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와 연꽃, 그리고 그 넘어
암호화폐와 연꽃, 그리고 그 넘어
怯者無功 貪者見亡
(馬融, 79~166)
“겁쟁이는 공이 없고,
욕심쟁이는 망하고 만다.”
동한(東漢)의 바둑 고수인 마융의 말이다.
내가 이에 대하여는 몇 차 소개한 적이 있다.
그가 지은 위기부(圍棋賦)도 국내에선 내가 처음으로 소개를 하였다.
헌데, 怯者無功 貪者見亡
이 말은 처음 듣는 이도 많지만,
혹여 이리 해석을 해주어도 잘못 알아듣는 이가 태반이다.
그러니까 겁을 내면 공을 이룰 수 없으니, 겁을 내지 말아야 한다든가,
욕심을 내면 망하니, 욕심을 없애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그리 받아들여도 가한가?
유정물(有情物)은 바위나 쇳덩이 같은 무정물이 아닌지라,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런즉 위급한 때에 이르면 겁이 나고,
흥이 나면 더욱 욕심을 일으키곤 한다.
헌즉 怯, 貪 따위의 감정이 이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런 현상이라 하겠다.
그러한즉 상황에 즉하여 절로 일어나는 감정이란,
마치 바람이 불면 연못에 파랑(波浪)이 이는 바와 같다.
이것 애써 인위적으로 없애려한들, 없어지지도 않을뿐더러,
억누를수록, 외려 마음이 더욱 긴장되어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
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두려움을 직접 마주하며 만날 일이다.
때로, 그를 통제 할 수 있다면,
두려움은 외려 사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가령 적군으로 기습 공격을 받았을 때,
덜컥 겁이 난다.
하지만, 겁이 난다고 무조건 움츠려들거나, 도망을 가지 않고,
대원들끼리 결속을 하며,
냉정하게 적군에 대응하는 원동력으로 승화시킬 수만 있다면,
한결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럴 경우, 무사태평한 감정보다, 겁은 외려 사태 해결에 보탬이 된다 하겠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통제를 하겠다는 마음조차 넘어서야 한다.
이제 이를 주제로 삼고,
암호화폐 투자와 관련하여,
좀 검토를 해보고자 한다.
露草夭夭繞碧坡
小塘淸活淨無沙
雲飛鳥過元相管
只恐時時燕蹴波
(野池 - 退溪)
이슬 머금은 풀이 무성하게 푸른 언덕을 둘러 있고,
작은 못은 맑고 깨끗해 티끌 한 점 없구나.
구름 날고 새 지나감은 본디 상관되지만,
다만 때때로 제비가 수면을 차는 것을 두려워하네.
臥疾高齋晝夢煩
幾重雲樹隔桃源
新水淨於靑玉面
爲憎飛燕蹴生痕
(江亭偶吟 - 南冥)
높다란 다락에 병들어 누워 낮 꿈이 번거로운데,
몇 겹의 구름과 나무가 도화원을 격리시켰나?
새로운 물은 푸른 구슬보다 맑은데,
나는 제비가 물결 차 생긴 흔적 밉기만 하네.
퇴계 이황(李滉)과 남명 조식(曺植)의 시를 끌어내본다.
넷째 귀를 주목해보라.
여기 보면 공히 제비가 등장한다.
이는 곧 인욕(人欲)을 뜻하는데,
이 양인의 태도가 대비된다.
只恐時時燕蹴波
다만 때때로 제비가 수면을 차는 것을 두려워하네.
爲憎飛燕蹴生痕
나는 제비가 물결 차 생긴 흔적 밉기만 하네.
恐, 憎을 두고 보더라도,
恐은 憎보다 감정의 강도가 쎄다.
게다가 퇴계는 존천리(存天理)라,
이게 훼손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입장에 서 있다.
하지만, 남명은 인욕(人欲)이 이는 것이 밉다고 이르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퇴계는 존천리, 남명은 알인욕(遏人欲)에 치중하고 있다.
즉, 전자는 심학(心學)의 구심력이 작동하여, 천리를 존양(存養)하는데,
후자는 원심력이 작동하여, 성찰(省察)에 치중하고 있는 것이다.
존양하려면 필시 거경(居敬)하여야 하고,
성찰하려면 의(義)로써 정사(正邪)를 가려야 한다.
남명이 성성자(惺惺子)란 방울과 칼을 지니고 다녔다고 하는데,
칼은 바로 의(義)를 상징한다.
그 칼에 새겼으되,
內明者敬 外斷者義라 하였으니,
그는 얼핏 무애인처럼 보이기도 하나,
외려 퇴계보다 더욱 철저한 유학자의 엄격함이 엿보인다.
헌데, 이 말은 실인즉,
주역에 나오는 다음의 말에 기대고 있다.
「直」其正也,「方」其義也。君子敬以直內,義以方外,敬義立而德不孤。
(文言)
“直은 正이며 方은 義다.
군자는 敬으로써 안을 直하고,
義로써 밖을 方케 한다.
經義를 세우니, 德不孤라. ....”
양자의 태도가 내외로 서로 다른 양 싶지만,
내가 보기엔 근본적으로 역시나 유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남명(南冥)이란 호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는 장자(莊子)에 나오는 말이다.
퇴계의 엄정함에 비하면,
남명은 매임이 없이 호방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인욕(人欲)을 막고, 천리(天理)를 보존하려는데 있어서,
양자는 차이가 없다.
이제 이쯤에서 신수와 혜능의 시를 함께 아우르며, 견주어 보아야 한다.
神秀 偈 唐 神秀大師 (당나라 신수대사의 게송)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莫使有塵埃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끼지 않게 하라.
慧能 偈 唐 六祖慧能大師 (당나라 육조혜능대사의 게송)
菩提本無樹
明鏡亦無臺
佛性常淸淨
何處有塵埃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 먼지 있으리오.
신수 스님의 게송은,
퇴계의 경(敬)이나 남명의 의(義)를 상기시키고 있다.
마음은 밝은 거울이니 계신(戒愼) 즉 경계하고 삼가며,
때가 끼면 의(義)의 칼로써 시살(廝殺)시켜버려야 한다고 읊고 있다.
하지만, 혜능은 부처의 성품이 본디 청정한 것이거니와,
번뇌, 인욕이 어디에 따로 있겠는가 묻고 있는 것이다.
번뇌즉보리(煩惱則菩提)란 말이다
본디 이 말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火中生蓮이요,
하나는 轉識成智다.
전자는 마치 일조 혜가의 단비(斷臂)처럼,
구도를 위해 팔을 끊고나서야 득도를 함과 같다.
번뇌 가운데 선연(善緣)을 촉발시켜,
금강(金剛)의 불괴지체(不壞之體)를 연단시켜 낸다.
不入虎穴,焉得虎子라,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서야, 어찌 호랑이를 얻을 수 있으랴?
후자는, 무엇인가?
轉識成智
여기서 識은 곧 번뇌를 말하며, 智는 지혜, 보리를 뜻한다.
하니까, 번뇌는 망령된 것이요, 지혜는 진실된 것이다.
헌즉, 진실된 것을 떠나 망령된 것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요,
망령된 것을 여의고서는 진실된 것도 없다.
중생은 진리를 잃고 망령된 것을 쫓기 바쁘다.
허나, 진실로 공부를 열심히 하다보면,
홀연히 번뇌란 것이 다 환(幻)임을 깨닫게 되며,
나아가, 이 환(幻)을 떠나지 않고, 이게 곧 진(眞)임을 알게 된다.
하니까, 신수는 바로 火中生蓮의 경지를 노래한 것이요.
혜능은 轉識成智를 전격 질러 들어간 것이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 본다.
怯者無功 貪者見亡
하니까 이를 두고,
‘공을 이루고, 망하지 않으려면,
怯, 貪을 버려야 한다.’
이리 이해를 하게 되면,
이는 환(幻)에 불과한 怯, 貪을 마치 실체가 있는 진(眞)으로 여기게 되니,
마치 몽당 빗자루를 낮도깨비로 여기고,
전전긍긍 도망가는 것과 같다 하겠다.
怯者無功 貪者見亡
암호화폐 투자에 있어서도,
이 말을 거죽만 취하게 되면,
엉뚱한 짓을 반복하게 되어 있다.
가령, 怯, 貪을 버려야 한다는 단순한 태도는 말할 것도 없지만,
조금 자신이 영악하다 자임하는 이는,
그렇다면 하고서는, 거꾸로, 대응하고자 한다.
즉, 怯이 나면, 사고, 貪心이 일면 팔겠다 작정한다.
이런 태도의 문제는 도대체가 怯, 貪의 한계 지점을 알 수 없는 것이며,
여전히 怯, 貪를 의식하며, 이를 여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마치 섶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 듦과 같아서,
자칫 만용을 부리다, 크게 다치게 된다.
퇴계, 남명은 경(敬)으로 존천리(存天理)하고,
의(義)로서 알인욕(遏人欲) 즉 인욕을 차단하고자 한다.
신수 역시 번뇌를 부지런히 없애려 한다.
하지만, 혜능은 이게 다 환(幻)임을 깨닫고,
轉識成智의 경지로 나아갔다.
겁이 나면,
도망을 가거나,
놀라 공격 일변도로 나아감이 능사가 아니다.
귀한 손님을 맞듯,
가만히 지켜보며 관찰할 일이다. - 妙觀察智
如夢幻泡影如露亦如電인 고로.
不能大捨,即不能大得;不能大苦,即不能大樂。
“크게 버리지 못하면 크게 얻을 수 없다.
큰 고통을 이길 수 없으면, 큰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
迷人修福不修道, 只言修福便是道,
布施供養福無邊, 心中三惡元來造。
擬將修福欲滅罪, 後世得福罪還在,
但向心中除罪緣, 名自性中真懺悔。
忽悟大乘真懺悔, 除邪行正即無罪,
學道常於自性觀, 即與諸佛同一類。
吾祖惟傳此頓法, 普願見性同一體,
若欲當來覓法身, 離諸法相心中洗。
努力自見莫悠悠, 後念忽絕一世休,
若悟大乘得見性, 虔恭合掌至心求。
(六祖大師法寶壇經)
“어리석은 사람은 복은 닦고, 도는 닦지 않으면서
복을 닦음이 곧 도라고 말한다.
보시 공양하는 복이 끝이 없으나
마음 속 삼업(三業)은 원래대로 남아 있도다.
만약 복을 닦아 죄를 없애고자 하여도
뒷세상에 복은 얻으나 죄가 따르지 않으리요.
만약 마음속에서 죄의 반연 없앨 줄 안다면
저마다 자기 성품 속의 참된 참회(懺悔)니라.
.....”
육조단경에 나오는 게송 일부를 끌어들여보았다.
특히 이 부분 迷人修福不修道, 只言修福便是道를,
나는 지금 되새겨보는 것이다.
怯者無功 貪者見亡
겁이 많으면 공이 없다고 하니,
겁을 없애려고 한다.
그러면서 이제 공을 이룰 수 있다고 여긴다.
마치 어리석은 자가 修福不修道하는 것과 같다.
겁을 없앤다고 하여 곧 공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갓바위에 올라 연신 손을 비벼대며 불공을 드린다하여,
제 자식이 대학에 합격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매한가지다.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은 여전한데,
기껏 손바닥 비벼 털어낼 수 있겠음인가?
왜 그런가?
아, 이어지는 다음 구절 布施供養福無邊, 心中三惡元來造。
이것은 참으로 절절 가슴에 와 닿지 않는가?
지 아무리 보시, 공양을 한없이 한다한들,
마음속엔 여전히 삼악업이 원래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혹 착각으로 怯은 없앴다한들 貪은 여전히 남아 있음이며,
貪은 없앴다 여기지만,
怯은 여전히 어둑 밤길 더듬어 나선 풋도둑처럼 여전한 것이다.
怯, 貪은 없앤다하여 결코 없앨 수 없는 것이니,
남명처럼 방울 달고, 칼을 찬다한들,
살아있는 한 없앨 수 없다.
신수처럼 매일 일어나 거울에 낀 때를 닦는다한들,
결코 때를 모두 벗어버릴 수는 없다.
헌즉, 혜능은 明鏡亦無臺
이리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혹, 이에 대하여 좀 더 가까이 이해를 구하고자 하는 이는,
육조단경을 꼭 읽어 볼 일이다.
별로 길지도 않지만,
불학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나는 육조단경을 대학 1학년 때 처음으로 읽었다.
오늘 이 글을 쓰느라, 다시금 대하니,
그 불지(佛智)가 밝은 달처럼 마음을 비추고 있다.
使君東方人,但心淨即無罪。雖西方人,心不淨亦有愆。東方人造罪,念佛求生西方。西方人造罪,念佛求生何國?凡愚不了自性,不識身中淨土,願東願西。
(六祖大師法寶壇經)
“사군아, 동쪽 사람일지라도 다만 마음이 깨끗하면 죄가 없고,
서쪽 사람일지라도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허물이 있느니라.
동방인이 죄를 짓고, 염불하며, 서방에 태어나길 구한다.
서방인이 죄를 짓고, 염불하면, 어느 나라에 태어나길 구하는가?
미혹한 사람은 자성을 깨치지 못하고,
자신이 정토에 있음을 알지 못하며,
(다만,) 동이니, 서며 하며 그곳에 태어나길 바랄 뿐이다.
죄 많은 중생이 그저 염불하며, 서방극락정토에 태어나길 바라듯,
怯, 貪 열심히 통어하겠다 나서지만,
자고나면 우후(雨後) 독버섯처럼 끊임없이 다시 일어나고 만다.
신수처럼 매일 거울을 닦느라 쉴 날이 없고,
남명처럼 칼 차고 사납게 마음을 벼리지만,
여전히 怯, 貪은 마음 바다에서 거칠게 파도를 일으키고 있다.
그러한즉,
결코, 怯, 貪은 없애려 달겨들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늘 문득 한 생각 일어,
이 마음의 경과를 적어본다.
(※ 참고 문헌
李滉과 曺植의 문학적 상상력, 그 同異의 문제 - 鄭羽洛
退溪 ‧ 南冥의 시와 대조적인 학문성향 - 李相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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