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빗소리

소요유 : 2008. 7. 20. 14:46


내가 사는 곳은 북한산 기슭이다.
창문을 열면 바로 북한산을 면하기 때문에 바람이 삽상하니 불어든다.
저 아랫 동네는 열대야니 하며 더위 때문에 밤잠을 설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조금 얇기는 하지만, 겨울용 이불을 아직도 덮고 잔다.
새벽녘에는 어깨께가 조금 춥기 때문이다.
이곳은 때로 6월에 이르도록 난방을 할 형편이지만,
나는 추위를 즐기는 편이라 매양 낙락(樂樂)하다.
여기는 서울이 아니라 그저 산촌(山村)인 게다.

내가 본향(本鄕)이 서울인즉, 이리저리 옮겨 살아보았지만,
여기처럼 행복한 곳을 알지 못할새라.
내가 늘 말하곤 하는,
서울에서 남은 마지막 '소도(蘇塗)' 같은 곳,
그리하기에 서울에게, '북한산은 위대한 축복이다.'
북한산을 곁에 모시고 사는 나 역시 그 덕앞에 여며 삼가 흥감하지 않을 수 없음이다.

간밤에 비가 무섭게 내리셨다.
잠결에 서창(西窓)밖 빗소리가 얼핏 들려온다.
귀 빗장을 설핏 열어두고 빗소리를 듣는다.
앞 베란다 쪽으로는 도랑물이 내질러 달려가는 우당탕 소리 또한 장쾌하다.

오밤중 홀로 모셔 듣는 빗소리는 얼마나 청아한가 말이다.

옛말에 이르길 삼희성(三喜聲)이라 하여,
갓난아이 우는 소리, 글 읽는 소리, 다듬이질 소리를 꼽았다.

아가 우는 소리는 미래의 소망이 영글어 가는 징표며,
글 읽는 소리는 과거 옛 성인이 밝힌 道를 따라가며 익히는 불역열호(不亦悅乎)의 경지며,
다듬이질 소리는 지금을 착실하게 살아가는 맥동(脈動)의 외현(外現)이다.
삼세(三世)를 이리 아우렀으니,
예전엔 이들 소리를 삼이웃이 모두 기꺼이 돌봐 즐겼다.
이렇듯 삶에 윤기가 있고 여유가 있었음이다.

(하지만, 요즘에 이들이 다 없어졌기도 하지만, 있어도 소음으로 취급된다.
세상이 아득바득거리는 곳으로 바뀐 까닭이다.
그러하니, 혹 어떤 이가 있어 이를 소음으로 느낀다고 마냥 나무랄 일도 아니오,
그리 소리 내며 삼가지 못하는 이가 외려 예의를 모르는즉 그릇되다 하겠음이다.  
다만, 그리 변한 세상이 딱할 뿐이다.)

문득 여기 빗소리를 더하고 싶은 게다.
사람들이 잠들고 있음에도,
꿈결에 몰래 다가와 가슴을 가만히 어루만져 적시며 사라지는 고은 손.
자연, 산, 소나무, 풀, 사슴, 소, 강아지 ...
빗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면
이들이 내는 방울소리가 들린다. ... 천뢰(天籟), 산뢰(山籟), 송뢰(松籟) ...

세상엔 삼희성(三喜聲)만 있는가 ?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삼악성(三惡聲)이 있으니,
이는, 사람이 죽어 초혼(招魂)하는 소리,
불이야 외치는 소리, 도둑이야 하고 튀기는 소리가 그것이다.

좋은 소리만 듣겠다고 삼악성을 애써 듣지 않겠다 하는 것도 옳지 않겠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한들 도리가 없으니,
요즘 소식은 삼악성이 8, 9할을 차지하고 삼희성은 거의 사라졌다.

나라에서는 병든 소 사오겠다고 용을 쓰고,
국민들은 아니 먹겠다고 촛불로 가슴을 지지며,
적(賊)들을 향해 외치고 튀기는 소리 내기 바쁘다.

반면, 내가 한 때 즐겨 찾던 앙성댁이라는 사이트는,
온전히 삼희성으로 곱게 단장한 소리만 들린다.
성인군자, 도통한 사람이 아닐진대 때로는 삼악성 소식도 전했으면 좋으련만,
용케도 피해간다.

살면서 태어나는 사람이 있으면 죽는 사람이 있을 터,
그러하니 삼희성에서는 아가 울음소리를 들고 있고,
삼악성에서는 초혼하는 소리를 들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

초혼하는 소리가 슬픈 것을 알기에, 아가 우는 소리가 기쁨의 소리임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불이야 외치는 소리가 가슴을 쿵탁쿵탁 놀래 두들기기에,
아낙네의 저녁 다듬이 소리가 아련하게 느껴질 수 있음이요,
도적놈 튀기는 소리가 흉하기에, 선비 또는 학동의 글 읽는 소리가
청아하니 맑고 아름답다는 것을 안다.

작금의 한국 사회처럼 진종일 삼악성만 가득한 사회도 문제지만,
앙성댁 사이트처럼 삼희성만 들리는 것도 내겐 외려 의심스럽다.

내가 빗소리를 희성(喜聲)에 넣고 싶다고 했지만,
실인즉 그리 하기엔 아직은 한가한 소리다.
촛불을 드는 사람이든, 막는 놈이든
모두 빗소리는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내가 빗소리를 들으며 자연의 소리, 소, 강아지 소리를 들을 때,
거기 미소만 있는 게 아니다,
빗소리에는 저들의 신음 소리가 묻어 있음이다.

대운하, 동물성 사료, 좁은 울타리, 보신탕 ...
눈깔을 시뻘겋게 달궈 그저 쥐어 짜내기 바쁠 뿐,
도대체가 성찰이 없다.
촛불 드는 이들은 동물의 신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들이 병에 걸릴까 걱정일 뿐이고,
촛불 막는 놈들은 그저 돈벌기에 혈안이다.
저들에겐 빗소리가 한낱 물소리에 불과하단 말이 아니겠는가 ?
(※. 참고 글
☞ 2008/05/16 - [소요유] - 광인현상(狂人現象) - 광우병(狂牛病)과 마녀(魔女)사냥
☞ 2008/05/08 - [소요유] - 가래나무와 광우병
)

빗소리에는 미소와 함께 신음이 있음이니,
그것은 희성(喜聲)도 아니오, 악성(惡聲)도 아니오,
절절 사무치는 추성(秋聲)인가 하노라.

한밤중 장마 빗소리에서 종내 가을비를 새기고야 마는
이내사 나는 도대체 무슨 물건인가 말이다.
아, 촛불 든 이든, 아니든 당장이라도 고기 한 점씩일지언정 덜 먹고,
인간의 등천하는 욕심에 깔려, 가없이 신음하는 동물들을 생각하라.
하마, 죄스럽지 않은가 ?

만뢰구적(萬籟俱寂)
문득 사위(四圍)가 적요(寂寥)해지는 기분이다.
한 밤의 빗소리는 실로 야릇하니 현묘(玄妙)하다.
나 역시 넋 실 풀려, 까무룩 그 길로 젖어 침몰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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