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pricing

소요유 : 2010. 11. 30. 21:30


오늘 이야기 주제가 많이 떠오른다.
시간이 없으니까 우선 그 중 하나를 꺼내어본다.

어떤 이로부터 이야기 하나를 들었다.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이야기 구조 속에서 무엇인가 생각거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그 이야기를 해보고 싶을 따름이다.

알래스카에서 대구(大口) 대가리를 모아다 한국에 수출하던 미국 사람 하나가 있었다.
(※ 대구 머리라고 하여도 좋을 텐데, 대가리로 들었은즉 들었음에 충실하니 따르고자 한다.)
그가 지금은 쫄딱 망하여 운전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한국 사람이라면 치를 떤다고 한다.

그가 한창 수지를 맞고 있을 때는 대구 대가리를 거저 얻었다고 한다.
현지인은 대구 대가리를 먹지 않고 그냥 버리고 있었기에,
그는 이를 수월이 모아 한국에 수출하여 재미를 짭짤하니 보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한국 대기업이 여기 들러붙어 대구 대가리를 돈을 주고 수집하였고,
미국인을 재끼고 이를 한국에 수출하는 사업을 벌였다.
그러자 그는 차츰 기회를 잃고 이제는 물러나 나앉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이리 결론을 맺는다.
하여간 한국 사람은 어딜 가나 문제를 일으킨다.
저로 인해 대구 대가리 가격은 당연 올랐고,
덕분에 한국 사람들은 예전 보다 훨씬 높은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그러하다면,
그는 시장에 진입장벽을 치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한국사람들을 너무 편애하기 때문일까?

제대로 따지고 보면,
저 한국 상인이 비난 받기 보다는,
저리 심리적 진입 장벽을 치고보는 저 태도야말로 공정하지 못하고 부도덕하다.
최소 우리가 자유시장경제를 인정하는 한에 있어서.

'끼리끼리' 정신이라는 것,
그 폐해를 현대사에서 우리는 늘 목격하고 있지 않던가?
'우리가 남이가?'
'우리끼리 해먹자.'

그의 말씀을 듣자,
나는 순간 pricing, 시장기능 따위의 개념어가 머릿속을 휙 지나간다.
시장이란 무엇인가?
수요와 공급에 따라 형성된 가격에,
파는 이, 사는 이 매매쌍방이 거래를 하는 과정 또는 그 장소를 말한다.
이 경우 가격이 수요, 공급에 따라 적절히 매겨지는 과정을 pricing이라고 한다.

대구 대가리의 경우 미국인은 그 외에 아무도 수요자로서 참가하는 바 없는,
닫혀진 시장에서 운 좋게 거저 얻어왔다.
하지만 이게 외부에 알려지자 신규 수요자가 시장에 진입하였다.
이로서 불충분하나마 시장이라 부를 만한 시장은 열렸고,
비로소 수요자 간 경쟁이 일어났고,
처음으로 대구 대가리에 가격이 매겨지기 시작했다.
이 최초의 pricing은 시장의 탄생을 알리는 서곡인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아니 될 주목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알래스카인인데,
이들은 거저 주어버리던 것을 이젠 돈을 받게 되었다.
누군가 거저 가져가 이익을 내고 있었고,
게다가 이를 소비하는 사람들은 돈을 주고 구입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알래스카인들은 제대로 된 시장이 없었기 때문에 그 동안 대가를 얻는 것으로부터 소외되었었다.

그러한데 한국 대기업이든 상인이든 시장에 새로 뛰어든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간 잃고 있었던 정당한 몫을 찾게 되었다.
그러하다면 저 한국 상인은 시장 형성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도록,
제 역할을 수행한 것이리라 평가해주어야 한다.
물론 그들이 신천지를 개척하여 이문을 내었지만,
최소 無대가의 처지에 놓여 있던 공급자를 구제하여 준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하다면 저 상인들이 이익을 얻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고도 정상적인 시장 기능의 일부로 봐주어야 한다.

그러함에도 왜?
나에게 저 이야기를 들려준 이는,
저 미국인의 한국인을 향한 저주에 수긍을 하며,
한국 상인이 판을 깨서 도리어 한국 사람들은 비싼 값에 대구 대가리를 사먹게 되었다고
혀를 끌끌 차고 있는 것인가?
그는 덧붙인다.
좌우지간 한국 사람들은 문제야!

저 한국 상인이 이문을 얻는 것은 시장 기능을 제대로 작동하게 하였음이니,
보상적 차원에서도 당연히 제 몫을 가져가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대구 대가리를 먹지 않는 사람들임에도,
저 이야기를 듣고는 한국 상인들이 얄밉고 그릇되었다고 동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리란 짐작을 나는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게 우리네 풍토인 것임을.

그런데 말이다.
만약 저 한국 상인이 아니더라도 저런 거저먹을 수 있는 현장을 목격하였다면,
여건만 되면 누구라도 저 안으로 한발이라도 먼저 참입(參入)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이지 않을까?
이리 시장의 진퇴가 제한되지 않고 자유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시장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하에서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고 외려 보호해주어야 할 이상적인 형태가 아닌가?

이 때라서야,
비로소 재화의 정당한 가치가 적절하니 평가되고(evaluation), 가격이 공정하게 매겨지고(pricing),
-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우리가 맛있게 먹는 대구 대가리를 무작정 싸게 사먹으려고 하는 것이나,
현지에서 거저 모아 상당한 폭리를 취했을 저 미국인이야말로 염치가 없는 짓이다. -
시장은 이를 매개로 수요, 공급 양측을 적절하니 효율적으로 만족시키게 된다.
이리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게다가 알래스카인과 한국인을 왜 구분하는가?

피로서가 아니고,
입장으로서 말이다.
어느 날, 어느 조건 하에서 한국인이 알래스카인이 될 수 있고,
반대로 알래스카인이 한국인이 될 수 있다.
시장은 한국인, 알래스카인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에게 공평(公平)을 보장한다.
그러하다면 한국인(입장)을 고집할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한데도,
우리는 왜 모두 집단으로 비합리적인 생각에 쉽게 빠지고 마는 것일까?
나는,
우리는,
한국사람은 왜 예외이어야 하는가?

공적인 훈련이 부족한 것일까?
시야가 협소한 소치(所致)인가?
내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 이의 어법을 빌려 말해본다면,
‘한.국.사.람’이 생각보다 훨씬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것일까?

문제는,
저런 거저먹는 현장을 목격하고도,
고국인 한국 사람들이 앞으로도 내내 싸게 사먹을 수 있도록,
자신만은 저리 뛰어들지 않고 인내하며 점잖을 떨 수 있을까 싶은 것이다.

과연 ‘한.국.사.람’들이.

그러하니,
거창하니 시장 기능 운운할 것도 없이,
소박하니, 최소한의 조건을 생각해본다.

정녕 그대가
저 사태(한국 상인의 시장 참입)를 비난할 수 있으려면,
자신은 저런 상황이라도 절개(?)를 지켜 뛰어들지 않을 것이란 자기 확신 있는가 여부를,
냉정하게 따져보고 하여도 늦지 않으리라.

독점, 과점이 없는 완전경쟁시장은 차치하고라도,
우리는 최소 남의 시장 참입을 비난해도 좋을,
‘세.상.의.구.조’안에 제 존재를 의탁하고 있지 않는 것임을 제대로 인식하여야 한다.
우리가 신봉하기론,
이런 자유경쟁 시장 구조 안에서 시장은 더욱 효율적으로 기능하고,
pricing은 합리적 작동하여 우리 모두 공평(公平)을 보장받는다고 믿고 있지 않은가?
이 때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고 약속하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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