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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

소요유 : 2011. 10. 24. 09:46


이무기

이무기는 한자로는 리(螭)라고 쓴다.
용(龍)도 그러하지만 이무기 역시 실제 제대로 본 사람은 거의 없다.
혹 보았다는 사람도 가끔씩 나타나나 이게 다 제멋대로라,
그것을 그대로 믿어주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이럴 때 우리는 간단히 ‘신화나 전설상의 동물이다.’
이리 미뤄두며 현실에서의 설왕설래를 그친다.
그러하지만 일변으론 틈나는 대로 전설이나 신화 속으로 날아 들어가,
모험과 환상 속의 여행을 즐기길 그치진 않는다.

(東漢時期的蟠螭玉環)

(螭首)


용이나 이무기 보다 작고 볼품은 없지만,
비슷하게 생긴 것으로는 뱀이 있다.
이 뱀은 실제 현실에서 존재한다.
사람들은 뱀, 이무기, 용을 순서대로 죽 늘어놓고는,
현실과 신화 사이의 잃어버린 연결 고리를 찾아 맞추어내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꾸며내며 즐긴다.

‘뱀이 오래도록 수행을 하고 도를 이루면 승천하여 용이 된다,’

이런 말씀은 우리가 어려서부터 들어오며 자란다.
이 이야기엔 보상(報償) 프로세스가 중심 구조로 자리 잡고 있다.
선업(善業)을 닦으면 선과(善果)가 맺힌다.
하지만, 이 고대 소설식 권선징악은 현대인에겐 별로 교훈을 주지 못한다.
이는 이젠 사람들이 영악해진 탓도 있지만,
남에게 동원되고 가르침을 받을 정도로,
자존의식이 허약하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천도수근(天道酬勤)이란 말이 있다.
뼈를 깎는 수행을 하면 반드시 하늘의 갚음이 있다.
과연 하늘이 있는가?
요즘 사람들을 하늘을 동원하여 감화시킬 수 있는가?

해서,
저것은 선업선과, 권선징악이 아니라,
모험과 환상의 이야기로서 역할하면 그저 족한 것이다.
교훈이 아니라 한 순간의 감동을 선사하고 사라져도 그 뿐인 것이다.

남을 고무시켜 열심히 노력하게 하는 것을 풍려(風厲)라고 하는데,
현대의 자각 주체들은 그 시시비비를 떠나,
이 따위 동원 양식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들인 것이다.
다만 하룻저녁 극장에 들어 판타지 세계를 단 몇 푼에 소비하며 즐길 뿐인 것이다.

그런데 이게 왜, 어째서?
하나도 나쁠 것이 없다.
그 동안 동원 주체들에게 하도 많이 속아왔기 때문에,
또는 저런 이야기가 강매하는 상품은,
현실에선 제대로 기능을 발휘한 적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로또에 열광할망정.
그렇지 않은가?
거긴 며칠 후 누군가 하나는 확실히 용이 되니까.

하지만 로또 역시 사변룡(蛇變龍)처럼 그대가 용이 되는 것은 판타지에 가까운 것.
로또는 그러기에 꼭 용이 되기를 기대하기보다는,
차라리 껌 씹으며 의자에 기대, 영화 한 편을 보듯,
그 판타지의 세계에 잠겨드는 일회성 티켓이라는 데 쓸모가 있는 게 아닐까?

能成龍的升天,能變蛇的入地
용이 되면 하늘로 오르고,
뱀이 되면 땅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용이 되려다 실패하고 만 뱀은 무엇이 되는가?

뱀은 현실이지만 용은 대개는 판타지, 꿈의 세상이다.

요즘은 좀 다르지만,
내 소싯적엔 사법고시를 패스하기 위해,
수년간 고배를 마시고 끝내 실패한 사람들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이들이 흘러들 만한 곳이 있다.
요즘엔 사법서사 사무소라고 그럴 듯하니 불러주지만,
당시엔 대서소(代書所)라고 했다.
기껏 '남의 글을 대신 써준다' 식이니 이게 얼마나 모멸스런 전락인가?
제 글을 써도 모자랄 판에 기껏 남의 글이나 써주고 앉았다니?

밤마다 머릿속엔 바스락 거리며 법전을 훑어가며 익힌 지식이 아우성을 친다.
하지만 낮엔 자의식이 와그락 거리며 설거지통에 든 그릇 소리를 내며 자지러진다.
밤엔 허물 벗고 용이 되지만, 낮엔 차가운 뱀으로 남겨진 물체.
이를 일러 이무기라 한다.

龍食乎淸而游乎淸
螭食乎淸而游乎濁
魚食乎濁而游乎濁
 
“용은 맑은 물을 먹으며 맑은 물에서 놀고,
이무기(螭)는 맑은 물을 먹고 탁한 물에서 놀며,
물고기는 탁한 물을 먹고 탁한 물에서 논다.”
(※ 참고 글 : ☞ 2008/12/23 - [소요유] - 청수(淸水)와 탁수(濁水))

한번 청수 맛을 본 이무기의 자의식.
비록 탁수 괸 수렁에서 사는 처지지만,
어찌 자존심을 버리고 탁수를 먹을 수 있으랴?

단재 신채호가 서서 세수를 하는 뜻은 무엇인가?
그가 나라를 잃은 선비로서 이무기로 살기를 자처하지만,
청수만을 고집하였으니,
이는 곧 삶이란 명리(名利)가 아니라,
도리(道理)로 살아야 함을 고집하였음이니라.
그 누가 이무기를 용이 아니라 탓할 것인가?

거죽으론 용의 탈을 쓰고,
나라를 외세에 팔아먹고, 사리를 도모하는 기득권 모리배야말로,
실인즉 뱀의 무리가 아니던가?

이무기야말로,
이 예토(穢土)에 유배된 진정한 용의 화신인 게라.
이 더러운 땅에 용이라 이름 불려지는 것들이야말로,
실인즉 추악한 뱀의 후예들이 아닐까?

강남좌파고, 우파이고 간에,
모두 호텔에서 다리 꼬고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마치 용이라도 된 양, 우아하니 폼을 잡는다.
저들이 진정 용이란 이름으로 불리어져도 괜찮은가?
소금꽃 김진숙은 뱀도 아닌 지렁이 신세지만,
일순(一瞬) 85호 크래인에 올라 찬바람 맞으며 영원(永遠) 속의 용이 된다.

허나,
아뿔싸,
강고한 현실에선
저들은 이리 불리어지고 만다.
龍無角者라!
용은 용이되 뿔이 없는 것을 이무기라 한다.
그런데 뿔 없는 용도 용인가?
바지사장도 사장인가?
고자도 사내장부인가?
호부호형(呼父呼兄)도 하지 못하는 홍길동이 과연 사람인가?

非龍非蛇
용도 아니고 뱀도 아닌 것을 이무기라 한다.
용이라면 하늘로 돌아가고,
뱀이라면 땅으로 숨을 수도 있으련만,
이무기는 천지간 오갈 데가 마땅한 곳이 없다.
그래 그 어둡고 축축한 늪이나 호소에 숨어들어 천년 한을 운다.

그런데,
왜 아니 뱀만 용이 되기를 욕망하는가?
두꺼비, 잉어, 때론 닭도 이 징그러운 지상에서 오래도록 수행을 하면 하늘로 승천하는 것.
닭을 30여년 기르면 어느 날 횃대를 박차고 승천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왜 아니 지렁이는 욕망하지 않을 텐가?

지렁이는 한자로는 구인(蚯蚓)이라고 하는데,
토룡(土龍) 또는 지룡(地龍)이라 불러주기도 한다.
그런데, 토룡(土龍) 또는 지룡(地龍)이란 말이 예의를 갖춰 대접해 주는 말이던가?

내가 지렁이라면 저 말은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천룡(天龍)이 아닌 이상 지룡(地龍)이라면,
이미 땅에 귀속되고 만 것.
하늘을 꿈 꿀 수 없는 존재라 이름하는 것인데,
도대체가 땅바닥을 기는 용도 용이란 말인가?
이 얼마나 불손하기 짝이 없는 말인가 말이다.

(대략 지상3M 높이에 걸린 지렁이. 아니, 이무기)

농원 비닐하우스 위에 박제처럼 굳어버린 지렁이 하나.
아무리 위아래를 훑어 보아도,
클립으로 다 막혀있기에 저 자리엔 들어 갈 수가 없다.
그런데도 어느 틈을 비집고 저기 올라 하늘을 꼬나본 저 지렁이 하나.
나는 반공(半空)에 걸린 저 지렁이를 보자 이내 이무기를 떠올린다.
하늘을 향해 기립(起立)한 저 형상이야말로,
식물들의 기립(氣立)처럼 뿌리는 아래에 있지만,
가지를 손 벌려 하늘을 지향하고 있음과 같다.
이 기립을 넘어 완전한 신기(神機)의 상태가 될 때,
하늘이 됨이니, 이가 곧 용인 것이다.

두꺼비, 잉어, 닭일 뿐이랴,
여기 농원에 사는
지렁이도,
개구리도,
두더쥐도,
그리고
요즘 조석으로 먹이를 챙겨 주었더니,
아침저녁으로 출퇴근 하는 유기견도,
역시나 용을 꿈꾸는 식구들이라.

나는,
저들이 끝내 하늘로 돌아가길 빌어보는 것이다.

허나,
이무기로 남겨지더라도,
들에 남아 홀로 울지언정,
행여 땅에 굴복하고 하늘을 원망하지 말지라.
네, 명운(命運)인 것을.

이무기는 슬프지만,
꿈만큼은 찬란했으리.

늦봄에 이르도록,
미처 피기도 전에 지는 꽃처럼,

찬란한 슬픔.

그대 이름은,
이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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