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무식한 것은 죄다.

소요유 : 2011. 3. 8. 17:43


전일 글을 썼는데, 미쳐 저장이 되지 않았는지 모두 지워져버렸다.
이제 다시 쓰자니 쉬이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도 내게 일어났던 생각들이니,
그 단편들을 간단히 추려 남겨두는 것이 예의겠다 싶다. 내게.

아래 본문에 등장하는 판잣집,
그 집에 늘어나던 강아지들이 기어코 새끼만 남겨두고 다 하늘가로 사라졌다.
이 이야기도 남겨두었는데 이것마저 없어졌다.

동네 개농장 하는 이가 동네 개를 가져가는데,
듣건대 한 마리에 10여만 원 하는가 보다.
매번 동네 음식점 돌며 잔반 얻는 수고며,
나름 돌본다고 돌보는 시늉이라도 하려 해도,
얼추 지불해야 할 노고가 적지 아니 든다 할 터.
그래 그것 벌자고 저 가여운 동물들을 저리 모진 고통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음인가?
참으로 모질고 어리석은 인심이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을 기약하고 쓰레기 부분만 얼추 추려 새로 적어본다.

***

나는 쓰레기 투기를 혐오한다.

게다가 여기 시골생활 중에서 가장 못 마땅한 것 중에 하나가 시도 때도 없이 쓰레기 태우는 냄새다.
나는 서울에선 북한산 자락에 산다.
처에게 가끔 이야기 한다.
“이만 하면 설악산 부럽지 않다.”
공기가 맑고 시원하여 가슴도 확 트인다.
북한산으로부터 신선한 공기가 마을 안으로 펑펑 쏟아져 흘러든다.
지인 중의 하나는 북한산을 천국에 이르는 문이라고 말한다.
북한산 등산을 즐기는 그는 여기 북한산 관문에 들면 천국과 다름없다고 내게 이른다.

그러함이니,
시골 공기가 서울보다 더 답답하게 느껴질 때면,
쓰레기 태우는 작자들에게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저 패대기를 치고 싶다.
요즘 같이 정보가 막힘없이 잘 전달되고,
의식이 깨어 있던 때가 역사상 언제 있었던가?
비닐 따위를 태우면 환경호르몬이 나오고, 토양, 공기를 더렵히며,
지구 온난화를 가속시킨다는 것은 초등학생이라도 다 아는 사실이다.
이 뻔한 사실이 아니더라도 비닐 따위는 모아두었다 대문 앞에 놓아두면,
거저 수거해 가는 세상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한데도 일반 생활 쓰레기는 물론 비닐 따위까지,
주저 없이 함께 태워버리는 저들은 필경 출신이 하천배(下賤輩)라,
피의 내력이 필시 ‘상것’임이 일점 하나도 틀림없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도로 좌측편이 언덕받이가 우리밭이다.
   도로와 밭 사이는 도랑이 파져 있는데 그리로 오가는 자들이 쓰레기를 투척하고는 사라진다.
   길을 왼쪽으로 감아들어 나타나는, 사진 오른쪽 끝 푸른 지붕이 문제의 판잣집이다.)

전일 시골에 갔다.
겨우내 밭 주변 도로가에 버려진 쓰레기를 치웠다.
밭 일부를 남에게 빌려주고 작년에 회수하고 나서,
그가 방치한 비닐조각을 수거하느라 근 보름이상을 땅을 기어 다니다시피 하였다.
그러함에도 당사자에게 일언반구 불평 한 마디 아니 하였다.
밭 주변 도랑에 버려진 쓰레기를 꼬박 1년 내내 치우면서도,
밭 앞에 있는 판잣집 주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도랑 앞 쓰레기 투기의 반 수 이상 책임이 있고도 남음이 있다.
물론 오가는 행객이 버리기도 하겠지만,
판잣집을 멀리 빗겨간 곳보다도 이 집 앞에는 늘상 쓰레기가 더 많이 버려져 있다.
아무려면 오가며 차량 밖으로 쓰레기를 투척한다 하여도,
남의 집 앞 근처에선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그 집 앞의 간이 철공작소는 사시장철 내내 열려져 작업을 하기에,
사람에게 노출되어 함부로 버리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리 묵묵히 내 할 일을 하였다.
그들이 염치를 갖고 있다면,
내 모습을 보고 이제부터라도 삼가는 미덕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도 하였으나,
실인즉 그 보다는 나는 내 행을 통해 자족함을 느끼고 있을 뿐,
내 자존을 지키기 위한 의식(儀禮) 이상을 그리 넘지는 않았던 게다.

1년이 지나고 해를 넘기고 있지만,
그리고 내가 수시로 치우고 있는 형편인데도,
그 집 앞 도랑은 여전히 더럽다.
기실 우리 밭은 높아 언덕을 이루고 있음이니,
내가 아래로 버리면 외려 나를 탓하여야 할 입장이다.
그 집 대문 앞이 그리 지저분하다면 불편한 것은 내가 아니고 그들이다.
모질게 마음먹고 모른 척 지내면 답답한 것은 그들인 것이다.
그러하지만 저들에겐 그게 대수가 아닌가 보다.
도랑은 물론 말 그대로 손바닥만하니 일군 그 집 대문 옆 밭도 쓰레기로 덮여있기 일쑤다.
거기에 저이들은 여름이면 고추를 심고 따먹는다.
나라면 거저 주어도 아니 먹을 텐데도,
저리 쓰레기 밭에 먹거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저 무신경이라니,
딱하기를 넘어 거의 경이롭다.

작음을 비웃는 게 아니다.
조막손만한 밭도 저리 건사를 못하는 인심이 안타까운 것이다.
저런 의식 속에서 어찌 진실됨이 싹 틀 수 있겠음인가?

내가 전일 쓰레기를 한참 치우고 일부를 우선 거두어들이다가,
공교롭게 그 집 철공소를 빌어 겨우내 일을 하고 있던 이를 만났다.
아마도 그는 공작일을 할 만한 장소를 마련치 못하여 이리 그 집 신세를 지는 양 싶다.
그와는 면식이 있다.
마침 집 주인은 모두 없는 눈치이고,
한가하니 여유로운 오후라,
마음이 엷어져 1년간 닫아두었던 입을 열어 모처럼 한 마디 하였다.
역시나 이게 문제였다.

“아저씨 혹시 담배 꽁초 같은 것, 이 도랑으로 버리시면 아니 됩니다.”

“저는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다행입니다. 치워도 치워도 쓰레기가 끝이 없습니다.”

“세상은 둥글게 둥글게 사세요.
그렇지 않으면 오래 살지 못합니다.
그냥 놔두세요.”

“내가 일 년 내내 주어내고,
방금도 이리 주어냈는데,
줍지 않으면 여기가 쓰레기 밭이 되지 않겠는지요?”

“아무리 성인이라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산다고 할 수는 없지요.
쓰레기 버린다고 탓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세요.”

아차, 싶다.

나의 평소의 지론은,
무식한 사람하고는 가벼이 논의의 장을 함께 마련치 않는다는 것이다.

“무식은 죄다.”

아니 무식한 것이 죄가 아니라,
무식한데도 편협한 아집에 매몰되어,
바른 견해를 외면하고 제 고집을 고치려 하지 않는 것이 죄다.
물론 다 그러하지는 않겠지만,
보통 무식하면 소견이 협착되어 매사 자기 합리화에 바쁘다.
배움이 짧은즉 이리 아집에 기대어 흔들리는 중심을 잡아매두고는,
현기증 나는 세상을 건너고 있음이리라.

자신이 가진 노(櫓)가 작고, 삿대(篙)가 짧으면,
식견이 있는 자의 배를 빌려 신세를 지거나,
배움을 익혀 노와 삿대를 새로 개비(改備)할 궁리를 터야 한다.
하지만 무식한 것이 죄라,
그럴 염량조차 트지 못하고,
우선은 믿기 쉬운 게 알량하나마 자신밖에 없음이라,
짧고 앙상한 자신의 무릎에 제 안겨 어리광을 피우고 만다.
일편 두렵고, 일편으론 불쌍한 노릇이다.

저자는 성인을 팔아,
자신을 구하고 있음이다.
자존심은 있어 주제에 성인씩이나 동원하며,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고 있음이 아닌가 말이다.

쓰레기 버리지 않는 것이 무엇이 어려운 일이기에,
성인도 잘못을 저지를 정도로 지키기 어려운 일에 합류(?)를 시키는가?
이쯤이면 아무리 무식한 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사뭇 비열하다.

이것은 둥글게 사는 것이 아니라,
천박하게 사는 것이다.
미련한 짓인 게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를 보더니만 그자는 코를 쥐어싸며 못 참겠다고 한다.
왜 그러냐니까,
개집을 가리킨다.
추울 때는 몰랐는데 날이 풀리니 개똥 냄새가 말이 아니란다.
해서 개집을 주르르 늘여놓은 철망 안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한다.
그곳을 쳐다보니 내가 알던 강아지들은  모두 처분이 되었고 새끼들만 남아 있다.
그리고는 여기저기 똥들이 무더기 산을 이루고 있다.

제 코는 왜 쥐어싸는가?
내버려두고 둥글게 둥글게 살아가지 않고는.
둥글게 살려면 제 코도 그리 맞추어 더럽게 싸구려로 적응해야 한다.
어디 감히 고상한 흉내를 내려 함인가?

자신은 성인이 아니기에,
큰일은 따라 하기 어렵다한들,
범인이기에 쓰레기 버리지 않는 작은 일은 지키고 살 수 있음이 아니겠는가?
이런 작은 일도 지키지 못하고 산다면,
그 인생은 얼마나 누추하고 처량한가?
정녕 이야말로 둥글지 못하고 이지러진 삶의 모습이 아니런가?

그러함인데,
이 작자는 도리어 작은 일도 지키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지는 못할망정,
성인의 이름을 더럽히며 자신의 구차함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함이니 나는 단호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흔히 이해하듯 예의를 안다는 것이 아니다.
수오지심 의지단(羞惡之心 義之端)이라 하지 않았던가?
마땅함.
마땅하지 않은 일에 부끄러움을 느낌이 곧 의(義)이다.
부끄러움이 없으면 의롭지도 못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라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치들이 십중팔구 친일파가 되며,
일상에선 의(義)를 저버리고 이(利)를 쫓는 정상(政商) 모리배(謀利輩)가 된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의(義)를 모르게 되며,
의(義)를 모르면, 배움을 꾀하지 않는다.
배움을 꾀하지 않으니 무식한 것이며,
그저 명줄 이어 사는데 갈급(渴急)하여,
제 사리(私利)를 도모하는데만 바쁘게 된다.
그러하니 천하에 두루 죄를 짓게 된다.
때문에 나는 말한다.

“무식한 것은 죄다.”

내가 쓰레기 투척에 분노하는 것은,
저자 말대로 둥글지 않고,
모질기 때문이 아니고,
실인즉 사회적인 분노요, 성인의 가르침을 따르는 훈도가 아니겠는가?

물론 나 역시 무식할 때가 많다.
다만 그렇기에 나는 언제나 배우려고 애를 쓴다.

진(秦)나라 상앙(商鞅)의 변법(變法) 중 내가 잊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棄灰於道,以惰農論
길에다 함부로 재를 버리면,
농사일을 게을리 한 죄로 묻겠다.

그 머나먼 시절에도,
이리 엄하니 단속을 하였음이다.
상앙류의 법가는 실로 부국강병으로 가는 밑바탕인 것이니,
비록 그의 변법은 기득권 귀족층의 반발로 실패하였지만,
실제 진나라 천하통일의 길은 이들 법가의 중용(重用)으로부터 닦여나갔던 것이다.
무식한 자들은 역시나 외적 규율을 스스로 불러들일 수밖에 없음이다.

“형(形)은 사대부(士大夫)에 올라가지 않고, 예(禮)는 서민에게 내려가지 않는다.”

이 말은 무식하면 사람 취급하지 않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교양인이 아니라면 아예 예(禮)를 묻지 않겠다는 말이다.
예(禮)는 인간적 도리이자 간단히 말하면 사회적 규범인 것이다.
참으로 끔찍한 말이다.
하지만 정신이 번쩍 드는 무서운 말이기도 하다.
왜 그런가?
이즈음은 개명천지라 세상이 참 좋아지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젠 아무리 무식하더라도 사람대접을 해준다.
하지만 사람대접을 받는 이상,
사람 노릇을 해야 한다.
그러함이니 누구라도 예(禮)를 지켜야 한다.
만약 예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저 형벌(形)로 다스려야 할 객체일 뿐인 것을.
주체가 아님이니 이게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는가?

이 작자가 이 이치를 알기나 알까?

그가 세상을 둥글게 산다는 것이
아주 대단한 인생관이요, 철학이라고 느끼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는 형(形)의 뇌옥(牢獄)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음인 게라,
감히 접고 굽은 발로 까치발을 서며,
어찌 사대부가 노니는 누각(樓閣)을 엿보려 함인가?
참람스럽다.

진실로 말하거니와,
그 자가 아니고,
나는 무식함 그 자체에 분노한다.

“무식한 것은 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가 전일 주은 쓰레기다.
한 번에 다 치우지 못하여,
손수레를 가지고 가서 거두어 왔다.
핏자 케이스 따위의 지함(紙函)류는 별도로 이미 치운 것인데도 저리 많다.
이러함인데 저 짓을 내가 일 년 내내 수시로 하였다.
만약 그냥 내버려두면 수년 내에 쓰레기가 뫼산이 되고,
침출수가 못을 이루지 않을쏜가?

실제 저 판잣집에서 우리 밭 두둑가에 버린 폐가구는 산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가 농사를 짓겠다고 하니 그나마 제밭인 양 함부로 버려놓은 것들을 얼추 치우고 난 후였는데도,
나머지가 흙에 박혀 내가 그것들을 파내는데 제법 고생을 하였었다.
이러함인데,
그러고도 둥글게 사는 것이며,
오래도록 장수하는 도리를 게서 찾을 셈인가?
까마득히 갈길이 먼, 아득한 인생들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판잣집에서 버린 폐가구를 내가 캐낸 자리로서, 토양 유실을 막기 위해 임시로 천막을 덮어두었다.
   도로 건너 맞은 편에 예의 판잣집이 있다.)


“형(形)은 사대부(士大夫)에 올라가지 않고, 예(禮)는 서민에게 내려가지 않는다.”
(※ 참고 글 : ☞ 2008/06/27 - [소요유] - 富와 貴)

이 말은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 oblige)에 가닿는다.
모두들 nobless이기 때문에 oblige인 것으로 오독들을 하는데,
실인즉 oblige이기 때문에 nobless인 것이다.
사대부이기 때문에 예(禮)를 지켜야 하는 게 아니라,
기실은 예(禮)를 지키기에 사대부가 된다.

세상이 참으로 좋아지지 않았는가?
피가 귀(貴)하기에 사대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禮)만 잘 지키면 모두 다 사대부 즉 사람 대접해주겠다는 세상인 게다.

쓰레기 같은 작자임이라.
둥글게 사는 것이 아니라 더럽게 사는 것임이랴.
그러고 보니 저 작자가 오늘 성인을 욕보이더니만,
감히 둥글음도 능욕하고 있음이구나.

“方한즉 정(正)하다.”
(※ 참고 글 : ☞ 2008/07/05 - [소요유] - 방(方)과 원(圓))

나의 예전 이 글을 덧새기며 오늘 이야기를 마친다.


'소요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종권(迷蹤拳)  (0) 2011.03.28
심술(心術)  (0) 2011.03.21
개골창의 연등  (0) 2011.03.08
자비종(慈悲種), 자비종(慈悲鐘)  (6) 2011.02.15
소 뱃바닥의 두 글자  (0) 2011.02.13
동장군  (2) 2011.01.20
Bongta LicenseBongta Stock License bottomtop
이 저작물은 봉타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행위에 제한을 받습니다.
소요유 : 2011. 3. 8. 17: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