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살주, 윤동주 그리고 계량(季梁)
김주영의 소설 객주에 조형준이라는 쇠살주가 등장한다.
쇠살주란 ‘소의 흥정을 붙이는 이’를 이름이니 곧 소장수쯤 된다.
그런데, 나는 이 단어를 대하면 왠지 ‘백정’이 떠오른다.
아마도 단어 가운데 있는 ‘살’자가 殺로 읽혀져 그런 의심이 자연 들기 때문인가 한다.
'소를 살리는 주인'이 아니라, '소를 죽이는 주인' 이를 쇠살주라 하는게 아닌가 하는
확인되지 않는 나름대로의 유추연상인 게다.
하여간 쇠살주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이미지가 내겐 제법 흉한 것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인상도 거무죽죽 험악하게 생기고, 성질도 모진 위인이겠거니 하는 공연한 짐작이다.
하지만, 소설 객주에 등장하는 쇠살주 조형준은 이와는 반대로 제법 중후한 위인으로 그려져 있다.
오늘 산에 오르니 선래객(先來客)이 약수터에서 물을 받고 있었다.
앞에 받는 이가 있을 때 나는 그가 가급적 신경을 쓰지 않도록, 멀찌감치 물러나 있는다.
물 받고 있을 때, 뒤에서 서성거리며 채근하듯 물통을 이리저리 옮기며 부산을 떨면,
선객은 마음이 편치 못하여 폐가 되는 이치를 아는 까닭이다.
얼추 그가 다 받을 양 싶을 때, 흘깃 그쪽을 쳐다보니, 수건인지 걸레짝인지가 떡하니
물 나오는 대롱 옆에 걸쳐져 있다.
약수터 풍경은 정갈해야 마땅할 것인즉,
우선은 흉해 보인다.
그는 그 걸레를 집어 대롱 밑에 대고는 한참 빨더니만 그것으로 열두어개 물통들을 일일이 닦는다.
약수터에서 다른 사람이 뻔히 보고 있는데,
물 나오는 곳에다 대고 걸레짝 아냐, 수건인들 태연히 빨 수 있음인가 ?
(이즈음엔 약수물이 아니고 흐르는 계곡물에 발만 담가도 위법이다. 백번 잘한 일이다.
무망한 것임에도, 나는 입산자격고시를 행여 시행하지는 않으련가 늘 궁금히 기다린다.)
저들의 저 안하무인 뻔뻔함이란 도대체 어디서 연원하는 것일까 ?
그러더니 이어서 등산 지팡이까지 대롱 밑에 대고는 닦아댄다.
하도 인사불성(人事不省)인 산동네 형편인즉, 이 정도는 시비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나는 내게 꾹 참기를 조심스럽게 당부한다.
실인즉 알고 보면 나는 내가 생각해도 성질이 사나운 편이다.
뻔한 길 놔두고 길 아닌 길을 탐하는 자를 보면 그 성질 나올까 나는 내게 두렵다.
이것으로 그쳤으면 그나마 다행이었을텐데,
뒤미쳐, 벗어둔 헝겊모자를 그 물 밑에서 박박 주무르며 닦지를 않는가 말이다.
물을 받았으면 이내 후래객에게 자리를 양보하지는 못할망정,
제 할 일은 다하고 있음이 아닌가 말이다.
게다가 약수터에서 빨래까지 해대는 저 끔찍한 모습이라니,
참으로 아득한 세상이다.
족히 60이 넘을 저들을 이제와서 훈육으로 이끌 것인가,
벌로서 가르칠 것인가 ?
참람스런 정경이다.
‘거기다 모자를 빨면 아니되지 않겠습니까 ?’
기어이 그에게 이리 한마디 던졌다.
짐작하는 바 많은즉, 평소 저들과 나는 이야기 나눈다는 게 조심스럽다.
그 위험을 알기에 나는 주로 산천초목을 상대하기로 작정한지 오래 전이다.
불통이니까.
섭섭한 노릇이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흐르는 물이라 괜찮습니다.”
순간 스크류 朴의 “대운하에 배가 지나면서 스크류가 돌기 때문에 수질이 개선된다.”라는
대명천지 밝은 시절 저 천연덕스런 말이 휑하니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저들의 저 재치와 순발력이라니 사뭇 놀랍지 않은가 말이다.
그들과는 말을 나누면 아니된다.
나는 내게 타이른다.
저들은 시비(是非), 즉 옳고 그름을 가리려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이해(利害), 즉 자신에게 손해나고 이익됨을 헤아려 말을 한다는 것을
나는 진즉 깨닫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저들과 나는 의지하는 frame이 다른 게다.
저들은 시비선악(是非善惡)의 세계에 거하지 않고 있음이다.
다만 이해득실(利害得失)의 세계에 기꺼이 즐겨 갇혀 있음이다.
하기에 지금의 만금몰입(萬金沒入) 대통령과 함께
국토가, 뭇생명이 어찌 되든 말든
대운하를 파서, 걸판지게 치룰 황금(黃金) 잔치를 꿈꾸고 있지 않음인가 말이다.
의리(義理)와 명분(名分)이 중(重)한 게 아니라,
정리(情理)와 실질(實質) 즉 욕정(慾情)과 사리(私利)만이 귀(貴)한 게다.
이를 요즘엔 그저 간단히 실용(實用)이라 부른다.
체용이라면, 체(体)는 진작에 버림을 받았음이다.
용(用)이야말로 밥이요, 돈이요, 命인 게다.
내가 보기엔 이는 용(用)도 차마 아니다.
그저 질펀한 욕망이다.
천하 사람들 모두 하나같이 대의(大義)가 아니라 대리(大利) 쫓기에 바쁘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헤아려 보니 딱 35년전 일이다.
남산에 올라가 보니,
見利思義 見危授命
(견리사의 견위수명)
이 글귀가 안중근의사의 그 잘린 손가락 장문(掌文)과 함께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이 모진 광기의 시대, 이악스런 세상에 아직도 남아 있을런가 ?
하기사, 남아 있은들 욕이나 더하고 있을 터인데,
새삼 뭣이 염려할 일이랴.
도산 안창호가 안창호씨로 불리는 세상,
안중근의사의 見利思義인들 온전할 까닭이 있겠는가 ?
하기사 전직 노무현은 일본 TV 쑈에 출연하여,
실패한 김구가 되지 않겠다며, 링컨을 한껏 치켜세워 올렸었다.
김구가 실패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역사인식이 일국의 정치대표에게서 오늘 발견된다면,
그것은 김구가 실패한 것이 아니고, 정작은 우리 모두가 실패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
이런 실패의 구조속에 안창호씨란 호명이 후임 정치대표 입에서
스스럼없이 튀어나오는 게 새삼 무슨 놀라운 일인가 ?
안창호씨라고 부른 위인은 외려 견리망의(見利忘義)를 앞장 서서 외친다.
아니라면, 멀쩡한 국토 배갈라 대운하 파자고 혈안이 되고,
미친소 들여오며 희희낙락할 수 있음이뇨.
정명정분(正名定分)
추수(秋水)같이 정갈한 마음,
추상(秋霜)같은 의로움은 이젠,
펄펄 끓는 여름날 욕망의 화탕(火湯)가마에 다 녹아나고 있다.
다시 되돌아와,
저이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우물가 아낙네처럼 혼자 제 선행을 주어섬기기 바쁘다.
주변 쓰레기 봉투를 매일 치우고 있다며,
자신은 선량하며 양심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한참 선전해댄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이리 양심껏 살아왔다고 말한다.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차라리 윤동주의 시를 다 외워대었다면 박수라도 쳐주었을텐데.
되다만 시 쪼가리를 동원하며 그는 지금 제 양심에 한껏 분칠을 해댄다.
한편 그가 측은해진다.
아니 고대 방금 ‘빨래’한 파렴치한 현장은 어디 가고,
‘개발에 주석편자’도 아니고,
느닷없이 왠 윤동주가 동원되며,
푼수에 어울리지 않게 꾸어다 쓴 사치가 질펀한가 말이다.
추임새 곁에서 넣어주고, 장구라도 쳐대면,
소시적에 도둑잡는 기찰포교(譏察捕校)였다며 기염을 토할 태세이며,
이내, 말 달리며 왜놈 잡던 독립군이었다며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형국이다.
약수터에서 쪼그리고 빨래하던 놈이 곤두질치자 일순(一瞬)에 구국지사로 변신할 판이다.
흘깃 그의 형용(形容)을 보니,
내가 상상하던 그 쇠살주 모색(貌色)이 아연 현전(現前)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정수리에 아찔꽝 대고 도끼 한방에 저승으로 보내는 쇠백정,
어렸을 때, 판자 틈으로 훔쳐보던 그날의 그 광경이 순간 스냅사진처럼 휙 지난다.
쓰레기 봉투는 실인즉 내가 올라오면서 주워온 것을 한곳에 모아둔 것이다.
올봄만 하여도 깨어진 유리 줍다가 두어번 손가락을 베었다.
(2007.01.01부터 국립공원 입장료가 폐지되면서 이제는 쓰레기통을 다 치워버렸다.
쓰레기를 주워도 버릴 곳이 없다. 천상 집으로 가져가기 전에는 처리할 방도가 없다.
예전엔 주워다 입구에 놓인 쓰레기통까지 가져다 버리곤 하였지만,
이제는 그마저 없어졌기에 처리가 곤란하다.)
이는 청소요원에게 그리하마라며 미리 양해를 해둔 것으로,
이리 해두면 그들이 정기적으로 치워간다.
예전에는 이 골짜기는 청소요원조차 배치되지 않았던 것을,
내가 국립공원 이사장을 거쳐, 그들을 한바탕 닥달하여 그나마 이런 시스템을 정착시킨 것임이니,
그는 지금 당사자 앞에서 허풍을 떨고 있음이다.
이런 위인들과는 말을 더 이상 섞으면 아니된다.
더 나아간들 부질없는 노릇이다.
그들은 그들의 길을 갈 뿐이다.
나 역시 내 길을 가는 수밖에 없다.
나는 저 아랫 저자거리가 아니라,
정작은 근래 높은 이 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경박스런 인심이 이다지도 많음을 깨닫지 않았던가 말이다.
지금 나는 그의 ‘빨래’라는 현장행위를 지적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왜 그 사건과는 관련도 없는 그의 ‘선행’을 들어야 하는가 말이다.
그것도 진위가 의심스런 그 멀쩡한 위선을 말이다.
이 아름다운 산날의 하루(山中無曆日)를 앞에 두고.
보통 이런 '물타기'를 즐겨하는 사람들은 말은 드세지만,
실인즉 나약한 사람들이다.
강한 사람은 이리 변명하지 않는다.
차라리 주먹을 휘두르고 만다.
더 강한 사람은 잘못을 사과한다.
그 보다 더 강한 사람은 애당초 이런 짓거리를 하지 않는다.
대뜸 주먹을 내지르는 사람보다는
이런 위인은 그래도 자기 양심이 조금은 떳떳하지 않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본색이 비열하다지만, 고 갈등 분량만큼 조금 양질(良質)의 사람으로 봐줘야 할까 ?
김진형 님의 ‘악질, 저질, 범질, 선질’로 분류되는 ‘4질론(四質論)’이야말로
(※ http://bonase.co.kr/)
성선설, 성악설 보다 곱은 더 실질적인 것임을 절감하게 된다.
짬을 내어,
산에서 겪은 4질론의 실례를, 작정하고 쉬이 정리해두고픈 마음이 든다.
***
내려오는 길,
부득불 고사 한토막이 떠오른다.
이에 여기 기록해둔다.
때는 전국시대, 위(魏)나라가 조(趙)나라의 도읍인 한단을 치려고 하였을 때의 일이다.
계량(季梁)이라는 사람이 그 소문을 듣고 위왕에게 알현하기를 청했다.
계량왈,
“지금 이리로 오는 도중에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수레를 북쪽으로 몰고 가면서
‘초나라로 가는 참이다’”라고 말하더군요.
“초나라는 남쪽에 있을텐데 왜 북쪽으로 달리고 있는가 ?”
라고 물었더니 그자가 말하길
“말(馬)은 아주 잘 달리지”
라고 대답합니다.
“말이 잘 달려도 이쪽은 초나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라고 말한즉,
“여비도 넉넉하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
“그렇지만 길이 틀려”하고 거듭 일러주자 그 사람은
“마부의 솜씨가 여간 아니라네”라고 버티더군요.
“이런 형편이라면 갈수록 길은 더욱 초에서 멀어질 뿐입니다.
지금 왕께서는 패왕(覇王)이 되어 천하의 신뢰를 얻으려고 하고 계십니다.
나라가 크고 강하다는 것만 믿고 한단을 쳐 영토를 넓히고 이름을 떨치려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섣불리 움직이면 그만큼 패업에서 멀어질 뿐입니다.
초로 가시려고 하면서 반대로 북쪽을 향해 가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
위왕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공격을 중지했다.
이게 남원북철(南轅北轍) 또는 북원적초(北轅適楚)의 고사다.
(※
轅 : 끌채 원
轍 : 바퀴자국 철
適 : 맞을 적, ‘가다’라는 뜻도 있음.
)
지금 당장 뻔히 벌어지고 있는 현장임에도,
정반대되는 믿음을 강매하는 사람이
저 남원북철(南轅北轍)의 사나이뿐이겠는가 ?
오늘 만난 저 쇠살주 형용의 노추(老醜) 역시,
얼추 2300년전 남원북철(南轅北轍)의 사나이, 그 현신(現身)이 아닐런가 싶은 게다.
그대 노루꼬리만한 잔명(殘命)이 서럽지 않은가 말이다.
저녁놀이 피빛으로 붉은 까닭이 무엇이나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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