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독안(獨眼)

소요유 : 2011. 8. 3. 17:38


나는 13/4 안광(眼光)으로 지낸다.
2001년 녹내장 판정을 받았다.
녹내장은 시신경이 죽는 병이다.

나는 왼쪽 눈 시신경이 대략 1/4쯤 죽어 있다.
시신경은 한번 죽으면 재생불능이다.
치료책이 없다.
다만 더 이상 추발(追發)되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 이상 묘책이 없다.
안압(眼壓)을 낮추는 것이 그나마 남은 득책(得策)인데,
평생 이를 위해 안약을 넣어주어야 한다.

이게 여간 성가스러운 게 아니다.
다행이 과도한 약해(藥害)는 없는 것 같다.
다만, 누도(淚道)를 막아 때로 눈물이 안와(眼窩) 밖으로 흐른다든가,
안정(眼睛) 색이 변한다든가 하는 부작용이 있지만,
이 또한 그저 그려러니 넘기면 그 뿐이다.
누천년 더 살 것도 아니고 내가 그예 살면 얼마나 더 살려고.

그간 나는 10여 년 동안 oo대 안과를 다녔는데,
더 이상 병은 진행되지 않고 멈추었고,
처방 약제는 하나도 변함이 없다.
다만, 매년 검사비와 진료비는 거침없이 오른다.

의사는 내 눈에 아무 이상 없다고 하면서도,
무슨 최신 장비를 들여놓았다 하여 새로운 검사를 요구한다.
거기는 한국에서 제일 큰 대학병원인데,
공익 요원이 번을 서기도 하고,
자원봉사 일꾼도 간간 눈에 띈다.
환자들도 들들 끓듯 여간 많은 것이 아니다.
그러함에도 적자라고 하니,
도대체 이게 무슨 요지경인지 나는 모르겠다.

이 자들은 면허 하나로,
시장에서 거의 독점적 배타적 경쟁 지위를 확보한다.
나는 이들이 남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 때문에 가외의 추가 소득을 얻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게 외양 거죽으로는 문면상(文面上) 합법적이지만,
속알을 헤집으면 합리적이지도 않고 덕(德)에 계합(契合)되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여기 연천군에 들어와서,
서울까지 가기 번거로워 최근 적당한 곳을 물색하여 새로운 처방을 받았다.
그런데 이게 부작용을 일으켜 동태눈깔로 충혈이 되었다.
뭐 약을 바꾸면 되니까 참고 있는데,
사나흘 되니까 비로소 회복이 되고 있다.

별로 아름다운 이야기도 되지 못하는데,
나는 이 이야기를 왜 꺼내는가?
독안(獨眼)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개는 양안(兩眼) 전안(全眼)으로 살아가지만,
총을 쏜다든가,
무엇인가 겨눌 때는 한쪽 눈을 감고,
나머지 하나로 목표를 겨냥한다.

왜 그러하여야 하는가?
가령, 총이 가늠자, 가늠쇠가 확보한 광로(光路)의 직진성(直進性)에 기대어,
달려나갈 총탄이 그리는 포물선(抛物線)의 사로(射路)를 기획한다고 할 때,
사수(射手)는 외눈(獨眼)으로 가늠자, 가늠쇠와 함께 삼점(三點)의 선상에 서서,
마지막 탄착점(彈着點)에 놓인 타켓의 추혼탈명(追魂奪命)을 기약한다.
빛의 덕성에 기대어,
남의 명을 빼앗고자 한다.
독안으로써.

과녁의 가운데를 맞추는 것을 관중(貫中) 또는 적중(的中)이라 하는데,
이때는 도리 없이 독안(獨眼)이 되어야 한다.

광로(光路) 상에 두 개 이상의 측정 지점이 있을 때라야,
비로소 빛의 직진성을 최소한으로 가늠해 볼 수 있다.
총의 경우,
우리는 가늠자, 가늠쇠로 확보된 빛의 직진성에,
우리의 독안을 더하여 삼점으로 더욱 그 확실성을 죄여간다.
만약 양안을 쓰고자 한다면,
가늠자, 가늠쇠 역시 한 벌 더 채비하여 쌍으로 준비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경제적인 측면이라든가, 힘의 절약 측면 등의,
구체적 실천 현실의 여러 제한 등을 고려할 때,
현실적인 최적 대안은 아니다.
(쌍안경 같은 경우엔 좌우 두벌의 렌즈를 마련하여,
우리의 두 눈을 모두 활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반면, 외부 도움 없이 우리 신체가 안근(眼根)을 작동해 안경(眼境)을 대(對)할 때는,
양안(兩眼)이 필요하다.
이 때 좌우 눈은 좌우가 서로 보조하여,
광학적 초점을 완성한다.

서로 떨어진 두 지점에서 한 곳을 쏴볼 때라야,
그 곳에 놓여진 물체의 거리와 2차원적인 실체성이 드러난다.
이 때 두 지점, 예하건대 우리의 양 눈은 부단히 좌우, 상하로 미동(微動)하면서,
타겟의 2차원적 평면적 지각에 갇힌 인식 지평을,
3차원적 입체적인 모습으로 확대 조형(造型)해나간다.
여기 피드백(feedback)의 원리가 가해지면,
우리는 타겟을 보다 정밀하게 파지(把持), 통제(統制)할 수 있게 된다.
(※ 참고 글 : ☞ 2008/02/13 - [소요유/묵은 글] - feedback(피드백))

하지만, 외부의 단선광로(單線光路) 기구를 이용할 때,
우리는 외눈이 되어야 한다.
이 때라야 광학적 동심(同心)의 궤로(軌路)에 나와 사물이 함께 놓여.
비로소 타켓을 올바르게 겨냥하게 된다.

그러하기에 때로 독안(獨眼)은,
안과 밖을 잇기 위한,
쿵푸(工夫)의 초식(招式)과 같은 것.
불편을 무릅쓰고 눈을 찡그림으로서,
나를 초월하여 기어이 저 자를 내게 꿇린다.

양안(兩眼)이나 독안(獨眼)이나 실인즉,
외부의 광학적 현실에 놓인 우리 신체가
반응하는 동일한 원리 복속적 적응 형식이다.

양안은 우리 신체 자체만으로,
독안은 외부 사물(단선광로)과 함께 현실을 인식할 때,
이런 형식을 빌어야 안근(眼根)은 바른 안식(眼識)에 이른다.

그런데,
우리네 현실에선 독안을 꺼린다.
외눈박이 현실 인식이라든가,
짝눈 보기라 하여,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자를 우리는 이를 빌어 나무란다.

이게 물론 양안이어야 할 때,
독안으로 사물을 쳐다봄을 경계하는 말이로되,
마침 겪은 이야기 하나를 풀어내본다.

여기 내가 머무르고 있는 전곡,
우리 농원에 들어오려면 주택가가 몰려 있는 곳을 거쳐야 한다.
도로변 양쪽에 차들이 주차하여 있기에 오가는 차량이 마주칠 양이면,
차들은 멈춰서 상대 차량을 보내야 지날 수 있다.

내가 여기 사는 이 하나하고 얼마 전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 xx 아파트라고 있는데,
저 치들을 자신은 사람으로 취급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 그러한가 하니,
저들이 자신들의 아파트 내 주차장에 주차하지 않고,
도로변에 그냥 주차하고 집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여기 도로가 외길 주차가 아니고 쌍길 주차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도로변 주차시 외길로 주차가 되어 있으면,
불편한대로 그런대로 피하여 다닐 수도 있다 하지만,
양쪽에 주차되어 있으면 저들을 피하느라고,
주행시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저 불평을 하고 있는 이는 도로변에 주차를 하며 살고 있다.
자신의 집에 주차 공간이 없기에 도로 변에 주차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다면 저 아파트 주민들이 양길 주차의 주범이고,
자신은 외길 주차만 하고 있는 선량한 사람인가?

외길 주차 따로 있고, 쌍길 주차가 따로 있는가?
외길 주차가 있기에 넘쳐나면 비로소 쌍길 주차가 되는 것.
만약 xx 아파트 주민 입장에선,
먼저 외길 주차하는 이가 없다면,
그들 역시 외길 주차하는 조금은 선량한 이가 되었을 터.

선, 후가 어디에 있는가?
그 동네에 살고 있지 않는 과객(過客) 입장에선,
외길 주차이든, 쌍길 주차이든 모두들 한결같이 불량한 이에 불과한 것임이라.
저들은 제 땅 아껴 주차할 곳을 마련하지 않고,
외부의 공용 도로를 무단히 점용 사용하고 있다.
이게 대도시뿐이 아니라,
공터가 여유 있는 여기 중소도시에서도 번연히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왜 공용 자산은 부단히 침탈되는 게 마땅한 현실이 되었는가?

여기,
기사 하나를 끌어둔다.

☞ 자전거狂 빌뉴스 시장, 자전거도로에 불법주차한 벤츠 차량 탱크로 깔아뭉개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의 아투라스 주오카스 시장이 탱크에 올라타 자전거 전용도로에 불법주차한 차량을 깔아뭉개 화제가 되고 있다고 영국 BBC 방송이 2일 보도했다. 자전거광으로 알려진 주오카스 시장은 이날 빌뉴스시 웹사이트에 자신이 탱크로 불법주차된 벤츠 차량을 깔아뭉개는 사진을 올리고 '불법주차를 하면 이렇게 된다'고 경고했다.

<저작권자ⓒ '한국언론 뉴스허브'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이이가 자전거 도로 팔며 삽질로 지새우는 이명박씨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아마도 삽질로 밑을 파내어 운하 속으로 영원히 떠내려보냈을 것이다.

평소 성질 한번 부리지 않고,
자가용 차량 가진 바 없는 지인 하나가 있다.
같이 걷다가 인도에 무단 주차된 차를 보더니만,
내게 말한다.

“오 함머 가져다 저것 모두 부셔버리고 싶어요.”

나보다는 한결 나은 멀쩡한 인사인줄 알았더니,
저이도 나처럼 때론 한참 타오른다.

***

그래,
다만,
우리는 모두 독안아(獨眼兒)임이라,
너만 그르고 나는 선량한 이일뿐인 것임이랴?

이를 선가(禪家)에서는 담판한(擔板漢)이라고 한다.
외쪽 어깨에 판자대기 얹고 걸으면 한쪽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자는 이게 온 세상 다인줄 안다.
제만 옳고 세상이 모든 그르다고 여긴다.

내가 사물을 볼 때,
총, scope 따위로 외부 단선광로(單線光路) 기구를 이용할 때는,
독안(獨眼)이 되어야 하지만,
인식 주체가 되어 사물을 제대로 변별하고자 할 때는,
양안(兩眼)의 온전한 안근(眼根)에 의지하여야 하는 것.

그러하니 외눈박이 독안(獨眼)이 무작정 나쁜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들이 때와 자리를 모르고 있을 뿐임이라.

독안이 필요할 때 독안이,
양안이 소용될 땐 양안이 되어야 하는 것임인데,
독안이어야 하는데 양안이 되면 과녁을 설 맞추고,
양안이 되어야 할 때 독안이 되면 독선(獨善), 독단(獨斷), 독전(獨專)이 된다.

과연 그대는 독안이어든가?
양안이더든가?

13/4의 안력(眼力).
나는 과연 독안이라 불러야 하는가,
양안이라 불리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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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11. 8. 3. 17: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