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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탈구개자사(神脫口開者死)

상학(相學) : 2015. 3. 17. 00:19


神脫口開者死


상서(相書)를 읽다 보면 신(神)이란 글자를 자주 접한다.

이것을 우리가 아는 상식 선에서 그저 정신(精神)이나 귀신(鬼神) 정도로만 해석하면,

자칫 그 본의를 그르치게 될 수 있다.


眼有神


눈과 신(神)은 밀접한 관계를 갖는데,

눈엔 신이 머물러 밖으로 내비치고 있음이니,

이게 광(光)으로 드러난다.

그러니까 눈은 정신을 표상하기도 하고,

빛으로서 그 성정(性情)의 자질(資質) 심천, 강약을 표출한다.

하여, 곧잘 눈 그 자체를 신(神)이라 지칭하기도 한다.

때론 상서를 읽어 나갈 때,

신(神)을 그저 눈빛 정도로 해석하여도 무리가 없을 때가 많다.

하지만 거죽으론 이리 해석을 하더라도,

이게 단순히 외양에 드러난 빛에 한정되지는 않음을 알아야 한다.


神散多犯僧道,耳低必定貧窮,神散多狂而淫。


눈빛이 산란되어 있으면 바른 길을 범하며,

귀가 낮으면 필시 빈궁하다.

또한 눈빛이 산만스러우면 광적이며 음란하다.


骨正神強,大富之相。


골격이 바르고 눈빛이 강하면,

크게 부자가 될 상이다.


目秀藏神,得貴


눈이 수려하되, 눈빛이 감추어져 있으면,

귀하게 될 상이다.


眼大不可露神


눈이 클지라도 눈빛이 새는 것은 마땅치 않다.

(눈빛이 정순치 못하고 희번뜩 거리며 좌우를 두리번거리면,

숨기는 바가 있거나, 나쁜 꾀를 내고 있을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 정기(精氣)가 밖으로 새어나가 수명도 길지 못하다.

마땅히 눈빛은 안으로 사려 감춰야 내실이 있는 법임이라.


‘앞에 앉자 눈빛이 쏘는 듯, 범상치 않다.’


이런 말들을 하는데,

이게 다 부질없는 모습이라.

이들은 전사(戰士), 깡패라면 혹 모를까?

별로 마음에 담아 둘 인사가 아니다.

진짜배기는 눈빛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불상을 보면 그 어떠한 상(像)도 깡패처럼 빛이 밖으로 샌 모습은 찾기 어렵다.

당장 살아 있는 닭 잡아 먹을 때 말고는 눈빛이 밖으로 샐 일이 없다.)


上視多敗,下視多奸,斜視多偷,光浮多淫,露神多夭,此數件若犯一件,不爲取用,即非貴人也。神脫口開者死


눈이 위를 보면 패할 상이며, 아래를 보면 간사하다.

빗겨보면(사팔) 도둑질 기운이 있으며, 눈빛이 떠있으면 음란하다.

눈빛이 감추어져 있지 않으면 요절한다.

이들 중 하나라도 걸리면, (거둬) 쓸 만하지 않은 이다.

즉 귀한 이라 할 수 없다.


내가 수십 년 간 TV를 보지 않았었는데,

최근 형편상 자주 TV를 볼 기회가 있었다.

그러한데 국내 한 드라마를 시리즈로 따라가 보았는데,

거기 등장하는 이들의 눈이 가관이더라.

하여 옛 공부를 다시 상기해보는 것이다.


저들 출연인들은 거개가 삼백안(三白眼)은 기본이며,

현실에서 접하기 힘든 사백안(四白眼)도 있더라.

삼백안이란 눈동자를 중심으로 흰자위가 드러난 모용을 지칭하는 것이되,

상, 하, 좌, 우 중 3군데가 허옇게 드러난 것이요,

사백안이란 4군데 모두 보이는 상을 말한다.

상법(相法)에선 이를 모두 흉한 것으로 크게 꺼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니,

광대란 지배층, 권력자에 제 재능을 보이며 명을 잇질 않는가?

남에 매어 있는 신세이니, 이게 뭐 그리 귀한 일이겠음인가?

게다가 더욱 문제인 것은,

신력(神力)을 자신 안으로 거둬 잠그지 못하고,

부단히 외부로 유출하여 소모하고 있는 것이다.


대저 남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자 치고,

대체로 눈빛이 떠있고, 눈동자가 크지 않은 경우는 드물다.

가령 연예인이라면 자신의 연기를 밖으로 시현함을 업으로 함이니,

간단(間斷)없이 재능을 팔아야 하는 신세인지라, 

눈빛인들 어찌 감추어 숨겨져 있을 터인가?


상서를 훑어보면 실로 끔찍하다.


三白者皆爲無行之人也。

(林流相法)


露三白者刑克。

(公篤相法)


浮露者。神浮。而無根。清而不足之貌。主機智而夭壽。偏好前多病。亂世亦貴而不完善也。凡神露。即上之露光露煞也。按三白四白之形。皆主好勝而招禍勞碌而刑剋。是為貴而凶也。

(公篤相法)


부처의 눈을 보면 반개(半開)되어,

눈빛이 거의 감추어져 있다.


내관(內觀)하려는 자가 어찌 신광(神光=눈빛)을 내어,

밖을 의식하려 하겠음인가?


대저 밖을 의식하는 자는 안을 돌보는데 소홀한 법.

그러함인데 오늘날의 세태는 어떠한가?


‘팔지 못하면 죽는다.’


이 명제 앞에 천하인은 노출되어 있다.


물건을 파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급기야는 자신조차 파는데 열중하고 있음이 아니더냐?

 

‘너 자신을 팔아라.’


자신이 상품이 되고 말았음이니,

제 존재 안을 들여다 볼 틈이 어디에 있는가?

천하인은 갖은 지혜를 다 내고, 꾀를 내어 자신을 팔기 위해 분주하다.


내 2년 전에 농업인대학을 다녔는데,

이를 주관하는 농업기술센터에선,

SNS 교육을 하고, 스토리텔링 운운하며,

무리한 이야기를 꾸미며 자신을 파는데 열중하라 가르치고 있다.

식물을 기르는 정성보다 사뭇 더 정력을 기우려,

자신을 파는데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이야기.


그러함이니 무리한 이야기를 꾸미는데 바쁠 뿐이다.

실(實)이 예 있어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퍼져나가야 함인데, 

본말이 전도되어 실은 온데간데없고 말단인 이야기 창출에 분주한 것이다.


그러함이니, 연예인들이 천세가 나고 있으며,

자라는 아이들은 커서 광대 되는 꿈을 꾼다.


하기사 신광(神光)이 밖으로 샌 자는 눈에 잘 띄고,

계집사람이라면 색기(色氣)가 흐르며,

혹 술에 취하여 있으면 얼핏 어여삐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오늘날 연예인은 돈을 잘 버는 축에 속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돈 잘 버는 것을 귀히 여긴다.

예전처럼 주인 밑에서 종노릇 하며 비위나 맞추며,

한없이 천시 받던 시절이 아닌 것이다.

천지가 개벽하여 귀천이 뒤바뀐 것이다.


양고심장약허(良賈深藏若虛)


그러하다면, 장사를 잘하는 이는 좋은 물건을 숨기며 아낀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옛 사람들은 나의 귀한 것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 갈무리하며 스스로 중히 여긴다.

이리 안을 단속하며 내실을 기하며, 다음의 인연을 기약하였음이라.

헌데 요즘 사람들은 당장 오늘을 사랑할 뿐,

내일을 귀히 여기지 않으며,

돈을 밝히길 즐겨하니, 자신까지 까발기며 당장 상품화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아니, 전자의 오늘 사랑은, 기실은 결과 추수주의(追隨主義)에 다름 아니며,

후자의 내일 중시는 실인즉, 오늘에 충실하고 있다는 말이다. 


옛 여인네들이 세모시 입는 사연은,

은밀히 감춤으로서 귀하다는 자존의식의 표출임이라, 

거긴 부끄러움과 수줍음이 은은히 흐르고 있음이다.

실로 순결의 뿌리는 부끄러움인 바라,

자신을 귀히 여기고 있는 증좌이다.

수줍음이란 사랑의 증표이니,

상대를 애틋하니 연모하고 있음을 미뤄 알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계집들은 허벅지를 넘어 엉덩이까지 까발리고,

젖퉁이가 보이지 않을까 안달이니,

이리도 뭇 남정네를 홀리길 주저하지 않는다.

온 천하가 파는 것을 지상의 과제로 여기고 있는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오죽 팔 것이 없기에 제 몸뚱이까지 장터에 내놓았단 말인가?

저이들은 급기야는 혼까지 저당 잡히길 꺼리지 않는다.


귀히 여겨 감출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말이다.

저들은 다만 돈만이 탐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고 있음이리라. 

하지만, 만약 온 세상이 이리 돌아가고 있다면,

사백안이 마냥 천하다 이르는 것만이 능사인가?

이로써 모두가 숭앙하는 돈을 잘 벌 수 있게 되었다면,

오늘날은 귀한 상이라 일러야 도리가 아니런가?


뽕밭이 벽해가 되고,

묏산이 웅덩이로 변하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라면,

사백안인들 어찌 천년, 만년 세월 어둠 속에 버려짐이 마땅한 노릇이랴?


사백안(四白眼)이란 곧 주백안(周白眼)인즉,

사방을 둘러보아 막힌 곳이 없고 하얗게 열려 있다.


오늘날 온 천하인은 갖은 정보를 공유하며,

새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사백안이란 진작부터 외부에 옷깃을 열어 재끼고,

세상과 소통하길 꾀한 이들이 아닌가?


저들의 앞날은 과연 어떻게 전개되어 갈 것인가?

자못 흥미를 일으키고 있다 하겠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

자나 깨나 노다지 조그마한 핸드폰 속에 눈을 꽂아 두고 정신이 팔려 있다.

외부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음이니,

마주 앉은 이조차 내팽개치고 인터넷 항해에 여념이 없다. 

사정이 이러한데 항차 자신의 안쪽 마음을 들여다 볼 틈이 있으랴?

외부 지향적인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 어찌 전개될런가,

내겐 자못 흥미로운 과제이다.


부처는 그 교설이 펴지고, 실천이 이뤄지는 세상의 시대적 변전 양상을,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 saddharma-vipralopa)으로 나눠 설하셨다.

부처의 교설만 남아 있고, 실천이나 깨달음이 없는 시대를 말법이라 한다.

말만 번지르한 세상이 곧 말법 시대이다.

하지만 과거 사람들도 자신이 살고 있는 당대의 세상을 두고 말세라고 혀를 차며,

한탄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 古人亟於德,中世逐於智,當今爭於力。

옛 사람은 덕을 중시하였으며, 중세에는 지식을 쫓고, 

지금은 힘을 다툰다.

여기 당금(當今)이라는 시절을,

오늘 날 뒤돌아보면 까마득한 옛날이 아니더냐?

古者人寡而相親,物多而輕利易讓,故有揖讓而傳天下者。

옛날은 사람이 적어 서로 친하였으며, 

물자도 많아 이(利)를 가벼이 하고, 쉬이 양보하였다.

그러므로 읍하며 천하를 전(선양)하는 이도 있었다.

이게 BC 200 여년 전국시대 당시의 말씀이다.

물론 오늘날의 경우엔 물건이 적어서가 아니라,

외려 많은데도 이(利)를 다투고, 난을 일으키고 있다.

난 이게 결코 상충되는 말이 아니라 생각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물자의 다과가 아니라, 

그 분배 문제 때문에 난(亂)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공정한 분배 경로에 애로(隘路)가 생기면 물자가 아무리 많아도,

사람들은 제한테는 부족하다고 여기게 된다.

사정이 이러한데, 오늘 날의 위정자는 부자 감세를 천연덕스럽게 외치고 있다.

노동자들 가운데 태반은 비정규직이란 표찰을 가슴에 달고,

탁한 세류(世流)에 개구리밥처럼 이리저리 휩쓸려 떠내려 가고 있다.

참으로 참람스런 세태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러하다면, 정법이나 상법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이더냐?

설마다 다르지만, 정, 상, 말이 각기 500년, 1,000년, 10,000년이니,

시기적으로는 2500년이 흐른 오늘날이야말로 말법의 세상이다.


目有光彩必勝,目散神枯必損。

少者神散即死,老者頭項皮幹即死。


눈에 광채가 나면 필히 이기고,

눈빛이 흐트러지고 마르면 필히 손실이 있으리라.

어린아이 눈빛이 흐트러지면 바로 죽으며,

늙은이 머리 꼭대기 피부가 마르면 이내 죽는다.


헌데, 요즘은 대개 노소 가리지 않고 露神인데도,

요절하지 않고도 잔망스러이 백세(百歲) 시대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 수상쩍구나.

필시 요즘 인간들이 요망스런 술수를 익히기라도 한 것이 아니런가?


***


내가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이동 중이었다.

일단의 아이들이 몰려 있었는데,

옆에 자리가 비자 한 아이가 앉는다.

아이의 모습이 영 마땅치 않고, 가여워 보인다.


아이는 입을 헤하니 벌리고 있더라.

그 입을 통해 연신 기(氣)가 빠져 나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어린 아이인 즉 모른 척 그냥 넘어가자니 마음이 영 불편하다.

안일한 처사가 아닌가 싶다.

하여 아이에게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눈빛이 헤져 바랜 듯 멍한데,

당연 주처(主處)도 없이 허공중을 맴돈다.

게다가 입은 벌려져 있다.


‘어디 아픈 데가 있는가?’


혹여라도 심장이 약하다든가, 폐가 약한 아이는 숨이 벅차 입을 벌리곤 한다.

때론 위장에 문제가 있어도 입을 벌리곤 한다.

가스가 차오르면 상기하여 위로 나쁜 기운을 내뿜기 위해 자연 입이 벌려진다.

하여 이리 먼저 물었다.

아이는 다행히 아픈 데는 없다 한다.


神脫口開。


‘내 너에게 하나 이르고자 한다.

평소에 입을 헤프게 열어 두지 말고 꼭 다물고 있거라.

이게 처음엔 힘이 들지 모르겠지만,

오래지 않아 익숙해지면 아무 일도 아니다.

입을 벌리면 기가 빠져 달아나느니,

무슨 일이든 그 꾀하는 일의 매듭을 짓기 어려워진다.’


계집아이들은 달빛이 어스름하니 사창(紗窓)에 스며들면, 

가끔 눈을 사르르 감고, 입을 살짝 벌리며,

여우씩이나 되어 사내 녀석을 홀린다.

이것은 저들로선 사뭇 그럴 듯하니 수지가 맞는 짓이다.

입을 벌린다는 것은 내가 지금 가슴에 품던 은장도 내던지고,

겹으로 여민 고름도 풀 수 있다는 암시다. 

붉은 주사로 그린 호신부(護身符)도 집어 던졌음이라,

그러함이니 네 녀석들은 나에게 마음 놓고 접근하라.

바로 이런 분홍빛 신호를 내보내고 있는 것이다.


치맛자락 열어재낀 것만 유혹의 신호가 아닌 것이니,

외려 이 따위 짓거리는 천하디 천한 하책일 뿐,

근사한 계집은 은근하고도 비상한 술수를 익히고 있는 것이다.

가령 서시(西施)는 빈목(嚬目), 봉심(奉心)으로 오왕(吳王) 부차를 홀린다.

포사(褒姒)는 비단 찢는 소리로 주왕(周王)을 유혹한다.

뿐인가? 말희(妺喜), 달기(妲己)들도 저마다 장기를 발휘하여 모두 나라까지 기울게 한다.


하여간, 

반대로 입을 꼭 앙다물고 있다면,

야무지게 자신을 지키고 있음이니,

완력이 아니고는 쉬이 계집에게 다가가기 어렵다.


허니까, 계집사람이 입을 열면 요기를(妖氣) 흘려 잡인(雜人)을 꾀기 쉽다.

이게 의식적이 되었든, 아니든 간에 하등 차이가 없다.

그러함인데, 사내 녀석이 항시 입을 벌리고 있다면 어찌 될 것인가?

업(業)을 이루고자 할 때, 공(功)이 없고,

일을 짊어졌으되, 그 자기 책임을 다 할 수 없다.


口開者死


입을 열면 죽는다.


천하를 경영할 큰 그릇이 아닌,

범인이라면 천기(天氣)를 받아 들여,

자신의 그릇에 담아야 한다.

그런 연후라야 조그마한 일일지언정 업을 지을 수 있다.


큰 그릇이라면,

입을 연다는 것은 기를 흘리는 것 아니라,

천지와 하나가 되어 기를 순환시키고 있는 것임이라,

외려 이 경우엔 닫으면 막히어(塞) 문제가 생긴다.

이런 정도의 수준이라면 기실 열고 닫는 것이 다 이치에 닿는다.


하지만 범인이 종일 입을 열어두면 어떤 일이 생기겠는가?

간장 종지만한 그릇에 고이는 것은 없고,

마냥 밖으로 새나가고 마니,

도대체가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다.

이러고서도 어찌 천하 일의 한 조각인들 담당하랴?


내가 녀석이 알아 듣게 잘 타일렀는데,

지금은 어찌 자라 있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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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학(相學) : 2015. 3. 17. 0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