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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초(刈草)

농사 : 2010.09.30 16:36


금년 밭에 난 풀을 몇 차 예초기로 베어왔다.
저 아래 쪽 밭 일부는 이웃에게 빌려준 곳인데 거기 나는 풀은,
굵기가 거의 나뭇가지를 방불한다.
올 봄 거기에서만 폐비닐을 거두는데 상당 시일을 지체하였다.
그러한 곳인데 이젠 풀까지 말썽이다.
짐작컨대 비료를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풀들이 왕성하게 영양 성장을 하는 까닭인가 싶다.
이곳을 제외하고는 무농약 상태로 오랫 동안 관리되었기 때문에,
어느 곳보다 사뭇 청정한 상태다.

나는 애초 그 지역은 3년간 아무 것도 심지 않으려고 하였다.
농약, 비료 따위에 시달렸을 터니 아무래도 정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자라는 대로 풀들을 키워 자꾸 베어내다 보면,
이들 독(毒)들이 많이 뽑아내질 것이라 여겼다.
헌데 올봄 인삼밭을 가는 대형 트랙터로 심경(深耕)하였기에,
표토와 심토가 많이 뒤섞여 독성이 많이 저감되었으리란 기대가 있어,
휴경(休耕)기간을 조금 앞당겨도 될 것 같다.
하회(下回)는 일이 되어가는 대로 맡겨 따르리라.

얼마 전 윗 밭부터 예초를 해나가는데,
저 문제의 밭에 이르러 풀이 잘 베어지지 않는다.
나는 새 칼날로 바꿔 달았다.
그런데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무디어진 기미이다.
먼젓번 것은 전 밭을 갈고도 멀쩡했는데 이 밭에 들어와 기어이 수명을 다했다.
그런데 워낙 베어내는 풀의 양이 많다보니 예초기를 힘차게 휘둘러야했다.
나중엔 베어 넘긴 풀더미에 예초기 작업봉이 아예 박혀 꿈쩍도 하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드디어 예초기 헤드가 좌우로 움직거리기 시작한다.
작업봉 끝에 칼날을 끼우는 헤드가 있는데 나사로 연결되어 있다.
워낙 험하게 좌우로 스윙을 하니 연결 구멍이 점점 넓혀져 흔들거리게 된 것이다.
작업봉이 알루미늄 재질이라 무른 편인데 이것을 바꾸자니 가격도 제법 비싸지만,
바꾸고 나서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말 우려가 있다.

나는 궁리를 터서 그럴듯한 방안을 내었다.
바로 작업봉을 빼내어 철공소로 가지고 갔다.
내가 여차저차 상황을 설명하고서는 작업봉 안에 쇠로 된 파이프를 끼어 넣고,
겉으로 두어군데 나사를 박으면 좋겠다고 주문을 했다.
그는 이내 알아듣고는 선반작업을 한다.
척 보아하니 8자짜리 산형(山形) 선반이다.
CNC는 아니지만 저 구형의 남선 선반은 언제 보아도 듬직하다.
주인아저씨는 봉강(棒鋼, 丸棒) 하나를 집어 들고는 두툼하니 살을 남겨두고 내삭(內削)을 해서,
그럴듯한 파이프 하나를 이내 만들어내었다.
저것 하나면 만년을 쓰겠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덧 주인아저씨는 봉심(棒心)으로 파이프를 박고는,
볼반으로 구멍을 내고 기리까지 만들어 나사를 박아 내준다.
나는 거죽에 고정 나사를 두어군데 더 박아야 한다고 일렀으나,
그는 그리 나사를 많이 내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고 그냥 쓰라고 한다.
전문가 의견이니 나는 그의 체면을 살려 주기로 한다.

하지만 돌아와 사용하다 보니 이게 겉돌아 여전히 헤드가 흔들린다.
나는 바로 재우쳐 철공소로 갔다.
그에게 내 의견대로 고정 나사를 몇 개 더 박아야겠다고 하니,
그제서야 작업을 해준다.

참고로 몇 가지 뜻풀이를 해본다.

예초(刈草)
혹자는 예취(刈取)라고도 한다.
어떤 이는 예취를 예초의 구개음화로 보고 예취를 잘못된 것이라 하는 이도 있는데,
둘 다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는 바른 말이다.

선반(旋盤)
旋이란 돈다라는 뜻이다.
축에 물건을 고정시키고 그 축이 돌면서 이를 절삭하게 된다. - 선삭(旋削)
盤이란 원래 소반(小盤)과 대반(大盤)이 있다.
소반은 세숫대, 대반은 목욕통으로 사용하였는데,
상주(商周)시대부터 쓰였으니 제법 유래가 오래다.
우리나라에서는 소반하면 조그마한 밥상을 일컫고 있다.
그러다 그 형상을 기반으로 사물의 근본이 놓여 있는 것을 추상하여 쓰이기 시작했다.
예컨대 지반(地盤), 근반(根盤) 따위가 그것이다.
여기서의 盤은 영어로 하면 plate가 제일 가깝다 하겠다.
그러하니 선반이란 선삭(旋削) 작업을 하는 편편한 작업대를 이르고 있는 것이다.

볼반
이게 처음 듣는 사람은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
내가 짐작하기에 이는 boring machine + 盤의 합성어가 아닐까 싶다.
boring machine 또는 drilling machine 하면 될 것을,
선반과 짝을 맞추려는 것일까?

사실 공작기계의 대표 주자는 이 두 가지가 아닌가?
원기둥 모양으로 길게 깎고, 구멍 내고.
구멍은 깎아 낸 기다란 물체가 있어야 짝을 이루고,
깍은 것은 구멍이 있어야 들이밀어 끼울 수 있다.
요철(凹凸), 음양(陰陽)의 이치 또한 이러한 것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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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은유시인 2010.10.01 15:57 PERM. MOD/DEL REPLY

    저도 7개월여 금형공장에서 일을 배운 적이 있어 웬만한 공작기계는 압니다.
    전업 농부가 되려면 웬만한 기계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순수 노동력으로 대 농원을 일궈낼 선생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화이팅~!!

  2. 사용자 bongta 2010.10.02 19:24 신고 PERM. MOD/DEL REPLY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교련이라고 있었습니다.
    그 때 향도를 맡았었지요.
    어느 날 불려 나와,
    좌로갓, 우로갓 따위의 구령을 붙여 부대를 지휘하는 역을 맡게 되었는데,
    저는 한 자리에 서서 그리 하지 못하고 대열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며,
    구령을 붙였단 말입니다.
    그러하니 제 발 움직임에 박자가 맞추어져 저절로 구령이 잘 맞아 들어갔습니다.
    이 때 절도가 칼 같아 로봇이란 별명이 붙은 군인 출신 교련 선생은,
    이를 보더니만 향도가 제법 똑똑하네,
    제 발을 맞춰 구령을 내리니 틀림이 없네 이리 말씀을 했지요.

    그런데 이게 그리 칭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나중 커가면서 차츰 깨닫게 되었지요.
    구령을 붙이는 이, 지휘를 하는 자는 중심을 잡고 움직이면 아니 되지요.
    입으로 말을 하고 몸은 거둬 아껴야 지휘관의 위치가 확립됩니다.
    몸을 움직이면 이게 졸(卒)이 할 일이지,
    무릇 지휘관은 머리를 쓰자면 한 곳에서 가만히 사태를 응시하고,
    사물을 흘러가는 추이를 추적하여 decision making을 잘 하여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몸을 따라 움직였으니 성실할는지는 몰라도,
    별로 바람직한 지휘관은 못 되는 것이지요.

    북두(北斗)가 하늘 별 가운데 으뜸인 것은,
    제 자리를 움직이지 않고 지켜 뭇별의 중심이 되는 데 있는 것이지요.
    만약 이게 움직인다면 여느 떠돌이별과 다름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즈음 농원 경영이라는 것도 기실은 주인이 몸을 많이 부리면 별로 경제적 실익이 없습니다.
    아주머니를 쓰든, 아니면 외국인 노동자를 부리든,
    이들의 노역을 돈으로 사고,
    주인은 머리를 써서 꾀를 내어 경영을 잘하는 것이 돈 버는 지름길입니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떼놈이 벌고'라는 속언을,
    여기 시골에 들어와 여실히 눈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등이 굽고 까만 얼굴로 흙일을 하는 이들은 모두 다 안타까운 처지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손에 흙 하나 묻히지 않는 주인은 이리저리 어슬렁 거리며,
    돈은 결국 지가 다 챙기지요.
    on farm, off farm의 분별,
    기술적인 것 보다 management 특히 risk 관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제가 만난 농경영학 전공 박사들은 한결같이 조언합니다.

    그런데 저와 같은 엔지니어링 계통 출신들은 기술에 oriented 되어 있어,
    제 손으로 기술적 과제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반면 경영학 전공자들은 기술적인 측면 보다 주로 관리, 마케팅 측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짙습니다.
    이 양자가 모두 중요할 터인데,
    후자는 기술적인 것은 모두 시장에서 얼마든지 조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여기에 과도한 정열을 쏟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반면 전자의 사람들은 기본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고,
    그 다음을 어찌 기대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시대를 불문 언제나 돈을 가져가는 것은 후자인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지금 배추 파동의 와중에서도 정작 돈을 버는 것은 몸을 움직인 농부가 아니라,
    정작은 마음을 꾀내인 상인이 수지를 맞고 있지요.
    역사적으로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 저는 여씨춘추를 지은 여불위를 꼽습니다만,
    여기 시골에서도 이런 노선을 걷는 이를 몇 사람 보게 됩니다.
    앞에서도 거론했습니다만 농부는 사라지고 상인만 남은 들녘의 실상입니다.

    제가 순수한 노동력으로 땅을 일구려는 것은,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겠습니다만,
    이러하지 않는다면 굳이 이곳 시골에 내려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기적의 사과’란 책을 혹시 알고 계십니까?
    사과농장을 우직하게 무농약으로 지으려다가 실패하고는,
    마지막에 자살하려다가 우연히 한 깨달음을 얻고는 재기하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일본의 경우만 하더라도 노장(老莊) 사상을 공부한 이가,
    이를 현실에서 몸소 실천적으로 증명하려는 인사들을 몇몇 알고 있습니다.
    ‘기적의 사과’의 주인공 기무라씨가 노장 사상을 알고 모르고는 떠나서,
    간간 일본인들 중엔 이들 사상을 좇아 실천하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한국에선 해박하게 노장 사상을 꿰고 있는 이는 많지만,
    이를 구체적 실천 현실에서 밟아 가는 이들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노장에 대해 별로 깊이 알고 있지도 못하고,
    자연에 대해 역시 거의 무지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힘이 닿는 데까지 자연의 위대한 생명력을 믿고,
    노장의 가르침을 조금씩이나마 따라 좇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설혹 나중에 힘에 부쳐 주저 앉는다하여도.
    그 때까지는 조금 무리가 따르더라도 시험을 계속하고 싶은 것입니다.

    만인을 부리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고,
    노심초사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지는 마음을 갖는 것 보다는,
    저 자신 하나지만 몸과 마음을 함께 하나로 움직일 수만 있다면,
    저는 이를 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 고등학교 시절의 저처럼, 또는 노장처럼.

    사실 한비자엔 군주의 길로써,
    전자를 아주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게 법(法) 보다는 술(術), 세(勢)의 테크닉한 면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지만,
    저로서는 상인보다는 농부로서 지금 여기 이 자리를 지켜내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 시험으로서 오늘을 겨냥해보는 것입니다.

  3. 은유시인 2010.10.02 23:12 PERM. MOD/DEL REPLY

    저도 농업계고등학교를 졸업하여 농업에 대해 약간은 알고 있습니다.
    일은 무척 고되면서도 중간 상인의 농간에 쉽게 휘말리어 수익을 기대하기가 어렵지요.
    정부의 농업정책이 제대로 섰다면
    흉작 때문에 농산물 가격이 폭등하고 풍작 때문에 똥값되는 일도 없으리라봅니다.
    각 산지마다 파종과 예상 수확량을 수시로 점검하여 전산으로 분석해보면
    소출을 계산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텐데
    가격폭등과 똥값이 되풀이되는 걸 보면
    그 머리좋은 관료들은 저 위에서 도대체 뭘 하는지 궁금합니다.
    소나 돼지, 닭도 농가마다 몇마리 키우는지 그거 통계내기가 뭐 그리 어렵다는 얘긴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우리집은 소 두 마리에 돼지 열 마리, 닭 스무 마리 키운다고
    농업통계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수치를 입력하면
    컴퓨터가 다 알아서 어느 고장엔 뭘 얼마나 키우고 언제 출하할 것인지
    컴퓨터가 알아서 분석을 하고 예상진단을 해줄텐데
    그 수백억대의 좋은 고성능 컴퓨터를 왜 사용 안하는 것인지 궁금하네요.

  4. 사용자 bongta 2010.10.05 08:01 신고 PERM. MOD/DEL REPLY

    노무현이 그리 말했지요.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

    그리고 그는 선거운동 당시의 약속인 분양원가 공개를 거부했습니다.
    노빠 출신 혹자는 말합니다.

    “그가 원래 중도보수인 것을 몰랐는가?
    그를 찍어놓고 진보정책 펴지 않는다고 나무라는 것은 잘못되었다.”

    그가 중도보수이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가 애초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 잘못이지요.
    그는 진보 간판을 들고 선전하여 대통령이 된 측면이 강합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이후는 제 본색에 충실했지요.
    저는 이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다른 이들에 비해 인간적이고 김경재 말대로 영혼이 맑은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일응 수긍하지만 사이비 진보였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하기에 정권을 통째 이명박에게 넘겨주었지요.
    깨끗한 거짓 보다는 차라리 더러운 참이 나서서,
    게다가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데야 어쩌겠습니까?

    말씀하신 국가 단위의 통계라는 것은 정말 요긴하고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개별 경제 주체가 여기 참여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자신의 능력, 조건은 숨기고 다른 사람의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경영에 유리하지요.
    그러하니 말씀하신 시스템이 설혹 갖추어졌다 하여도 제대로 된 통계는 얻기 어렵지요.
    게다가 여기 와서 보니 컴퓨터를 모르는 농부가 태반이며,
    통계 작업 참여를 강제할 방법도 없습니다.

    농사를 짓다보니 일기예보를 자주 보게 됩니다만,
    이게 거의 엉터리 수준이더란 말입니다.
    슈퍼컴퓨터를 가지고 방대한 물리적인 데이터를 넣고도 판판히 빗나가는 실정입니다.
    자연물도 아닌 항차 인간이 개재된 주식, 농작물 따위의 유통시장 내에서의 가격 예측은,
    그야말로 귀신도 알아 맞추기 어렵다 하지요.

    제가 어려서 부터 듣는 것은,

    “중간상인이 문제야.
    유통과정을 합리화 해야 해.
    정부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이야?”

    이런 류의 말들입니다.

    하지만,
    수십년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런 말들은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역시나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떼놈이 벌고'라는 속담이 여실한 것이 아닙니까?

    노무현은 말했습니다.

    “분양가 원가 공개는 장사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

    “정경언 유착과 도청 문제중 도청 문제가 더욱 중요하고 본질적이다.”

    이러면서 그는 중도보수가 아니라 진짜 보수의 제 길을 걸어갔습니다.
    제가 안타까운 것은 그가 진보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진보란 간판을 들고 나타나 돼지저금통을 훑어가면서까지 진보 행세를 한 것이지요.
    그가 뭇 정치인에 비해 인간적인 매력이 있다거나,
    영혼이 맑은 것 따위의 진위 여부를 떠나,
    정치인으로서 그는 전후가 다른 간판을 걸고 장사를 한 점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이런 것을 바로 ‘似而非’라고 합니다.

    이쯤이면,
    권력이 시장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영혼이 시장에 넘어간 것이지요.

    돈을 벌려면 영혼쯤이야 가볍게 여기며 팔아먹을 배짱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인간들을 여기 시골에서도 바로 지척에서 자주 보고 있지요.
    이런 자들도 거죽으로는 미소를 실실 날리면 그럴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만,
    뒤로는 열심히 주판을 두드리며 셈을 하지요.

    제가 맹자에 나오는 似而非, 이 말이 나온 부분을 다시 한번 새겨봅니다.

    孔子曰:‘惡似而非者:惡莠,恐其亂苗也;惡佞,恐其亂義也;惡利口,恐其亂信也;惡鄭聲,恐其亂樂也;惡紫,恐其亂朱也;惡鄉原,恐其亂德也。’君子反經而已矣。經正,則庶民興;庶民興,斯無邪慝矣。

    이 글에도 보면 亂이란 글자가 제법 등장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저는 한마디로 난적(亂賊) 또는 난신적자(亂臣賊子)라 부르고 싶습니다.
    왕을 죽이고 제 아비를 죽이는 아들이라 하지만,
    기실 이게 굳이 왕, 아비를 뜻하는 것으로 새길 것이 아니라,
    제 마음의 신(信)과 의(義)를 죽이는 패륜아(悖倫兒)라고 일러야 할 것입니다.

  5. 여해 2010.10.07 05:45 PERM. MOD/DEL REPLY

    안녕하세요~ 선생님
    가을 날씨가 이젠 제법 차갑습니다
    농원엔 더욱 차가운 기운이 돌겠지요 건강 항상 유념하길 바라겠습니다

    아들 녀석 병원일 때문에 요즈음 자주 들어와보질 못했습니다 아비로써 대신할수 없다는 것이 마냥 미안할 뿐이네요
    하지만 선생님의 글 한번씩 볼때면 마음의 안정을 찾곤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안녕히 계세요

    사용자 bongta 2010.10.07 21:35 신고 PERM MOD/DEL

    제가 아는 분의 따님은 요전에 말씀 해주신 두 가지 유형 중에 다른 하나인 것 같은데,
    대만 쪽인가 중국 쪽에서 donor를 찾았다고 하더군요.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온 집안 식구들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지요.
    여해님의 경우 그 정도는 아니라니 여간 다행이 아닙니다.

    부처님 재세시(在世時)에 한 어미가 자식을 잃고는 울고불고 난리를 쳤습니다.
    부처 앞에 그 어미가 찾아와 죽은 자식을 살려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부처가 말합니다.

    “당신이 집집마다 다니며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을 찾아내면,
    내가 당신 아들을 되살아나게 하겠다"고 제안합니다.

    부처도 죽었는데,
    그것도 버섯인가를 잘못 잡숫고는 식중독으로 돌아가셨다 하지요.
    항차 그러한데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죽은 자를 되살렸다는 뭇 종교의 이적은 모두 뻥이지요.
    차라리 식중독으로 돌아가신 부처야말로 외려 더욱 인간적이기에,
    친근감이 가지요.
    아니 친근감 따위로 논하는 것이야말로 외려 비루하지요.
    산 자는 죽는 것.
    이것처럼 선명한 진실이 어디에 또 있습니까?
    다만 살아 있는 동안 건강하게, 의롭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요.

    사람들이 살면서 늘 죽음을 의식할 수만 있다면,
    죽음 앞에 조금 초연할 수 있겠건만 이게 쉽지 않습니다.
    잠이란 것도 우리를 매일 방문하는 temporary한 죽음의 예행연습일 터이지만,
    잠에서 깨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permanent한 영속의 삶이 지속될 것처럼,
    아웅다웅 다투며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일상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마냥 탓할 수만도 없는 것이,
    이게 오늘을 맞아,
    한 존재가 살아 있음을 애절하게 그렇습니다 바로 애절하게,
    증거하는 제례(祭禮)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제단(祭壇)에 엎드려 미리 앞당겨 자신을 조상(弔喪)하고 있는,
    그 기막힌 우리네 유한자(有限者)들의 가여운 열망들.

    오늘도 어김없이 손목 위엔 맥박이 똑똑 뚝뚝 뛰고 있습니다.
    마치 죽음을 향해 한 삽, 두 삽 삽질을 뜨듯,
    그리 시간 축을 재며 나아갑니다.
    이게 그 누가 살아 있음의 증표라고 말하였습니까?
    하지만 감수성 예민한 프랑스 시인 하나는
    죽음을 향한 삽질 소리로 듣습니다.

    오늘,
    가을빛이 처연하니 아름답습니다.
    여기 블루베리는 서서히 단풍이 들고 있습니다.
    한 때 푸르렀던 그 소년이 발갛게 낯붉히며 수줍은 소녀로 나투고 있습니다.
    이 쌍곡선의 변주(變奏)가 허공을 아슴프리 고은 선율(旋律)이 되어 흐릅니다.
    거기 가만히 제 혼을 놓아 내맡깁니다.

    日日是好日(일일시호일)
    하루하루 좋은 날입니다.

    여해님,
    가을,
    그 은빛 축복이 함께 하시길.

  6. 은유시인 2010.10.07 09:06 PERM. MOD/DEL REPLY

    배추값이 금값이네요.
    중간 상인들은 이것이 떼돈 벌 기회라 여기고 바가지를 옴팍 씌우려드네요.
    중간 상인들 또한 선량한 어버이요, 남편일진대
    그런 사람들이 사기근성을 드러내니 솔직히 대한민국 사람치고 사기꾼이 아닌 사람이 없어보입니다.
    기회만 오면 노골적으로 사기근성을 드러내는....

    날씨가 서늘합니다.
    기분좋은 날씨가 여러날 지속되니 마음이 풍요롭습니다.

    사용자 bongta 2010.10.07 22:39 신고 PERM MOD/DEL

    작년까지만 하여도 주말농사를 지을 때 배추를 조금 심었었는데,
    금년엔 하나도 심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도 주말농사를 계속하였다면,
    제가 서울 이웃에 좀 행세 좀 하고 다녔겠습니다.
    소출 난 것 거지반을 이웃, 친지들에게 나누곤 하였는데,
    배추 한 덩이만 드려도 대단하였을 것입니다.

    여기는 벌써 추운 편입니다.
    제가 원래 추위를 사뭇 즐기는 편이라,
    아주 낙락하니 한가롭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일이 널려 있어 육체적으로는,
    그리 만만한 처지가 아니군요.

    가을처럼 아름다운 계절이 없습니다.
    여기 3번 국도변엔 군청에서 코스모스를 심어놓았지요.
    아스라하니 가을 기운이 허공중에 운무처럼 번져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거기 cosmos 그야말로 우주적 환상에 절로 침몰하고 맙니다.
    침잠(沈潛)은 가라앉아 잠기는 것인즉 아직 내가 남아 있지요.
    하지만 침몰(沈沒)은 沒이 실인즉 歿 즉 죽음에 닿아 있지요.
    남아 있을 것도 없기에 침몰은 더욱 사무치는 근원으로의 회귀(回歸)를 뜻합니다.
    그래 저는 가을은 흔히 말하는 침잠으로서는 충분히 새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예 제 존재 전체를 몰각(沒却)시키는 그 근원을 향한,
    엑스터시(ecstasy) 즉 몰아(沒我)라야 가을을 제대로 알았다 하지 않을까 싶은 것입니다.
    저는 그래 가을 바다 그 영원(永遠) 속에 그저 침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번 사진으로 찍겠다고 하면서도,
    벌써 한 달이 지나지만 디카를 가져가지 못하여 그냥 지나칩니다.
    하지만 막상 차를 멈추고 서서 그녀를 찍자면,
    이내 그것은 기도(企圖)하는만큼 그 동량의 순수함을 잃는 것,
    그만치 저를 멀리 내치며 달아나지나 않았을까요?
    서양 녀석들이 시도 때도 없이 연인 보고 'I love you.'하며 안달하는 것처럼,
    디카를 들이 미는 것은 일종의 미적 강박증 같은 것.
    이리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저기 자전거길인 양 싶은 꽃길이 꿈길인 듯 아스라하니 펼쳐져 있는 곳이 있습니다.
    여기 전곡 보다 연천군청이 있는 곳은 외려 절간 처럼 한적합니다.
    저는 그런 곳에서 한가로니 지내고 싶은데,
    가끔 이리 차로나마 지나치는 것만으로도 그저 행복합니다.
    아무도 걷지 않는 그 꽃길 곁에 차를 대어놓고 혼자 거닐고자 합니다.
    꽃이 다 지기 전에 다음 번에는 꼭 그녀를 만나기를.

    은유시인님,
    가을은 첫사랑의 아련한 은유가 아닐런지요?
    그 계절의 그윽한 수사(修辭)에 젖어 드시길.

    기실 현실 보다 은유가 더욱 진실에 가깝지 않은가요?
    이 현실은 너무 거짓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은유는 여기 현실에 지친 우리네에겐 진실의 피난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토(福土)인 것을.

  7. 은유시인 2010.10.10 20:00 PERM. MOD/DEL REPLY

    봄이 처녀들 가슴을 설레게 하는 계절이라면,
    가을은 확실히 홀아비들이 울쩍해 하는 계절입니다.
    문예진흥기금 신청해 놨는데
    당첨될른지 모르겠네요.
    하도 경쟁률이 장난이 아니라서....

  8. 사용자 bongta 2010.10.11 08:18 신고 PERM. MOD/DEL REPLY

    음이 양을 그리고,
    양이 음을 향하는,
    자연의 이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저보다 연배가 십여 년 위인 분들을 몇 분 만나 뵙고 있는데,
    말씀 가운데 간간 이성을 향한 욕구가 아직도 식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지요.
    그 물 마른 고목 같은 육신에도 아직 순(筍)을 내려는 본능이 꿈틀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생명은 마지막 죽을 때까지도 자신의 연속성을 확보하려고,
    확인되지 않은 그 ‘맹목적 의지’를 작동시킬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지요.
    왜 하필 여자는 봄이고 남자는 가을을 느끼는가 하는 것입니다.
    춘하추동 생장수장(生長收藏)에서 봄은 生이고 가을은 收로 배대됩니다.
    통칭 수동적이라는 여자는 적극적 의지의 발현인 生에 반응하고,
    반대로 남자는 외려 소소하니 바람 부는 가을 들녘에 혼줄을 놓아버리고 마는 것입니까?

    제 글 ‘ 주리(主理)와 주리(主利) - 남녀의 code http://bongta.com/46 ’에서,
    잠깐 생각해보았듯이,
    역시 여자는 利를 위주로 하는 것입니다.
    生,
    자신의 본분인 생명을 예비하려면,
    봄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지요.
    이것이야말로 이익이 되는 일, 수지맞는 노릇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남자는 다 걷어 본원으로 침잠하는 길목에 서서,
    우주의 理,
    그 묘한 이치에 떨고 있는 것이지요.
    두려워 떠는 것이 아니라 공명 같은 존재의 ‘떨림’ 말입니다.

    가을 들판에 망연히 서서,
    사무치는 떨림, 울음이 웅숭깊은 우물처럼 자박자박 가슴 속으로부터 고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내라 할 수 없지요.
    마치 봄날 앙가슴께로 분홍빛 설레임이 자르르 지나지 않는다면,
    이 또한 계집이라 이를 수 없지요.

    헌데,
    고음불생(孤陰不生), 고양불장(孤陽不長)이라 하였지 않습니까?
    청상(靑孀)의 봄은,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격으로,
    피 토하는 심정으로 가는 봄을 서러워 할 터이며,
    환부(鰥夫)의 가을은,
    기껏 효자손으로 등이나 북북 긁으며 지새워야 한단 말인가?

    옛말에 홀애비 집에는 이가 서 말, 홀어미 집에는 은이 서 말이라 하였는데,
    은유시인님,
    올 가을엔 공연히 가을 허공을 밤새도록 휘적휘적 거니시지 마시고,
    어디 가서 곰보각시라도 좋으니,
    그저 이 서 말 주고,
    은 서 말을 구해오시는 이적(異蹟)을 보이셨으면 합니다.
    삼가 그리 축수 드리옵니다.

    하하.
    그런데 여기 시골 어떤 영감님은,
    저 보고 하시는 말씀이 저처럼 처와는 떨어져 있는 것이 좋다며,
    저를 외려 부러워하더군요.
    부즉불리(不卽不離)
    역시나 붙은 듯, 떨어진 듯,
    이런 아삼삼한 경지가 좋긴 하지요.
    하지만, 이게 도통한 이나 가능한 일이니,
    여기 또 하나의 홀애비와 다름없는 촌부는,
    그저 올 가을 공산명월(空山明月)을 벗하며,
    사타구니나 벅벅 긁으며 한 철 보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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