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지옥
intro comment :
"모모YS 사이트에서 겪은 일"
(※ 관련 사연, 2008/02/26 - [소요유/묵은 글] - 강낭콩 말미 주석 참조)
본 글은 말미 유첨 글에 대한 감상입니다.
***
개미귀신이 함정(개미지옥)을 파놓고 기다립니다.
제가 원하는 먹이가 굴러 떨어지지 않으면,
쳐다도 보지 않습니다.
오로지 먹을 만한 것만 취할 따름이지요.
바곳이란 독초가 있지요.
미물일지라도 바곳만큼은 용케 피해 먹지 않습니다.
개미 역시 굴러들어왔다고 아무 것이나 상대하지 않습니다.
사실 개미지옥이란 말은 어폐가 있습니다.
보다 바람직한 다른 말로 바꾼다면,
제나름의 관점으로 보아도 좋고,
선입관으로 치부하여도 좋을 것입니다.
하여간 이런 관점내지는 선입관은 때로는 힘이 들어가,
한쪽으로 쏠려가며 제 주장에 날을 세울 수도 있습니다.
이런 긴장된 모습으로 글을 쓰는 것이,
남에게 보이거나, 소통을 기대하려고 의욕하는 장치가 되기도 합니다.
그것을 저는 개미지옥이라고 냉소적으로 과장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일련의 제 글들은
만약 소통을 기대하려고 여기다 글을 쓰려고 작정하였다기엔
부담하는 비용이랄까 품이 좀 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글의 미추를 떠나서,
최소 적어내리는 시간만 따진다고 하여도
지나친 할애이거니와 주책스럽기까지 하지요.
(특히나, YS주막은 그리 긴 호흡의 글들을 즐기시지 않는 것 같은즉,
이게 낯선 객손으로서는 여기에 폐를 끼치는 소이가 될 것을 염려합니다.
다른 사이트에서는 저는 긴 글을 즐기곤 합니다.)
보다 정확히는 너무 주제 넘은 짓거리라 할 것입니다.
제 주장이 무엇이관대,
감히 남에게 그를 선전하고, 견인하려고 한단 말입니까 ?
그렇지만, 소통(疏通)이 아니고 소요(逍遙)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저로서는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물론 제 주장에 동조하시는 분이 나타난다면, 기쁠 수도 있고
아니면 솔직히 섭섭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직은 제가 충분치 않은 소이지요.
하지만,
독성(獨醒)의 기개라든가,
소요유(逍遙遊)하고자 자적(自適)하는 놀이였다면,
그것에 그리 얽매일 까닭은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지향하는 글쓰기 태도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실은 오늘도 한잔 술에 살짝 취해있습니다.
그래 모시고 대작커니 한가하니 너스레를 조금 떨어볼까 합니다.
독성(獨醒)이라는 말의 전거는 굴원의 어부사란 시,
다음과 같은 구절에 나옵니다.
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 是以見放
"세상 들어 모두 탁한데, 나 홀로 맑다.
뭇사람이 모두 취해있지만 나만 홀로 깨어 있어
(무리로부터) 추방 당했다."
이태백이 홀로 달을 벗 삼아 대작할 때,
그 역시 독성의 경지에서 자연을 벗하였던 것이지요.
재미 있는 것은 醒 이란 것이 “술 깰 성”자란 것이지요.
굴원은 모든 사람이 취해있지만, 자신은 홀로 깨어있다고
불우한 자신을 스스로 위로했습니다.
하지만, 이태백은 술을 먹으면서도 호방한 시를 은하수처럼 거침없이 쏟아내었지요.
제가 보기엔 고금을 통털어 취하였으면서 獨醒한 이는 그가 유일하지 싶습니다.
제가 지난 여름 밭에 갈 때,
지나치던 산이 소요산입니다.
그 유래를 확인하여 보지는 못하였지만,
이게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소요’처럼
장자의 소요유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짐작하곤 합니다.
소요유편에 보면 곤(鯤)과 붕(鵬) 이야기가 나오지요.
거기 붕새처럼 걸림이 없이 노닐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거기 휩쓸리지 않고,
외려 적당히 희롱하며,
자유롭게 유유자적하는 것,
이것을 장자가 무엇이라 하였든
저는 그냥 소요유라고 칭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혹여 어느 분이시든지 제 글을 그냥 즐기셨으면 다행입니다.
하지만, 실은 칼 벼려 덤벼드시는 분을 은근히 기다렸습니다.
옷깃 가다듬어 삼가 예검(禮劍)으로 맞아 겨루는
즐거움을 얻고 싶었습니다.
앞의 ‘사천왕’ 첫 댓글처럼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는 졸장부는
쓰던 이쑤시개로 툭 건드리기에도 아까와, 너무 싱겁습니다.
시든 비든 거래를 트려면,
최소 꼴이나 격이 얼추 갖춰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
뭐 아닌게 아니라,
무료하면,
어린 아이들 땅강아지 가지고 놀듯
그리 주무를 수는 있겠지만,
지금은 아딸딸하여 흥이 나지 않습니다.
***
제가 소요유하듯이,
저의 글을 상대로 그리 놀아 주시거나,
그냥 무시하고 빗겨간들 무엇이 허물이 되겠습니까 ?
어떤 글이든 그것이 시가 되었든,
소설이 되었든, 잡문이든 간에
그것에 의미를 부여거나, 말거나,
이는 전적으로 그 글을 대하는 사람에 달려 있습니다.
제 글을 누구든 맘대로 요리하고, 안주감 삼아
씹어도 저는 관계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제 흥에 따라 접응하거나,
내치거나 하는 것 역시 제 마음대로가 아니겠습니까 ?
글은 밖으로 나오면,
필경은 읽는 이에 의해 소비되고 맙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산된 글은 이미 그의 손을 떠난 것입니다.
소비를 예비하고 있는 글들인 것입니다.
허공중에 떠도는 글은 이미 이 운명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하니,
자신이 지은 시를 가지고 스스로 시험 치고 있는 모습은 심히 우스꽝스럽습니다.
파적 삼아 그리한다면 모를까 ?
하많은 남의 시를 놔두고,
왜 하필이면 제 시앞에 무릎 꿇고
고해성사라도 한단 말입니까 ?
게다가 거기서 받아본 시험지에
빨간 글씨로 적혀 있는 성적이라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요 ?
아마도 그 노시인께서는,
아직은 시의 세계를 더듬으며 한참 도상에 계시지나 않을까 싶군요.
제 시에 의미를 두지 말라고 이르시면서,
시험엔 왜 응하고 계신단 말입니까 ?
놀라운 일입니다.
의미를 구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시험이란 구조를 통해,
이를 입증하려는 의식(儀式)이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의미가 고정되지 않는 것이 옳다면,
곧 고정된 의미 측정 장치로서 존재하는
기능단위체인 시험의 객체가 될 수도 없을 터이고,
만약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그게 단 1점을 맞는다하여도,
1점만큼의 의미는 건져진 게 아닙니까 ?
아니 0점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하니,
진정 의미가 없다라는 말을 주창하려고 기도하였다면,
그 누구라도 시험장에 임하는 행위를 통해,
그 의욕하는 바를 이를 수는 없다 할 것입니다.
또 다른 어떤 이가 있어,
남이 치른 시험지를 빌어들고,
이를 증거하겠다고 하는 것은 더욱 씁쓸한 노릇이라 할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어떤 시인의 말처럼,
바람은 제 자신의 첫 페이지를 열고,
허공중에 새 길을 냅니다.
그 누가 바람을
제 언어를 빌어
시비할 수 있겠습니까 ?
하니,
자신이 허공중에 부어논 글을 두고 의미 유무를 논증하려거나,
유무 여하간에 이를 두고 쫓아가며 무엇인가를 증언하려는
노력은 손가락 사이를 빠져 나가는 물처럼
도시 허망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즉, 다만,
글을 대하는 사람들은
제 자신의 하악, 상악을 놀려
재주껏 소비할 뿐입니다.
노시인 내지는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서는
허경영의 축지법 시연처럼
골개와 해학이 넘치시는 것은 인정할만 하군요.
년전에 제가 '축지법'을 주제로 쓴 글은
재미는 없을지언정 최소 거짓은 아니었습니다.
40이든 100이든
거기에 의미를 길어 올리려는 일 자체야 말로
의미가 없는 일이 아닐런지요 ?
하기사,
세상엔 제 나름대로의 놀이에 빠져 즐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를 탓하는 것이야말로
무의미한 노릇이라 할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조금 피곤하군요.
해서 글을 더 이어갈 형편이 아닙니다.
필요하다면 밝은 날 맑은 정신으로 다시 이어 가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특정 개인에 함몰되고 싶지 않습니다.
저 아래 1563 황당주의 글주인(※ 당시 사건 일으킨 자) 외에는
개개가 아니라,
실인즉 이를 중심으로 지켜보던 대부분의 사람들
그 총체적 실체, 그 추상화된 일단을 뭉뚱그려
저는 반응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에서도 밝혔지만,
개인적으로 글 인용 등에 의해,
혹 감정상의 상해가 계신 분이 분명 있으리라 생각되는 바,
그 분들에게는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그렇다 하여도,
제가 그들 면면을 인정하였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냥 일일이 상대하기를 사양하였을 뿐이지요.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개별적으로 청해오신다면,
기꺼이 응대하여 드리겠습니다.
이글은 사실 제글 '강남콩'에 댓글로 가벼이 쓰려다가,
뒤늦게 uuu님의 글(※ 말미에 유첨)을 대하고는 부득이 고쳐잡고
본글로 올립니다.
***
이글 역시 췌언들의 행렬인즉,
적당한 때 내릴 예정입니다.
***
***
uuu님의 글, 요약 발췌
한 오 년전의 일로 기억됩니다!
한낮에 텔레비젼의 프로에,,
한 노시인의 대담프로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시인의 성함은 모릅니다만,,
그 시인은,,제발 자기의 시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그 시인의 시가,,,
육군사관학교 국어시험에 출제가 되었답니다.
그 시험문제를,, 그 시를 쓴 노시인이 풀어보았답니다.
몇 점을 받았을까요?? - 우리의 상식으로는 만점을 받아야겠지요!!
40점을 받았답니다.
그 시인은 힘주어,,말하였습니다.
"내 시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있는그대로 보아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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