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재(灰)

소요유 : 2011. 10. 3. 18:37


내가 오늘 밭일을 마치고,
농원 정문 앞으로 와보니 차가 유난히 더러워져 보인다.
다가가 보니 하얀 차가 얼룩말처럼 검정이 군데군데 묻어 있다.
이게 무엇인가 자세히 살펴보니 검댕이 즉 재였다.

필경 이웃이 쓰레기를 태웠을 것이다.
쓰레기봉투 하나 없이 사는 저들.
여기 시골에 와서 감당 못할 것 중의 하나가 시도 때도 없이 태우는 쓰레기 냄새다.
그런데 오늘은 재까지 날아와 차를 얼룩말로 만든 것이다.
왈칵 부아가 솟는다.

짐작되는 집으로 찾아갔더니 집주인은 출타중이다.
내가 카메라를 들고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가 현장을 찍어 보았다.

(비닐 따위는 모아 내놓으면 거저 치워간다. 저것은 무지인가 아니면 폭력인가?
게다가 저 발암물질 스레트만 보면 치가 떨린다.
농가마다 저게 예사롭게 너브러져 있다.
저것은 상황 한계를 한참 벗어나, 군(郡) 차원에서 행정력으로 해결 방안을 찾기를 바라는데 ...
이 또한 연목구어(緣木求魚)라.
어즈버 우리네 삶은 현실이 아니라 그저 혼몽(昏懜)하니 헤매는 꿈결인 게라.
여기 시골은 현재 무지, 무책임, 넝마의 판타지아가 들판을 소리물결 무늬져 나간다.
아득한 농촌.
그러기에 일방적으로 UR, FTA ...
당하고, 찢기고, 울부짖고 ...
그 뿐인 것을.
도대체가 자존심이 없다.
최소 굶어 죽어도 곁불은 쐬지 않겠다는,
하나의 인간.
그 인간적인 최소한의 자존심 말이다.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이 없는 사람을 일러 자존심이 없다고 한다.
하기에 바람을, 산과 들을, 강을 그리고 이웃을 아무런 문제 의식없이 간단없이 침탈하고 욕보인다.
하기에 나는 서슴없이 이리 말하곤 하는 게다.
무지는 곧 죄에 다름 아니다.

아닌가?
목숨이 자존심보다 더 중요한 삶의 애끓는 그 경로를 기억해야 하는가?

이 신산고초(辛酸苦楚)의 자취를 안타까와 하여야 하는가?
나는 더 찾아보아야 하겠다.
아직 아지 못하는 게 더 있을지 모르니 조금 더 겸손해야 하는가?
하찮은 쓰레기봉투 그 값의 무게만으로는 결코 칭량할 수 없는,
그들에겐 더 넘치고 무거운 삶의 질곡이 있을 터.
나는 더 견디어 보아야 하나?

그런데 나는 갑자기 현 정권의 4대강 유린.
바로 이 편취, 패악, 파렴치, 욕정을 떠올린다.
삶은 절제할 수 없는 제 욕망의 외부를 향한 투사(投射), 핑계인 것임이라.
환경 파괴, 오염, 타자의 삶 유린 ...
이게 대수가 아니라,
내 편의(便宜), 재부(財富)가 더 앞서는 것임인가?
하기사, 위정자나 민초나 모두 자신 안에 갇힌,
어둠의 미아들이라면 새삼 저들에게 더 이상 무엇을 구하랴?)

여기 시골 촌부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라.
저 쓰레기 현장 바로 옆에 자신이 쉬고 잠자는 집이 있다.
그리고 은행나무, 밤나무가 곁에서 자라고 있다.
저 쓰레기더미를 지나 스민 물을 먹고 크는 저들 나무인들 고초가 없을까?
그래도 가을이 되면 저들은 붉고, 노란 열매를 지상으로 내려놓는다.
은행알, 밤톨 안엔 아마도 고통, 아픔의 기억이 붉게 남겨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것은 실인즉 인간 죄의 흔적일 따름인 것을.
허니, 저것을 주어먹는 사람인들,
어찌 몸인들 성할 것이며 정신이 발라질 수 있으랴?

저것 외에 집 마당 안으로 들어오는 입구에도 또 하나의 노천 쓰레기 소각장이 있다.
아니 따로 소각장이 어디 있단 말인가?
마음 내키는 곳 아무데나 태우는 곳이 바로 그곳이 소각장이지.

우리가 흔히 더러운 것에 빗대어 돼지우릿간이라고 한다.
웃기는 이야기다.
우리에 가둬놓으면 돼지 아냐 사람인들,
똥을 싸고 쓰레기 버리고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지 않을 도리가 있으랴?
실인즉 돼지처럼 깨끗한 동물이 없다고 한다.

개장수들은 똥치기 싫어,
개들을 뜬장이라는 쇠그물 위에 얹어놓고 아래로 똥이 자동으로 떨어지게 만든다.
저들 개들은 그래서 발톱이 휘고, 발바닥이 갈라져 평생을 그리 지낸다.
저들이 저곳을 벗어나는 유일한 희망의 끈은,
개백정 손에 의해 쇠망치로 머리를 맞고 저승으로 가는 날 맺어진다.
아시는가?
들리는가?
보신탕 집에 앉아 입맛을 다시는 그대 앞에,
저 축축하니 전해지는 천년 슬픔, 고통의 절규를.

인간에 의해 우리에 갇힌 저들을 탓할 일이 아니다.
우리에 갇히지도 않은 인간이 제가 사는 집 바로 코앞에 저리 패악질을 하고 사는데,
그 어떤 작자가 돼지우릿간을 빗대 더러움을 나무라는가?
당신이야말로 더러움의 총화, 패악질의 원흉, 어리석음의 상징, 지탄의 적이 아닌가?

내가 여기 연천군청에도 글로 고정하고,
읍사무소에도 쓰레기 담당자와 직접 면담도 하였지만,
마이동풍 하나도 변함이 없이 쓰레기는 여전히 저들 무지렁이에 의해 태워진다.
다만, 행정력을 발휘하여 저들에게 벌금을 물리면 단 석삼일 만에 얼추 제대로 꼴을 갖추련만,
군 공무원들은 정월 보름달처럼 하늘 높이 높이곰 솟아 귀하기 비할데 없음이니 그저 오불관언이다.

저들 촌것들은 돈을 끔찍히 사랑한다.
단 몇 푼이라도 제 주머니에 돈이 나가는 것을 벌벌 떤다.
기 십만원만 벌금 때려도 저들은 당장 움칠하며 논바닥에 코를 붙이고 기어 다닐 것이다.
이리 간단한 것이,
다스려지지 않으니 시골 촌무지렁이는 백년하청이라,
오존층을 파괴하고 북극 얼음을 녹이는 장본인이다.
저 태산만큼 무거운 죄값을 어이 값으려고 저리 태평인가?

그런데 문제의 그 집 말고 또 다른 집에서 불빛이 솟는다.
밭 언덕에 올라 보니 저쪽 이웃에서 또 쓰레기를 태우는 중이다.
내가 카메라를 든 채 그이를 만났다.

“시골에서 농산물 부산물을 태우는 것은 일응 참아낼 수 있지만,
화학제품 예컨대 비닐, 치약, 페트병 따위를 태우는 것은 옳지 않다.
환경을, 특히 대기를 오염시키지 않는가?”

“재 때문에 불이 나지 않는다.”

“불이 문제가 아니라,
쓰레기 태우는 것 자체가 나는 싫다.
멀쩡한 공기를, 땅을 오염시켜서야 되겠는가?”

“시골은 다 그렇다.”

이 청정한 공기를 자신의 편의를 위해 왜 더럽혀야 하는가?
그깟 몇 푼의 쓰레기봉투가 아까와 폐기물을 태워야 하는가?
못된 한 사람을 위해 멀쩡한 다중이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이것은 옳지 않다.

저들을 어찌 해야 하는가?
참으로 어지러운 난세다.
진실로 어리석은 사람들,
그래 이들을 일러 촌무지렁이라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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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11. 10. 3. 18: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