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소요유 : 2014. 2. 4. 11:13
나는 TV를 보지 않은지 꽤 오래되었다만,
최근 TV 근처를 슬쩍 지나치다 잠깐 귀에 들어온 말씀 하나가 있다.
거기 마침 소설가 박경리 선생 이야기가 나오는데,
원고지 하나를 완성하기 위하여 다섯 장 이상을 고쳐 쓰셨다고 한다.
나는 학교 다닐 때 박경리 소설을 좋아하여,
당시 그의 작품을 따라다니면서 거지반 다 읽었다.
지금은 머리가 삭아 하나도 기억을 하지 못하지만,
당시로선 열렬히 탐독을 하였다.
거기 TV에서 나오는 말씀은 이러하다.
‘자신의 판단, 느낌을 넘어선 글쓰기를 하신 것이지요.’
이게 무엇인고?
하면서 내가 집 식구에게 평을 늘어놓았다.
‘저 말은 작가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이 작가를 이끌고 있다는 말씀이다.
들리는가?
내 말이 무슨 말인가?
한 작가가 있어 그가 글을 쓰고 있다면,
영원히 3류 작가 신세를 면치 못한다.
일류라면 거꾸로 글이 작가를 리드해나가는 것이니라.
그런즉 글쓰기는 신령스럽다 하여야 하리라.
이 뜻을 알겠는가?
오늘 하루 삼세번 곰삭혀 보거라.’
작가가 하나 여기 있어,
종일 글을 써댄다 한들,
그것은 조물락 조물락 글을 만들어 갈 뿐인 것을.
예전엔 트럭에 시동 모터가 달려 있지 않았다.
그래 트럭 앞에 뚫린 구멍에 쇠막대기(crank)를 꼽고는 연신 돌려주어야 발동이 걸렸다.
1960년도 당시엔 운전수 밑에 조수가 따라 붙었는데,
조수의 소임 중에 이 시동 거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다.
특히 겨울철엔 시동 거는 것이 만만치 않아,
조수들은 찬 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신새벽부터 저 일에 열중하였다.
작가가 글을 쓴다 함은,
마치 저 crank를 돌리는 것과 같다.
일단 글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는 자동차의 굴러가게 하는 그 능력으로써,
거대한 쇠덩치가 목적지까지 절로 달려가듯,
글쓰기도 마찬가지로 글 자체의 논리로 흘러간다.
훌륭한 작가는,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이 흘러가는 모습을 그저 지긋이 응시할 뿐이다.
물처럼.
물이 어디 사람이 조정한다고 하여 마음대로 할 수 있는가?
아무리 댐을 쌓고, 제방을 쌓아도,
종국엔 물의 본성대로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 참고 글 : ☞ 2011/06/27 - [소요유] - 홍수와 소도법(疏導法))
(※ 참고 글 : ☞ 2011/06/27 - [소요유] - 홍수와 소도법(疏導法))
물의 덕성처럼,
글도 자신의 글격을 품고 있다.
물이 사람의 것이 아니어듯,
위대한 글도 사람의 것이 아니다.
이러함인데 어찌 작가가 감히 글을 쓴다할 수 있는가?
다만 작가는 그 글이 탄생된 현장에서,
그를 가만히 응시한 자로 남아 있을 뿐이다.
위대한 글 곁엔 언제나 이리 성실한 목격자로서의 작가가 있다.
3류 작가는,
아둥바둥대며 글 조각을 맞추려고 땀을 질질 흘릴 뿐이다.
이것은 글쓰기가 아니라 그저 부역질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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