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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소요유 : 2016. 1. 4. 14:36


분노하라.


高野山有志八幡講十八箇院「五大力菩薩像」之一「金剛吼菩薩」 (日本国宝)(西元九世紀)


나는 오늘 감히 '분노하라' 이리 세상을 향해 가르치려 외치려 한다.


우리네 선비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화를 내지 말라 가르쳤다.

이게 큰 미덕으로 추켜세워지곤 하였다.


삼국지에 유비(劉備)를 두고 이르는 말이 여기 있다.


身長七尺五寸,垂手下膝,顧自見其耳。少語言,善下人,喜怒不形於色。


“키는 칠 척 다섯 치며 손을 내려뜨리면 무릎까지 내려오며,

그 귀를 자기 스스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귀가 크다.

말이 적고 아랫사람에게 인자하였고,

기쁘고 화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喜怒不形於色。


그러니까 장부는 희로애락을 낯색으로 나타내면 아니 된다.

이런 가르침이 있었던 게라.


그런데, 이것 잘못 해석하면,

숨 빠져 나간 목석(木石)이 되고 만다.


칠 척이든 오 척이든,

사람 몸뚱이 안엔 오욕칠정이 갇혀 있음이다.

또는 맹자 식으로 인의예지로 그 인간의 본성을 두고 말을 하여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것들이 속에 있으면서 어떠한 경우, 바깥으로 나타날 때가 있을 터.

이제 이야기를 더 잇기 전에 여기 한 말씀을 마저 끌어내 본다.


張敬夫曰:「小勇者,血氣之怒也。大勇者,理義之怒也。血氣之怒不可有,理義之怒不可無。知此,則可以見性情之正,而識天理人欲之分矣。」 (孟子集注)


“장경부 왈, 

‘소용자는 혈기의 분노지만, 대용자는 의리의 분노임이라.

혈기의 분노는 있어서는 아니 되지만,

의리의 분노는 없어서는 아니 된다.

이를 안다면, 가히 성정의 바름을 제대로 볼 수 있어,

천리와 인욕을 분별할 수 있느니.’”


血氣之怒不可有,義理之怒不可無。(朱子語類)


“혈기의 분노는 있어서는 아니 되지만,

의리의 분노는 없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니깐 장경부는 분노의 표출을 小와 大로 나누었다.

요즘의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혈기의 분노는 감정의 발로이며,

의리의 분노는 이성적 또는 도덕적 판단으로 본 것이다.

전자는 소용, 후자는 대용으로 보았으니,

당부(當否) 즉 마땅함과 그렇지 않은 것을 이리 구분하였다 하겠다.


나아가 분노할 때 분노하지 않고, 분노할 일이 아닌데 분노하는 것은,

모두 절도에 맞지 않는다 하였다. (不中節)

이것은 현대 심리학의 분노조절장애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소용자인 경우엔 그리 장애라 하겠지만,

저것을 대용자를 두고 한 말로 좁혀 보면,

도덕적 책무, 사회적 정의, 개인적 양심에 어긋남을 지적하고 있다 하겠다.

이 때야말로 분노하여 책무를 다하고, 정의를 세우며, 양심을 지킬 수 있다.


不形於色란 기실 다중 가치를 가진 말이다.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마구 멋대로 질주하는 것을 경계한 말일 수도 있지만,

때론 의도적으로 자신을 숨기고 타인을 속이려 할 때도 저런 태도를 갖게 된다.

포커페이스(poker face)가 그 전형이라 하겠다.

이럴 경우엔 미덕이 아니라, 그저 전술적 가치로서 의의가 있을 뿐이다. 


장경부가 한 理義之怒란 그러한 것이 아니라,

마땅하여야 하는데 그러하지 않은 일에 분노해야 한다는 말이다.


上士無爭,下士好爭,上德不德,下德執德,執著之者,不明道德。

(太上老君說常清靜妙經)


(※ 太上老君說常清靜妙經은 당나라 때의 저작인데, 총 391자로 지어진 짧은 경이다. 

道藏내에 속한 저작이지만, 儒釋道 삼가(三家)의 내용이 섞여 있다.

당나라 때는 도교, 불교 숭앙과 배척이 반복 무쌍하였던 고로,

그 변천 과정에 따라 삼가의 내용이 유합(糅合)되어 있다.)


“상사는 싸우지 않고, 하사는 싸움을 좋아한다.

상덕은 덕이 없고, 하덕은 덕에 집착한다.

집착하면 도덕에 밝지 못하다.“


여기 無爭, 不德을 싸우지 않고, 덕이 없다로 그저 새기고 말면,

그야말로 不明 밝지 못한 것이다.


여기 無, 不는 단순 부정사가 아니다.

나라면 불매(不昧)로 새기겠다.

즉 싸움, 덕에 매이지 않는다로 보겠다.


가령 분노하지 말라든가, 낯색에 나타나지 않게 하라든가, 싸우지 말라는 것에,

매이게 되면 스스로 손목에 수갑 채우고, 모가지에 항쇄(項鎖) 채운 격이라,

천지간에 씻을 수 없는 죄수가 된다.


無爭, 不德라는 말은 싸우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다.

쟁이니 덕이니 하는 말에 혹하여 빠지지 말아야 한다.

싸우지 않는다라는 도그마에 빠지면 인간 핫바지가 된다. 

덕이 없다라는 말도 말 그대로 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덕이 있는 양 젠 체 으스대거나 의식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게 병가(兵家)로 들어가면 요상스러워진다.

아니 병가가 먼저이고 도가가 나중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하여는 설이 갈린다.


병가는 싸워 이기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남을 속임에 거리낌이 없다.

無爭, 不德인 척 남을 속이고,

그 실을 취하는 전술적 차원의 짐짓 꾸민 태도가 저러하다.

하여간 無爭, 不德에서 無, 不를 잘못 해석하면,

진구렁텅이에 빠져 삼만 삼천 년을 헤매게 된다. 


정초엔 바둑을 두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다.

새해부터 다투는 놀이에 열중하며 좋은 기운을 해친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새해이든, 연말이든 싸울 일이 있으면, 싸울 일이지,

별도로 날 골라 사리는 것은 내겐 퍽이나 안일하게 여겨진다.

해서 소싯적 이후, 다 커서는 저런 가르침엔 그다지 마음을 두지 않는다.


理義之怒不可無。


“의리(義理)의 분노가 없어서는 아니 된다.”


장경부의 이 말은 주역의 다음 말에도 맥이 가닿아 있다.


君子豹變,小人革面


“군자는 표변하고, 소인은 혁면하다.”


군자는 표범의 가죽 무늬처럼 아름답게(마땅하게) 변하지만,

소인은 낯빛을 제 이해에 따라 수시로 바꾼다.


주역에선 대인(大人)과 군자(君子) 그리고 호변(虎變)과 표변(豹變)은 다르다.

이에 대하여는 내가 진작에 다른 글에서 다룬 적이 있다.

오늘은 이를 조금 각도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大人虎變其文炳,君子豹變其文蔚。


대인의 호변은 그 문(文)이 병(炳)하고,

군자의 표변은 그 문(文)이 울(蔚)하다.



여기 대인은 효위(爻位) 상 王公大人을 가리킨다.

괘에서 九五는 陽爻陽位得正이므로 中正의 위치에 있다.

혁괘(革卦)의 주효(主爻)다.

그 분노가 치열한데, 약한 것이 이제 위맹하게 변하였다.

그러하니 점을 칠 일도 없다.

그저 달려가 쳐부숴도 승리할 수 있다.

이런 분위기를 묘사한 것이 大人虎變其文炳이다.


주무왕이 은나라의 주(紂)를 정벌하러 갈 때,

당시의 관습대로 점을 치게 되었으나 대흉(大凶)으로 나왔다.

이에 강태공이 신탁 위에 놓인 거북 껍데기, 산가지를 쓸어버리며,

이까짓 말라비틀어진 것들이 무엇이관대?

하며 출병을 외치게 된다.

이에 주무왕이 옳도다 하며 삼군을 몰아 은나라를 쳐들어가게 된다.


理義之怒不可無。


의리의 분노는 없는 것이 불가한 노릇이다.

하니까 은나라 주왕의 폭정으로 이미 민심이 등으로 돌렸음이니,

까짓 점치는 일로 앞일을 예단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분노하라!


병은 빛난다.

울은 성대하다, 아름답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 文은 무슨 말인가?


의표(儀表)를 가리킨다.

그게 위엄(威嚴)이 있어, 

광채(光采)가 사람을 비춘다.(照人)

이게 문병(文炳)의 뜻이다.


문(文)에 대하여 더 궁금한 이는 나의 다른 글을 참고하라.

(※ 참고 글 : ☞ 2008/03/04 - [소요유/묵은 글] - 무늬, reality, idea)


君子豹變,其文蔚也。小人革面,順以從君也。


군자는 마치 표범이 털을 갈 듯이 개혁의 분노가 인다는 말이다.

하지만 소인은 낯빛만 바꾼다. 

아직 마음을 바꾼 것은 아니다.

다만 지도자에 복종하여 따를 뿐이다.

소인은 革面할 뿐, 革心까지 기대할 바 없다.

내 동서고금의 예를 면밀히 관찰해보았는데,

소인은 절대 革心하지 않는다.

다만 변심(變心)만 능할 뿐이다.

제 이해에 따라 수시로 자반 뒤집듯 반복 무쌍하게 마음을 바꿀 뿐,

정의를 위해 제 마음의 혁명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군자든 대인이든 분노하여 마땅한 때엔 분노한다.

그게 어느 때인가?


因地制宜

因時制宜

因人制宜


상황에 마땅한 곳,

때에 마땅한 때,

사람간 마땅한 관계 상황에 말미암은 바로 그 지점.

이를 중절(中節)이라 하는데,

바로 여기 그 때 벌떡 일어나 분노하여야 한다.


세월호 진실이 은폐될 때,

국정화 교과서 문제가 일어날 때,

노동법 개악이 벌어질 때,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굴욕 합의가 이뤄질 때 

분노하여야 한다.


이러할 때

사람은 곧 군자가 되고, 대인이 된다.


군자가 따로 있고,

대인이 별도로 태 가르고, 피 받아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마땅한 상황에,

분노할 때,

비로소 대인이 되고 군자가 될 뿐인 것을.


우리 초원의 빛 블루베리 농원에서 나오는 블루베리를 먹는다 하여,

곧 대인과 군자가 되는 것은 아닐 터.

하지만 대인과 군자의 義理之怒를 일으키는 영약(靈藥)이 되길 기원한다.


나는 그런 자세로 블루베리를 키운다.

이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다만, 블루베리가 자신의 본성에 충실하게 자라도록,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족할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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