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곰보각시

소요유 : 2010. 10. 16. 10:13


‘곰보각시’
내가 가끔씩 쓰는 말이다.

각시란 얼마나 가슴 설레는 말인가?
나는 이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
봄, 여름 지난 가을 그것도 한참 늦은 가을, 아니 겨울 초입에 진작 들어선,
내 인생의 계절 앞에서도 이 말은 나의 심장을 출렁거리게 만든다.

낚시찌처럼,
망망한 의식 한가운데,
타자를 향한 염원.
그래, 유치환이 노래한,
노스탤지어어의 손수건,
소리 없는 아우성,
이 맹목적 충동이라니 …….

그런데 왜 하필 고은 각시가 아니고 곰보 각시인가?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 세든 여인네 셋이 있었다.
모두 시집을 가지 않은 처녀인데 그중 하나가 곰보였다.
미색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 편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이보다는 얽은 얼굴로 인해 늘 표정이 그리 어두웠으리라.
좌중의 대화 가운데서도 말수도 적고 한편에 물러나 가만히 자리를 지키곤 하였다.
다른 곳도 아니고 얼굴에 거의 천형(天刑)인 듯 남겨진 흉터라는 것이,
사내도 아닌 처녀에겐 여간 심각한 타격이 아니었을 터이다.

우리 어렸을 때는 곰보가 동네에 두엇은 꼭 있을 정도로 적지 않았다.
이를 예방하기 위하여 우두(牛痘)를 맞아야 했는데,
내 윗세대들은 이를 소홀히 하여 곰보가 되곤 했다.
당시 아버지는 이 약을 수월하게 구할 수 있는 위치에 계셨다.
이 약을 잘 아는 동네 의원에게 거저 주시곤 하였는데,
그 의원은 이 약을 가지고 방을 붙이고는 사람들에게,
종두(種痘) 즉 접종을 한다고 선전하였다.
이 우두를 다른 의원들은 쉬이 구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이 의원은 제법 그럴 듯한 효과를 보았다.
그래 간호원이 당시엔 귀하게 여겨지는 달걀 꾸러미를 싸들고는
답례 차 우리 집을 방문하곤 했다.

종두 이게 통상 상박(上膊)에다 놓았기에 우두 자국이 남았다.
해서 혹간 흉이 지지 않게 하기 위해 발바닥에 놓기도 하였으나,
나중에는 경구 투여액도 나왔었다.
이게 신경통에 좋다는 소문이 나서 어른들도 다투어 한 방울씩 부러 먹기도 하였는데,
당시 우리 집엔 동네 사람들이 주르르 몰려와 이 약을 얻어먹고는 하였던 기억이 있다.

그 때에는,
어디 처녀뿐인가?
내가 다닌 학교 선생님 중에도 곰보 선생님도 계셨고,
구멍가게 아들도 곰보였고,
엄마 따라 장에 따라가 보아도 곰보를 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여간 나의 기억엔 곰보는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왜?
곱디 고와야 할 각시에 하필 곰보를 덧씌워 연상하고 있는가?
잠깐 여기서 시 하나를 떠올린다.

박목월

윤사월

송화(松花) 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

여기 시에 등장하는 처녀는 곰보는 아니지만 눈이 먼 소경이다.
처녀가 하필 장님, 귀머거리, 째보, 곰보 .. 여야 하는가?

이 시에서 처녀는 눈이 멀었기에 귀가 열리고 있다.
이는 곧 마음이 열리고 있는 게다.
그래 하늘이 열리고 있음인 게다.

눈이 뜨인 이가 제 아무리 귀가 달려있다 한들,
땅 속의 신음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하늘의 호통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무당이 달리 무당인가?
보통 사람과 달리 신명(神明)이 들려야,
비로소 귀신을 보고,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

멀쩡한 이는 불가능 하다.
하기에 사광처럼 눈을 쑥불로 지지거나,
(※ 참고 글 : ☞ 2009/04/30 - [상학(相學)] - 젖꼭지 미백술)
귓구멍을 부젓가락으로 뚫기 전엔 신을 만날 수 없다.
오관(五官)을 폐관하여야 비로소 마음의 문이 열린다.
무당은 온 넋이 미쳐 돌아야 세상에 떠그르르 알려지는 국무(國巫)가 된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모두 당달봉사인 게다.
그래, 눈은 멀쩡히 뜨고 있지만,
정작 사물의 본질은 놓치고 있는 허깨비들,
청맹(靑盲)과니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장님이라야 외려 깊숙이 감추어진 세상의 비밀을 밝히 본다.
춘향전, 심청전에 등장하는 점술사들은 모두 장님이다.
장님이기 때문에 신과 교신하고,
세상의 본질을 본다.
아니 ‘듣는다’.

눈 먼 처녀는
봉사이기 때문에 비로소 귀로서 꾀꼬리 소리를 ‘본다’,
송홧가루 냄새를 ‘듣고’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는 언필칭 멀쩡하다는 사람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처녀 그녀는 눈이 멀었기 때문에,
송홧가루 냄새를 눈 또는 코가 아닌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아니 눈 이여도 좋고, 코로도 좋다.
그 따위가 무엇이고 간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귀를 빙자(憑藉)하여 마음으로 들었으되,
세상 사람은 스스로 그리 속았을 뿐인 것을.

때문에 외딴 봉우리의 송홧가루, 꾀꼬리 소리 …….
이 사물의 숨은 비밀, 본질을 알려면,
기어이 무당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 시에선 눈먼 처녀가 등장한다.
나는 생각한다.
이 처녀는 곧 무당에 다름 아니다.
시인은 필연적으로 눈먼 처녀 그래 곧 무당을 등장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일상 감각의 외연을 넓혀, 
저 숨은 세상을 ‘들으려면’,
필연코 무당이라야 가한 것이니.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왜 청세음보살(廳世音菩薩) 또는 관세색보살(觀世色菩薩)이 아닌가?
그는 세상의 소리 즉 세음(世音)을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신다.
이야말로 감각기관이 가로질러 크로스오버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 이 지경이면 기실 눈, 귀, .. 따위를 넘어 마음으로 觀하는 게다.
실인즉 크로스오버가 아니라 이 경지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식(六識)을 초월하고 있음인 게다.
처녀는 눈이 멀었기에 귀로 오관(五官)을 넘나든다.
관세음보살은 오관에 제한이 없기에 觀世音 한다.
왜 아니 嗅世音, 嘗世音이라고 할 수는 없음인가?

여기 시에 등장하는 눈먼 처녀는,
바로 관세음보살의 화신인 게다.
이 소식을 듣는가?
그대는.

나는 곰보각시 역시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고 여긴다.
나의 글,
그래 그게 시라 해도 좋다.
나의 시적 상상력, 문학적 의미 공간에서,
장님, 귀머거리, 째보, 곰보 ...
이들은 바로 관세음보살의 현현(顯現)에 다름 아니다.

곰보각시 역시 얼굴이 얽어있기에,
안으로 감아드는 마음으로 ‘각시’ 그 본분을 잃지 않게 된다.
각시가 곰보임에라야 비로소 거죽으로부터 해방된다.
이 때라야 눈먼 처녀가,
廳世音 아니 觀世音하는 아스라이 멀고 먼 구극(究極)의 시적 경지가 열린다.
보아라,
요즘 포틀에 등장하는 계집들은
꿀벅지니, 얼짱이니 하고 나대고 있다.
모두 다 벗어버리고 한껏 수치(羞恥)를 팔아먹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들은 설혹 눈이 달려 있다 하지만,
저 눈먼 처녀처럼 꾀꼬리 소리를 ‘보지’는 못할 것이며,
곰보각시처럼 마음이 선(善)하지 않을 것이다.
미(美)를 잃고서야 비로소 선(善)해지고, 진(眞)을 만난다.
이게 시인의 세상을 향한 인식의 창(窓)인 게다.

이들 포틀 계집들은 제 아무리 이팔이라고 하더라도 차마 각시라 부를 수 없다.
그냥 화냥, 들병이, 매소부(買笑婦), 창부(娼婦), 작부(酌婦)와 등치(等値)일 뿐인 것을.

그대 아시는가?
이 땅에서 천연두는 공식적으로 종언(終焉)되었다.
당국은 종균만 보관해둘 뿐 더 이상 우두를 만들지 않는다.
이젠 사람들은 우두를 맞지 않는다.
‘곰보각시’도 사라졌다.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도 찾을 수 없다.

외딴 봉우리,
꾀꼬리 소리만,
악을 쓰며 저홀로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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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10. 10. 16. 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