전전긍긍 노심초사 기다려야 처지임인 게다.

신도가 10명이 있는 집단이라고 가정해보자.
여기 성불한 이가 하나도 없을 경우라면,
'성불하십시오.'  
이 말은 아무런 허물이 없다.
모두에게 격려가 되고 신심을 다지는 훌륭한 인사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어느 날 한 사람이 성불하였다 하자.
그러면 이 사람은 빼고 나머지 아홉들에겐 저 인사가 하자가 없겠지만,
이 사람에겐 어불성설 합당한 인사가 아니 될 것이다.
무례한 인사가 되고 만다.
무섭다.
성불하지 못한 이가,
성불한 이를 감히 가름할 수 있음인가?
그러한즉 저 인사법은 날카로운 예도(銳刀)처럼 위험하다.
자칫 자신을 벨 수 있다.
산맥이 바다 속에 이어져 있는 잠갑(潛岬)처럼,
갯것들만이 아는 바다 속 일은 뭍것들은 하마 알 수 없음이다.
(※ 갯것 : 뭍에 사는 이들이 바닷가에 사는 이를 하시(下視)하여 이르는 말.
      뭍것 : 바닷가에 사는 이들이 육지에 사는 이들을 깔보며 이르는 말.)
차츰 성불한 사람이 넘어 반이 넘어가 다섯, 여섯 이리 늘어나고 있다면,
저 인사법은 열외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계면(誡勉)하는 즉 부추기고 격려하는,
때로는 부끄러운 듯 지들끼리만 주고받는 인사법으로 밀려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선 어떤가?
'성불하십시오.'
이 인사는 거의 무차별적으로 횡행하고 있다.
이는 결국 성불이라는 것이 거의 무망(無望)한 것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들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신도들이든 언필칭 승보(僧寶)라고 일컫는 스님 네들이건 가리지 않고,
아직 성불이 되지 않았음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있는 미각(未覺)의 세상이라니!
그러하다면 결국 저 말은 여기서는 영원히 미달(未達)하는,
저 피안에만 속하여 있는 공허한 말이 아닌가 말이다.

아아,
그러하다면 차라리 저 말을 전폐(全廢)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렇지 않은가?
도대체가 실현 불가능한 말을 주고받는 것처럼 겸연(慊然)쩍은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함에도 저 말은 덕담이 되고 격려가 되고 있음이니,
차라리 이 지경이라면 저들이 얼마나 솔직한가, 혹은 간절한가 하고 감탄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나?

마찬가지로,
‘맛있게 드세요.’
이 말 역시 맛이 없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그리 무리가 없다.
게다가 무례하기도 하다.
감히 내 입맛을 저 말 하나로 참견하려고 하다니 말이다.
내 혀는 내가 부리는 것,
네가 무엇이건대 감히 주제넘게 좌지우지 하려 하는가?
이거야말로 괘씸하지 않은가?

음식은 음식으로 승부를 결해야 한다.
맛은 맛으로 떳떳하니 평해져야 한다.
남의 밥상(젯상)에 나타나 감 놔라 배 놔라 간섭할 일이 아닌 것이다.
내 제사는 우리 가문의 법도대로 모시는 것,
그대는 어찌 남의 집안일까지 기웃 꺼리고자 함인가?
내 혀는 내가 사역(使役)하여 부리고 있는데,
내 돈 내고 들어와서 어찌 주인의 참견을 받고 있을 수 있음인가?

이게 다 모두 품위가 없어서 그러한 것이 아닐까?
남을 존중한다면 다소곳이 물러나 그의 일은 그에게 맡겨야 하는 것.
염치도 없이 남의 소관사에 끼어들고,
뺑덕어미도 아니고 오지랖 넓게 입품을 팔고 있는가?

그러함에도,
우리네 일상에 들어오면,

'성불하십시오.'  
이 말은 간절한 원망(願望)을 담은 덕담이 되고,
‘맛있게 드세요.’
저 말은 객(客)의 기분을 애교스럽게 간질이는 허사(虛辭)로서 용인되고 있다.

이것을 무심하니 또는 너그럽게 받아들여도 될 터인데,
장마철 괴인 물웅덩이에 노니는 소금쟁이를 쪼그리고 앉아 무연(憮然)히 치어다보듯,
이리 가만히 들여다보는 나라는 물건은 도대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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