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소요유 : 2010. 12. 19. 17:40


풀방구리를 서울 집에 두고 온지 거반 10여개 월이 지난다.
(※ 참고 글 : ☞ 2010/01/26 - [소요유] - 풀방구리(강아지))
겨울이라 시골에서는 지내기 어렵다.
간만에 서울집에 돌아오니 풀방구리가 나를 반겨 맞는다.
그 동안 처 옆에 꼭 달라붙어 종일 따라다녔다고 하던데,
나를 보자, 처를 언제 보았느냐는 듯 싹 안면을 바꾸고는,
내게 들러붙어 한시도 나를 그냥 놔두지 않는다.
껌딱지 같은 녀석.

밖으로 데리고 나갔더니 이웃 집 진돗개를 향해 크게 짖기까지 한다.
이제껏 소리 한번 변변히 내지 않아 벙어리인가 싶기까지 하였던 녀석이,
기가 살아 아연 위세가 당당하다.

우리 어렸을 적에는 ‘빽’이란 말을 자주 썼다.
허름한 대학 정도면 ‘빽’이 좋을 경우 와이로를 써서 보결(補缺)로,
슬쩍 끼어 들 수도 있었고,
취직도 ‘빽’이 좋아야 수월하니 얻어 가질 수 있었다.
실제 집에 가까이 있었던 x, y대는 지금은 서울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언필칭 명문대라고 일컬어지지만 당시엔 빽과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뒷구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주변에 비비작 거리며 올라탈 ‘선(線)’을 잘 확보하고 있어야,
요령부리며 난세를 헤집고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하기에 집안에 이렇다 할 ‘빽’이 없으면,
머리채라도 잘라 팔아 빽줄을 돈으로 사야했다.
‘빽’이 좋으면 반 푼이라도 어깨에 힘을 주고,
고개를 곧추세우고 다니곤 했다.

풀방구리 녀석은 내가 천군만마 든든한 ‘빽줄’로 여겨졌는가 보다.
사람이 아니니까 봐주지만,
이건 영 꼴상 사납다.

불교에선 삼보(三寶)라 하여 불법승(佛法僧)을 든다.
통도사(通度寺)는 불보(佛寶),
해인사(海印寺)는 법보(法寶),
송광사(松廣寺)는 승보(僧寶) 사찰이라 하여 굴지(屈指)하여 3대(三大)를 셈하곤 한다.
범어사(梵魚寺)는 선찰대본사(禪刹大本山)라 하여 4대(四大)로 넓혀 껴 넣고는 한다.

얼마 전, 이 범어사에 사천왕을 모시고 있던 천왕문(天王門)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불법승 3대 사찰이든 선찰대본사(禪刹大本山)이든 ,
그 무엇이 되었든 범어사는 불교를 대표하는 위격을 가진 사찰이다.
여기 누군가 방화를 하였다면,
분명 불교라는 종교에 반기를 든 자의 소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방화범이 누구인지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범어사 주지 스님은 이리 말하고 있다.
“방화 일주일 전 특정 종교인이 범어사에 나타나 "불교 믿으면 지옥 간다"고 설법을 방해한 사실이 있다고 밝히며 이교도에 의한 방화 가능성을 의심했다.”
(* 참고 기사 :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70233)
게다가 그간 절을 비방하고 소리를 지르는 예가 한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세간엔 천왕문 방화가 기독교도의 소행이 아닌가 의심을 하는 이가 적지 않다.
보통 사람들은 종교 유무, 종교 이동(異同)을 떠나 사천왕상을 대하면,
두렵고 마음이 떨려 함부로 대할 염(念)이 생기지 않는다.
(※ 참고 글 : ☞ 2008/02/29 - [소요유/묵은 글] - 사천왕)
그러하니 "불교 믿으면 지옥 간다"라는 광신적 믿음을 가진 이가 아니라면,
감히 불을 지를 염량이 없을 터.

이명박 정권에 들어와,
불교인들은 이모저모 곤욕(困辱)을 치루고 있다.
국토부, 교육부, 서울시 등의 지도에 유명 사찰이 누락된다든가,
지관의 승용차 과잉 검문검색,
기독교인의 봉은사, 동화사 땅밟기,
유명 사찰 무너지라는 기도 ...
이런 유치한 이야기들이 줄줄 새어나오고 있다.
오만과 독선에 빠진 광신적 믿음의 폐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순간 기독교인들이 ‘빽’을 의식하고 있지 않은가 싶은 것이다.
서울시까지 봉헌하려했던 이라면,
대한민국인들 봉헌하지 못할까나?
그런 천하의 막강한 ‘빽’을 두고 무슨 짓인들 못하랴?
마치 우리 풀방구리가 나를 믿듯이.

그런데 우리 풀방구리는 귀엽기나 하지,
남의 사찰에 불이나 지른다면 이는 얼마나 흉한가?

막스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주의가 자본주의에 친화적이라고 말한다.
금욕, 절약, 검소 내지는 신의 소명(calling)이 자본 축적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했다.
기독교인들이 만약 금욕, 절약 그 자체의 윤리적 가치까지는 몰라도,
거꾸로 되돌아서서 자본축적의 결과를 곧 신의 소명에 부응하는 것으로 해석하게 되면,
외려 욕망의 폭주 기관차를 내몰게 된다.
이 때 불현듯 본말이 전도되게 된다.

그래서 그런가?
작금의 기독교는 적나라하게 이를 실증하고 있다.
헌금만 하여도 수십 가지가 넘는다 하지 않던가?
헌금을 많이 하면 한 만큼 부자 되게 만들어 주신다,
믿는 만큼, 헌금한 만큼 부자가 된다.

그러하다면,
부자가 되지 못하는 것은 소명에 부응하지 못하는 일이 되고 만다.
이젠 금욕이 아니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욕망에 불을 질러야 한다.
이리 들어선 길목에,
‘사찰이 모두 무너지게 하소서’ 하는 기도가 등장하고,
사천왕문이 불타는 폭거가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게 어찌 기독교인들만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으랴.
목자(牧者), 목사(牧師)라는 게,
양으로 비유되는 신자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양치는 사람이란 뜻이 아니던가?
그러하다면 정작 잘못은 양이 아니라 양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고,
사목(司牧)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목사들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교단 차원에서 참회대회라도 열어야 하지 않을까?
신앙 간증이니, 성령부흥회가 급한 것이 아니다.
우선은 사타구니를 비집고 나온 벌건 수치를 가리는 것이 급선무다.

‘불타게 하소서.’
나는 이 말을 들으면 이내 갈애(渴愛)가 떠오른다.
타는 듯 멈출 줄 모르는 애욕.
열반(涅槃)은 원래 Nir(消) + vana(吹)란 뜻이다.
불붙는 갈애를 불어 꺼 다 사라진 상태를 이른다.

천국에 들려면,
사찰을 태울 게 아니라,
정작은 그대의 욕망을 잠재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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