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곡(桎梏)
어떤 정치인과 진행되는 대담 기사를 읽다가,
순간 이것 말이 되지도 않은 것을 읊고 있구나 싶었다.
“... 고난의 질곡을 걷는 것 같다.”
질곡(桎梏)은 옛날 형구(刑具)로서,
차꼬와 수갑을 지칭한다.
차꼬란 족가(足枷)라 불리기도 하는데,
맞댄 나무때기 사이에 뚫은 구멍에 두 발목을 넣고,
자물쇠로 채운 형구를 말한다.
수갑(手匣)은 모두 알다시피 양 손목을 채우는 형구를 말한다.
여담이지만, 손을 보호하려고 끼는 것은 장갑(掌匣)인데,
북한에선 이를 수갑이라고 한다.
이 때 手匣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 手甲이라고 쓴다.
물론 북한에서 한자어가 축출되고 있지만.
甲이 무엇인가?
이는 내 기왕에 쓴 글이 있으니,
설명은 이로 미루기로 한다.
(※ 참고 글 : ☞ 갑(甲))
다만 匣은 匱也라 상자를 뜻한다.
보다 더 정확이 말하면,
匱이 제일 크고, 匣은 그 다음이다.
匱 > 匣 > 匵 (궤 > 갑 > 독)
匚 역시 ‘상자 방’이라 이르지만, 본디 부수명은 튼입구몸이라 한다.
때론 튼에운담이라고도 한다.
凵은 입벌릴 감이란 단위 글자가 되기도 하지만, 본디 부수명은 위튼입구몸이라 한다.
이것 여간 재미있지 않다.
匱는 ‘상자 궤’지만, ‘다할 궤’로 쓰이기도 한다.
왜 그런가?
물건이 상자 안에 감춰져 있으면,
있으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즉 實若虛라 실한 듯 하되, 허한 바라,
이를 취하여, 다하여 고갈된 뜻을 이끌어내었기 때문이다.
匛는 상자 안에 시체를 넣는 것이니 ‘널 구’라 한다.
그런데 왜 久인가?
이는 시체는 다시 되돌려 산 모습으로 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匛는 그런 것이 상자 곽 안에 들어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匛는 古字라 폐하여지고 대개 이제는 柩로 쓰인다.
그런데 우리 식으로 보자면, 시신을 넣을 궤를 두고,
그저 관(棺)이라 하는데 익숙해져 있지만,
여긴 좀 자세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래, 말이 나온 김에 조금 더 살펴본다.
곡례(曲禮)에 따르면, 시신이 침상 위에 놓여 있을 때는 시(屍)라 하지만,
이제 관(棺) 안에 넣어지면 구(柩)라 칭하게 된다.
그러니 허실(虛實)에 따라 그 지칭하는 바가 다른 것이다.
비어 있을 때는 관(棺), 넣어져 있으면 구(柩)가 된다.
그러니, 구(柩)는 관(棺)이라 할 수는 있지만,
관(棺)은 구(柩)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고인을 내갈 때, 운구(運柩)라 하지,
운관(運棺)이라 하지 않으니 바로 이를 따름이다.
글자를 연구함은,
말과 글을 바로 함의 기초로 삼고,
제 뜻과 생각을 제대로 펴기 위함이라,
길섶 따라 걷다 숲길 안으로 조금 더듬어 가보았다.
잠시 옆길로 새었다.
다시 돌아와 끊긴 말을 잇자.
질곡(桎梏)이 차꼬와 수갑을 지칭함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꿈결이라도 결코,
“... 고난의 질곡을 걷는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없다.
혹여 질곡을 진 골짜기인 것이라도 여기고 있었던 것일까?
설마.
이 정치인의 대담을 읽다가,
현 시국에 대한 진단이 제법 그럴싸하다 싶었다.
하지만, 몇 가지 부분에 있어서는 그와 의견이 다르다.
특히 이 부분은 틀린 진단이라 생각한다.
이재명 지사 논란이 결국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을 떨어뜨린 그 주요 요인이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서는 “분열로 보는 것이다. 저놈들 싸우고 있구나. 싸우니까 지지를 하지 않는 것이다. 즉 이재명 지지자가 문재인 대통령 지지를 철회하는 것이 아니고 중립지대에서 관망하던 사람들이 보기에 두 세력이 싸우니까 보기가 싫다고 빠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출처 : shinmoongo)
문파 녀석들이 이전투구(泥田鬪狗)로 탐욕에 젖어 싸우니까,
문가 정권에 넌더리가 나서 지지를 철회한 세력이 왜 아니 없겠는가?
하지만, 이게 문재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것이 아니란 그의 지적엔 동의할 수 없다.
문뽕들의 문제는 무엇인가?
문을 보위(保衛)하기 바빠, 문을 언제나 사태의 현장에서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무류(無謬)의 신적 영역에 거(居)하여 있고,
다만, 아랫것들이 잘못을 할 뿐이라고 외친다.
극문은 이런 주장을 넘어,
저들의 잘못조차 잘하는 짓이라 적극 동조하기까지 한다.
허니, 세칭 이들을 두고 오죽하였으면 똥파리라고 이르고 있겠음인가?
나는 아랫것들과 문신(文神)을 분리하는 것은 옳지도 않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문이 청맹과니 당달봉사도 아닌데, 설마하니, 저들이 하는 짓을 모를까?
이재명 죽이기에 안달이고, 삼바 사태에 면죄부를 준 것을,
그가 충고하고, 제지하려면 얼마든지 할 만한 위치에 있다.
적폐청산을 하겠다는 시민과의 약속을 지킬 의사가 있었다면,
이리 사태가 구부러지는 것을 적극 바로 잡을 수 있었다.
허나, 인도, 북한까지 이재용 데려가 등을 두드린 것이 그가 아니었던가?
책임 당사자가 바로 그다.
그는 하늘가 떠있는 채색 구름 위에 거(居)한 존재가 아니다.
이 난장판 시장 바닥에서 셈판을 들고,
시민들의 이해를 위해 구슬땀을 흘리며,
멸사봉공할 책무를 가진 대표 일꾼일 뿐이다.
헌즉 저 정치인 문재인 지지율 하락을 두고,
문재인 지지 철회가 일어난 것이 아니란 지적은 올바르다 할 수 없다.
중립 지대에 있는 이 뿐이 아니고,
민주당을 지지한 세력 중에서도 깨어 있는 시민도,
적지 아니 저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가 어제 페이스북에 남긴 말.
나의 행복이 모두의 행복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 : facebook-moonbyun1)
이 말은 좀 해석상 여러 오해와 갈등을 일으킨다고 본다.
좋게 해석하자면,
철학적으로 개개인의 행복이 전체의 행복을 구성하니,
내 행복이 모두의 행복으로 번져나가길 기원하는 말로 보아줄 수도 있다.
하여, 여기 문장 중 나를 문재인 개인 아니라, 일반 명사로 취급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이 모순과 욕망이 뒤엉겨,
서로 간 갈등 때리는 현실의 세계에선,
행복보다 불행에 처한 사람도 결코 적지 않다.
문장 중 나를 문재인 개인으로 읽으면,
‘나의 행복이 모두의 행복이 되길 바랍니다.’
이 말은 불행에 처한 이들을 조롱하며 염장 지르는 말이 되고 만다.
안일하고 공허한 서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이 양자의 해석상의 차이로,
쓸데없는 혼란을 일으키고, 갈등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내가 불행하더라도, 모든 이들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겠다.’
이리 말하였다면, 늘 그러하듯 행동은 따르지 않더라도,
정치인의 수사로선 한결 그럴듯하였을 것이다.
(출처 : facebook-moonbyun1)
그리고,
예수는 따뜻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그는 가난한 이에게 슬픔을 느끼는 것을 넘어, 불의에 분노하시는 분이기도 하셨다.
예수는 이리 말했다.
“내가 평화를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불을 주려고 왔다.
아비와 자식이 불화하고,
시어미와 며느리가 불화하며,
형제간에 불화시키려 왔을 뿐이다.”
성전 앞에 늘어선 환전상, 장사치를 채찍으로 몰아내며,
예수 역시 분노하시지 않으셨던가?
정작 예수는 피 흘려 아파하시기에 바빠,
사랑하실 여가조차 없으셨다.
예수는 남이 쓴 시처럼 나를 꾸미기 위해, 내게로 견인해 끌어드리는 동원의 객체가 아니다.
실천적으로 내가 오늘 피 흘리며 십자가를 짊어질 바로 주체적 인격, 행위의 상징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공허한 말이 아니라, 행위로써 입증할 때라야,
내가 예수가 된다.
그러할 때라야,
예수는 여기 이 땅에, 다시 살아온다.
(출처 : facebook-moonbyun1)
문재인 그의 페이스북 이마에 떡하니 올려진 이미지다.
정치는 그저 고상한 시나 읊는 일로 영위되는 것이 아니다.
이 피비린내 나는 현장에서,
정의를 위해 칼을 휘두르고,
때론 개똥밭이라도 바짓단을 걷어 올리고 들어가는 일도 불사하지 않아야 한다.
저들은 입만 열면,
반칙과 특권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 하지 않았던가?
적폐청산 제대로 된 것 거의 없다.
보아라, 삼바 사건 하나 처리하는 것만 보아도,
저들은 권력의 단술을 마시며,
음풍농월(吟風弄月) 풍류나 즐길 위인들이지,
결코 오늘의 이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을,
이들이라 여겨지지 않는다.
나는 실망을 넘어, 분노하고,
분노를 넘어 저들을 저주한다.
시민 혁명으로 마련된,
절체절명(絶體絶命),
결코 놓칠 수 없는 적폐 청산의 기회를 무산 시킨 저들을 용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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