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농법 유감(遺憾) 4
내 물을 극도로 통제하는 농법을 대하다.
저들은 이를 두고 자연농법이라 이른다.
내 이에 대해 생각 하나를 일으키다.
이하는 이에 대한 간략한 기술이다.
***
내가 농부의 길로 나아가게 되자,
이는 실로 가슴 설레이는 일이기도 하지만,
벅찬 노릇이기도 하였어라.
여기 소년 하나가 있어,
머리에 예쁜 나비 리본을 매단,
영희를 만나러 집을 나설 때,
가슴엔 연분홍빛 연무가 지피어 오르고,
입안에 달달 넥타(nectar)가 절로 고인다.
하지만,
공부도 못하고,
인물도 변변치 않다.
이 어찌 할 도리를 찾아야 할꺼나?
하여,
기술센터의 농민대학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게서 동기 하나를 사귀게 되었다.
무창계사로 양계를 한다고 한다.
무창계사라.
계사(鷄舍)는 바로 짐작을 하겠음이나,
처음 듣는 무창이란 무슨 뜻인가?
동진(東晋)시대 왕돈(王敦)이 일으킨 무창(武昌)의 난(亂)이 짚이자,
그럼 중국 무창에서 유래한 신(新) 양계법이라도 되는가?
설마하니 창이 없다는 무창(無窓)이얼런가?
염천지절 폭염에 견디다 못해 닭이 죽어나간다고 하는데,
창이 없다면 여긴 필경 해괴한 곡절이 있음이렷다.
계사에 창문 하나 없다고 한다.
다만 환풍기를 돌려 ‘온도*습도’ 적산(積算)치를 조절하면,
여느 계사보다 몇 곱은 더 병아리를 밀식할 수 있다 한다.
기술이 뛰어나 더 많이 쑤셔 넣을수록 저 동네에선 영웅호걸로 추앙 받는다.
아뿔싸,
내 귀를 더럽혔구나.
문득 고사 하나가 떠오른다.
세이어영수지빈(洗耳於潁水之濱)
요(堯)가 천자의 위(位)를 은자(隱者)인 허유(許由)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자,
허유는 귀를 더럽혔다고 영수(潁水)가에서 귀를 씻었다.
이 때 소부(巢父)가 소를 앞세우고 지나고 있었는데,
그는 허유가 귀를 씻은 더러운 물로 소에게 물을 먹일 수 없다며,
강물 상류로 소를 끌고 올라가 물을 먹였다.
저리 숨구멍 하나 없는 창고에 마구 구겨쳐넣고는,
항생제에, 성장 호르몬 범벅을 한 사료를 주고는 닭을 키운다.
아니, 제작해낸다.
아니, 닭도 아니고 병아리라고 한다.
저 짓을 하면, 짧은 기간에 병아리가 닭만큼 자란다.
그러니 거긴 닭은 없고, 병아리만 있다.
부존재증명(不存在證明)
거기 그날 나는 없었다.
알리바이(alibi)란 말은
본디 라틴어로 “somewhere else.”를 뜻한다.
거기 현장에 닭은 없고 다만 병아리만 있음이로되,
저들은 짐짓 의뭉 떨며 병아리 아닌 닭을 팔고, 사고,
사람들은 외눈도 깜짝이지 않고,
닭이란 이름의 병아리를 사먹는다.
요즘엔 닭이란 말도 잘 쓰지 않는다.
그저 우아한 말 하나로 우회해간다.
‘치킨’
마트에 가면 랩으로 곱게 포장된 치킨을 만난다.
그게 여느 공산품하고 무엇이 다른가?
엊그제까지 가랑가랑 가냘픈 숨을 쉬고,
혈관엔 따뜻한 피가 흘렀음이로되,
닭도 아닌 어린 병아리가,
이젠 치킨이란 공산품이 되어
거기 눕혀져 있다.
그래 여긴 철저하니,
생명이 거세되어 있다.
다만 생각만하여도 입속에 칠칠 침이 절로 고이는 ‘맛’만 남아 있다.
어느 곳을 가보아도,
거긴 부재하다.
생명이,
진실이 거세된 현장.
“somewhere else.”
난 거기 무창계사, 도살장에 없었어.
우린 이리 새빨간 피가 뚝뚝 듣는 오리발을 내민다.
거긴 닭도,
병아리도,
끝내,
우리도 없었다.
“somewhere else.”
그는 말한다.
귀농하여 무창계사를 짓고 닭을 키웠다.
처음 병아리를 내는데,
두 부부가 손을 잡고 울었다고.
싯다르타(悉達多)는 아리따운 태자비 야소다라(耶輸陀羅)도 놔두고,
아들 라훌라(羅喉羅)도 버리고 유성출가(踰城出家)한다.
도(道)를 이루어 각자(覺者)가 되려 하였음이다.
마치 우리가 도시에 살면서 언제는 돌아가야지 하며 노래를 부르지 않았던가?
그곳 시골로 가자.
“돌아가련다. 전원이 장차 거칠어지려고 한다.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歸去來兮 田園將蕪 胡不歸)
부처는 도를 이루고져 하였음이라면,
농부도 아닌 나는 그리고 너는 과연 왜 시골로 들어가려 하였음인가?
이 물음에 그대 답하라.
석가가 출가한 당시,
인도 사회엔 사상사적으로 온갖 사상, 철학이 난번(爛繁)하여 다투듯 꽃을 피우고 있었다.
마치 희랍의 소피스트처럼, 중국의 제자백가(凡諸子百八十九家)처럼,
온갖 사상가들이 나타나 저마다의 사상들을 접동새 피토하듯 쏟아내었다.
이들을 사문(沙門, Sramana)이라 칭한다.
이들 사상들을 모아 62 사견(邪見)이라 칭하곤 하는데,
대표적으로 육사외도(六師外道)라 추려 일컫기도 한다.
그런데 62 사견이니 육사외도니 하는 것은 모두 후대에 불교 측에서 이름을 붙인 것이지,
애초엔 그냥 62견(62見)이니 육사(六師)인 게다.
이는 마치 일부 기독교인들이,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며 윽박지르고,
타종교인들을 곧장 악마니 마귀로 몰아세우는 것과 비슷하다.
어쨌건 석가가 도를 이루겠다고 떠돌아다닐 때,
주변에 배울 만한 선생이 많았다는 것.
나는 이를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마치 여기 oo 카페처럼.
온갖 배움의 말씀들이,
도도처처에,
나락 섬처럼 쌓여 있지 않음이던가 말이다.
이리 은혜를 입고 있음이니,
감사할 뿐 더 보탤 말씀이 없다.
선생을 바꿔가며,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전전하였으나,
석가는 얻는 바 하나도 없었다.
아니, 얻는 것이 왜 아니 없었으랴?
다만 마음에 딱하니 차지 않더란 말이다.
하여 6년간 방황하다,
종국에 이들의 길을 모두 벗어난다.
그리고는 보리수나무에 앉아,
대각(大覺)하여 도를 이룬다.
(http://www.ctworld.org.tw/dialogue/2007/2007-05/26-02.htm)
이때의 장면을 한번 음미해본다.
太子堅固的誓願,震動了魔宮,魔王波旬於睡夢中,驚見宮殿化為頹牆殘壁,魔子倉皇逃竄,深感恐懼不安。觀察得知,悉達多太子於菩提樹下即將成道,緊張的舉兵前往太子靜坐處,欲壞其志!
魔王初使美豔魔女,鼓樂弦歌,誘惑太子。太子端坐安然的說:「眾人為何來此呢?悅人的形貌實是污穢惡臭的皮囊啊!請回吧!」魔女瞬時化為駝背老嫗,羞慚而逃。
.....
태자가 서원을 굳게 세우니,
마궁이 크게 진동을 일으켰다.
마왕 파순이 잠을 자는 중, 꿈에 보이길,
궁전 담장이 쓰러지고 벽이 무너지더라.
마귀들이 창황이 쥐처럼 도망을 가고,
놀라 불안에 떨더라.
잘 살펴보니 싯다르타 태자가 막 도를 이루려 하는 찰나가 아닌가 말이다.
바짝 긴장하여 병사를 급파하여 그 뜻을 꺾으려 하였다.
마왕은 애초엔 미녀를 보냈었다.
북치고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를 부르며 태자를 유혹하였다.
태자가 단정히 앉아 이리 말한다.
“중인은 어인 연고로 이리로 몰려왔는가?
열띤 너희들 모습이 더럽고 추하여 악취가 몸에서 나누나.
돌아들 가거라!”
마녀들은 순식간에 늙은 할망구가 되더니,
이내 부끄러와 도망을 가더라 ....
내가 이 장면을 이리 다시금 새겨보는 까닭은 무엇인가?
최근 연일 올려 주시는 사진을 보니,
깨알처럼 열린 방울토마토가 마치 저들 미희(美姬)의 환영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저게 과연 미녀처럼 향이 나고,
뼈를 녹이듯 맛이 뛰어날런가?
아니면 내가 전망하듯이,
언젠가는 저것 또한,
그 정모(情貌)가,
화장으로 떡칠한 계집처럼,
종국엔 흉물로 밝혀지지나 않을까?
이 이야기는 끝에서 다시 잇도록 하고 잠시 젿혀두자.
여기 oo정자에 모여 앉아,
저마다는 가슴에 모두들 아름다운 뜻을 품고 있음이렷다.
유기농, 자연농의 도법을 터득하고 말리란,
이런 각오로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고련(苦練)을 마다하지 않고 있음이다.
犍陀羅佛教藝術中的釋迦苦行像,雙手結禪定印。
(http://mingkok.buddhistdoor.com/cht/news/d/15456)
뼈골이 다 드러나고,
피골이 상접한데,
어디선가 아리따운 미녀가 나타나,
춤과 노래로 그대의 영혼을 흔들고 있음이 아니던가?
헌데,
싯다르타가 부처가 되어 깨닫고 보니,
고행(苦行)도 순세파(順世派)의 쾌락도 다 부질없었음이라,
소위 중도(中道)의 도리를 깨닫는다.
저 하우스 바닥 땅이 쩍쩍 갈라진 모습을 보자,
나는 불현 듯 육사외도의 하나인,
니간타 나타풋타(Nigantha Nataputta)를 떠올린다.
우리에게 흔히 알려진 자이나교 교주이다.
도대체 방울토마토는 여기 한국 땅에서 무슨 인연에 얽혀,
어이 저리 고된 시련을 겪고 있음인가?
安徽廬江幹旱 廬江縣樂橋鎮桂元村農田就像龜殼一樣開裂
(http://www.wenzhousx.com/weather/zixun/50288.html)
(※ 인도의 갖은 고행주의자들의 모습, 너무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므로 사진 붙이지 않음.)
ritual
저 농법을 도법이라 이르고 있음인가?
내 눈에 그저 건한균열(乾旱龜裂) 농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식물입장에선 겪지 않을 일을 당하고 욕을 치루고 있음이니,
저를 학대(虐待)농법, 착취농법이라 불러도 하등 괴이하지 않으리라.
도법(道法)이라면서,
어찌 한 생명이 저리 시달릴 수 있음인가?
나는 저것이 도법(道法)이 아니라, 도술(道術)로 불려야 하고,
도술(道術)이 아니라, 요술(妖術)로 불려야 하며,
요술(妖術)이 아니라, 마술(魔術)로 불려야 하며,
마술(魔術)이 아니라, 종내에는 사술(邪術)로 불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릇 법(法)이란 다르마(Dharma) 즉 진리의 당체를 말하는 것임이니,
그게 어찌 사람 편에서만 요익되면 그만이랴?
함이니,
도(道)는 감히 가당치 않고,
술수(術手) 그래 그냥 technique인 게임이라.
단미(斷尾), 단이(斷耳), 단각(斷角), 단치(斷齒), 절훼(切喙,부리 자르기),
절조(切爪,발톱자르기), 코뚫기(鼻穿孔), 화두낙인(火斗烙印), ....
좁은 울타리, 항생제, 성장촉진제, ....
오늘날의 축산업이란 것이,
오로지 사람이 욕심에 부역하기 바쁜 짓거리이지,
동물의 고통에 대하여 단 한 줌이라도 헤아림이 있었음이던가?
이를 어찌 도법이라 할 수 있음인가?
저것은 단연코 말하거니와,
사술(邪術), 말술(末術), 요술(妖術), 마술(魔術)에 불과하느니.
禹在位時有七年大水. 湯在位時有五年大旱.
탕임금 때 5년 대한처럼,
땅바닥이 쩍쩍 갈라진 틈에 자라는 식물을 두고,
열매가 밤하늘의 별처럼 많이 달렸다고,
히히닥거리는 것이 과연 도법인가?
“결과를 능가하는 이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양분도 없이,수분도 없이,작물이 잘 자라주면은 이게 결과물입니다.이런 결과물에 이론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말 그대로 개소리에 불과합니다.지식인들이 특히 농업에...”
그분은 이리 말씀하셨다.
내가 보기엔 괴이쩍은 혐의가 적지 않은데,
알리바이(不在證明)는 마트에 이르자 바로 확인이 된다.
물신(物神) 앞에선,
그의 말씀처럼,
이론도, 작법도 한낱 가랑잎처럼 허공으로 흩어져버리고 만다.
그러함인데,
그의 도법이,
항차 말 못하는 동물에 이를 것이며,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에 이를 것임이랴?
“somewhere else.”
이 교묘한 은폐 프로세스,
거대한 폭압 구조는,
온 인류가 가담하여 구축해놓은 것이다.
우리는 모두 물신을 섬기는 공범 관계.
돌이켜 보자.
큰 게 좋다고,
양이 많은 것이 옳다고,
돈 많이 버는 것이 장땡이라고,
비료를 양껏, 욕심껏 처넣던 시절이 바로 엊그제다.
그러던 것이 유기농 바람이 불자,
이젠 그 비싼 수입산 유기농 자재를 쏟아 붓기 바쁘다.
그러더니만 이게 관행농 재배 때보다 잔류 질소 성분이 더 많아,
더 빨리 썩는다고 한다.
그러자, 어느 날,
이빨 빠진 왜인 하나가 나타나자 분위기는 일신된다.
사과가 일 년이 되어도 썩질 않는다고 한다.
이젠 탄소를 많이 넣어야 한다는 바람이 분다.
왜 아니 그럴까?
이젠 탄소농법이란 것이 나타났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이젠 다 필요 없다는 무투입 전도사가,
옆구리에 농경책 끼고 나타나,
헤죽헤죽 묘한 미소를 날리며 사람을 놀린다.
제 녀석이 뭐 염화시중의 미소를 날리는 가섭이라도 되는가?
중인은 다 꿀 먹은 벙어리인데,
다만 도법 성인 하나 있어 미소를 날리우시다.
갈라지라 하니,
호수가 짝 하니 찢어지고,
바다가 쩍 하니 벌어진다.
시그널을 주자,
열매가 흥부네 자식 놈들처럼 잔가지마다 스물 다섯 주렁주렁 달린다.
무슨 대장군 깃대인가?
깃발을 좌로 휘저으면 열개가 달리고,
위로 휘두르면 또 열개가 더 달린다.
과시 용병술이 오자, 손자를 방불하고뇨.
무창계사라 성공을 하는닷 싶자,
닭치는 촌부들이 몰려들어 장사진을 친다.
양주 왈
“어떤 사람이 강가에 살면서 물질, 배질에 익숙해져 식구를 먹여 살릴 만한 이익을 올렸다.
그래서 양식을 싸 짊어지고 배우러 오는 자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하지만, 물에 빠져 죽는 사람들이 거의 반수나 되었다.
본시는 헤엄치기를 배우려던 것이지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배우려든 것이 아니었지만,
(... 而溺死者幾半,本學泅,不學溺)
그 이해관계가 이와 같은 것이다.
그대는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고 생각하는가?”
楊子曰 人有濱河而居者,習於水,勇於泅,操舟鬻渡,利供百口,裹糧就學者成徒,而溺死者幾半。本學泅不學溺,而利害如此。若以為孰是孰非?
‘本學泅, 不學溺’ - 본학수 불학익
이 말씀이 제법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말이다.
남이 장에 가니 똥지게 지고 나선다는 우리네 속담이 있다.
저것을 마냥 비웃 것이 능사인가?
도대체가 장에 가지 않고서야 어찌 똥이라도 팔 수 있으랴?
제 분수도 모르고,
욕심이 눈을 가리면,
무슨 짓인들 못하랴?
옛적 곤 땅에 3형제가 살았다.
제나라, 노나라로 함께 가서 스승 하나를 섬겼다.
인의(仁義)의 가르침을 받고 돌아왔다.
그 아비가 묻는다.
“인의 도란 무엇이니얏꼬?”
맏이 이르길,
‘인의란 나로 하여금 몸을 아껴 후에 이름을 얻게 합니다.’
둘째가 이른다.
‘인의란 나를 죽여 이름을 날리게 합니다.’
막내가 이른다.
‘인의란 이름과 명예를 함께 이룸임입니다.’
昔有昆弟三人,游齊、魯之閒,同師而學,進仁義之道而歸。其父曰:仁義之道若何? 伯曰:仁義使我愛身而後名。仲曰:『仁義使我殺身以成名。叔曰:仁義使我身名並全。
유기농이든, 자연농이든,
과연 이것으로써 이름을 낼 수 있음인가?
愛身而後名
殺身以成名
身名並全
위 삼자는 인의(仁義)와 이름(명예)의 관계를 말하는 것인데,
오늘 나는 이 물음을 자연농법 따위에 빗대어 이리 연꽃 하나 들어 묻노니,
그 누가 있어 가섭이 되려나?
육사외도(六師外道)
이 조건하에서 도합 42 외도가 생겨난다.
내가 아닌 남은 모두 외도인 게라,
돌아가며 남을 외도로 부르길 42차례 하여도,
고작 일순(一巡)일 뿐이다.
두어라,
나만이 정도(正道)가 아님이며,
나만이 사도(邪道)가 아님이지 않는가 말이다.
하지만 말이다.
최소한 말은 바로 가져다 써야 하지 않겠는가?
저것을 두고 어찌 자연재배라 이름할 수 있겠음인가?
인간의 손이 타고,
욕심의 부름을 받아,
땅이 쩍쩍 갈라지고,
비 한 방울 주지 않겠다고,
하늘에 비닐이 씌어져 있음인데,
방울토마토는 제 몸 하나 버려,
열매를 가지가 부러지도록 열매를 단다.
과시 仲人의 몸을 받아 나투신 바,
꽃바람 일으키시며,
殺身以成名
이루시고뇨.
그대가 여기 있어,
가슴에 정이 흐르고,
피에 온기가 흐르고 있다면,
정녕 저것을 두고,
어찌 자연재배라 이름 할 수 있음인가?
이는 말을 빌어 사람을 홀리게 함이 아니어든가?
글을 빌어 사람을 무지르는 짓이 아니어든가?
순자(荀子) 정명편(正名篇)
고로 왕자는 이름을 지으니, 이름이 정해지면 바르게 분별이 되고, 도가 행해져 뜻이 통한다. 그런즉 백성을 하나로 신중히 통솔할 수 있게 된다. 그런고로 말을 분석하여 제 마음대로 설명을 만들어 이름을 혼란시키고, 사람들을 의혹하게 하고 쟁송을 일으키는 것을 대간이라 하는 것이니, 이것은 부절이나 도량형을 속이는 죄와 같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기괴한 말에 따라 바른 이름을 혼란시키지 아니하므로 성실하고, 성실하므로 부리기가 쉽고, 부리기 쉬우면 공업을 이룰 것이다. 그 백성들이 기괴한 말로 이름을 혼란시키지 아니하므로 오직 법을 따르고 영을 좇을 것이니, 그러면 치적은 오래 지속될 것이다. 치적의 영속과 공업의 완성은 다스림의 궁극이요, 이것이 이름을 하나의 약속으로 지킨 공이다. 이제 성왕이 없고, 이름 지킴을 태만히 하고, 기괴한 말로 이름과 실의 일치가 어지럽고, 옳고 그름의 구별이 분명하지 못하여 법률을 다루는 관리나 경서를 외는 유자조차 모두 혼란 중에 있으니...
故王者之制名,名定而實辨,道行而志通,則慎率民而一焉。
故析辭擅作名以亂正名,使民疑惑,人多辨訟,則謂之大奸,其罪猶為符節度量之罪也。
故其民莫敢托為奇辭以亂正名,故其民愨。愨則易使,易使則公。
其民莫敢托為奇辭以亂正名,故壹於道法而謹於循令矣,如是則其跡長矣。
跡長功成,治之極也,是謹於守名約之功也。
今聖王沒,名守慢,奇辭起,名實亂,是非之形不明,則雖守法之吏,誦數之儒,亦皆亂也。
일견 순자가 정명을 통한 치자의 도리를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숨은 뜻은,
말의 혼란은 말 자체의 혼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미혹시키며, 옳고 그름의 시비조차 그르치며,
사회통합을 저해한다고 갈파하고 있는 것이다.
건한균열(乾旱龜裂)
이 말이 어렵다면,
저것은 그저 갈증농법, 건조농법, 거북등 농법 따위로 불러야,
더 실(實)답지 않을까?
우리 모두는 알리바이를 만들기에 급급하고 있다.
장부라면,
부재증명이란 이름하에,
'나는 결백해'
'나는 무죄야'
이리 외치며,
몸을 숨기려 할 것이 아니라,
당당히
제 존재증명을 하여야 한다.
썩 나서서,
제 욕심의 본 모습,
적나라하니 그 본바탕을 드러내야 한다.
이 때라서야,
천하의 이름은 제 자리를 찾고,
선악 불문 사람들은 떳떳해진다.
우리 모두는 타자에겐 있어,
팔사외도(八師外道), 62사견(六二邪見) 중 하나일 뿐이다.
기왕 이리 나선 것이라면,
마왕 파순을 꿈꾸는 것이 장부의 도리가 아닐까?
62 정견(正見)은커녕,
108 번뇌(煩惱)만 들끓는 이곳 진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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