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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에 돌아온 뱀

농사 : 2008. 8. 19. 12:15


8년 만에 돌아온 뱀

주말마다 들르는 밭농사.
작물을 키우는데 드는 공보다 풀을 뽑는데 드는 정성이 몇 십 곱은 더하다.
낫으로는 감당치 못하여 예초기를 장만했다.
잠깐 소홀히 하면, 이내 풀은 허리께를 넘게 자란다.
종일 예초기를 메고 풀을 베어도 채 반도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다.

오른쪽 엄지손가락 안쪽이 볼록 솟았다.
예초기 봉을 부지불식간에 꽉 쥐어 이젠 그곳에 터잡아 못이 박혔다.
이내, 가운데 손가락도 살펴보았다.
국민(초등)학교 때, 연필 때문에 그곳에 못이 박혀 봉긋하니 솟아오르곤 했다.
아직도 그 어릴 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지금 그 공부(工夫)가 내 어디메 영혼에 자취를 남기고나 있을까?

뒷 모가지도 테를 두른 듯 까맣게 변했고,
팔뚝도 거뭇거뭇 완전 촌티가 내려앉았다.
작년에 처음 만난 이웃 밭주인은 나를 보고는 ‘백합 같다’고 했다.
요새는 이제야 ‘사람 같다’라고 말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작년엔 나를 두고 욕을 한 것은 아닐까 싶다.
아니, 금년에야말로 욕된 삶, 흉한 모습이 거죽으로 드러난 것은 아닐까?

노자는 이리 말했다.
총욕약경(寵辱若驚)
은총이든 욕됨이든 놀란 듯 대하라!
나는 진작 '☞ 2008/02/22 - [소요유/묵은 글] - 링컨의 얼굴'에서 이를 경계하지 않았던가?

그 이웃도 그렇고, 우리 밭 일부를 빌려준 서씨 할머니도 모두 제초제를 사용한다.
제초제를 뿌린 현장은 누렇게 풀이 말라 자빠져 있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작물들이 가지런히 쭉쭉 뻗혀 자라는 모습이기에,
그 밭주인 농부가 썩이나 부지런하게 보인다.

반면, 우리 밭은 그저 풀밭처럼 보인다.
고구마는 모종을 500개를 심었지만 풀이 자랄 때,
손이 부족하여 미처 돌보지 못했더니 지금은 수십 그루만 겨우 숨을 붙이고 있다.
나머지는 모두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다.
땡볕에서 하루 종일 숨을 헉헉 거리며 심었던 것인데,
완전 무위로 끝나버렸다.

전업농이 아니라 배부른 소리인지 모르지만,
나는 그래도 이 모든 게 너무 자랑스럽고 밭 일이 즐겁다.
배우는 바도 사뭇 깊고, 절절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앞으로 혹여 전업농으로 변신하다고 해도 이럴 수 있을까?
나는 내게 주문을 걸듯이, 이리 외며,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자 한다.

오늘도 풀밭에서 고라니 새끼를 또 보았다.
서로 동시에 깜짝 놀란다.
그의 습성을 이제는 안다.
그는 한참 달려 풀무더기 속으로 숨는다.
그리고는 꼼짝도 않는다.
나는 예초기 작동을 멈추고 멀리 돌아 그가 웅크린 쪽으로 다가간다.
그는 몸을 틀고 머리를 외로 돌려 나를 쳐다본다.
나 역시 가만히 마주 쳐다본다.

몸은 도망갈 곳을 향하여, 미래를 예비하고,
눈은 나를 향해 두고, 현재를 맞아 경계한다.
이 이중의 팽팽히 긴장된 자세가 놀랍지 않은가?
나는 ‘생명 충동’, ‘생의 비약’을 떠올리며,
아연, 충격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동시에 울컹 슬픔을 느낀다.

그나 나는 전생에 지은 인연으로 이리 만나고 있는 것일까?
녹야원(鹿野苑)
부처가 처음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설법하였다던 초전법륜(初轉法輪)의 성지가 문득 떠오른다.
부처의 전생 설화에 금빛 사슴 이야기가 있다.
부처와 사슴은 인연이 깊다.

저 고라니가, 혹여 그 때의 그가 아닌가?
나는 여기서 지금 (Here and Now),
저 고라니와 무슨 이야기를, 무슨 신화를, 무슨 전설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아름답다.
아름다워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못내 슬프다.
슬퍼질 것이란 예감이 든다.

은빛 아름다움과 잿빛 슬픔.
이야말로 나의 평생 화두가 아니던가?

콩밭은 전부 그의 전속 관할 하에 맡겨두기로 한다.
나는 올해 농사는 그에게 양보하려고 한다.
지금도 기백평의 콩밭이 콩줄기 하나 보이지 않고 풀밭으로 변해버렸다.

***

오늘 아침 이웃 밭주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분은 8년간 한 번도 보지 못한 뱀을 오늘 두 번씩이나 제 밭에서 목격했단다.
안부전화의 형식이지만,
짐작컨데, 모종의 질책이기도 하리라.

그분은 이제껏 제초제로 농사를 지어왔다.
그분 역시 전업농은 아니지만, 제법 재미있게 농사일을 즐기신다.
그런데, 금년에 본격적으로 농장을 조성했다.
그리고는 고가의 작물을 심었다.

나는 우리 밭에서 고라니가 그리 넘어가 피해를 입힐까 사뭇 염려가 된다.
뱀을 그분은 몹시도 무서워한다.

나는 그의 전화에 이리 화답한다.

“뱀이 돌아 온 것은 땅이 살아났다는 소식이다.”

개구리, 두꺼비, 까치, 참새, 메뚜기, 방아깨비 ...
그리고 마침내 뱀이 돌아온 것은 축복이 아닌가?
고라니가 나타난 것은 은총이 아닌가?
영악(靈惡)한 인간들은 이를 재해라고 말하리라,
하지만, 최소한 땅에겐 축복이 아닌가 말이다.

설령, 그의 전화가 질책이라도,
나는 생명과 바꾸지는 않으리.

제초제가 무엇인가?
그것은 저 끔찍한 고엽제의 또 다른 은유다.
인간에게 이익이되느냐, 해가 되느냐라는 유일한 기준에 의해,
해된다고 규정된 것은 몽조리 살육해버리고 마는 폭력이다.
미약(媚藥) 같은 것.
시든 생식기를 약으로 불붙여 성욕을 일으키게 하고야 마는
맹목적 생의 의지, 충동.
결국은 이 맹목이 나외의 생명을 모두 죽여버리고야 만다.
그리고도 사람들은 편안하다.
사람들이 편안하다고 느끼는 그 아래,
온갖 생명이 나자빠져 신음하고 있음은 이젠 양심에 아무런 가책이 되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멀쩡한 국토를 배갈라 운하를 내자고 기염을 토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미약은 사랑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그냥 성욕, 욕망, 허갈진 탐욕의 은유에 불과하다.
사랑의 불임(不稔)임인 것을.

그분 역시 이제는 제초제를 쓸 수 없는 입장이다.
작물을 자연농으로 만 재배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의 밭도 이제는 뱀을 맞이할 채비를 해두어야 하리라.
그분에게 전해줄 은밀한 나의 가르침은,

"땅을 사랑하라."

하지만, 말로 전하지는 않았다.
왜?
....

새로 객토를 한 끝이라, 아직 그분의 밭은 풀이 적다.
그러기에 뱀, 고라니가
우리 밭, 아니 풀밭에서 그리 넘어가서
혹 피해를 입힐까 염려가 되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우리 밭과의 경계에 그물을 쳐서 고라니의 월경(越境)을 방비하였으면 싶은데,
그것은 그분의 판단에 맡길 뿐이다.

그간 여러 사정이 있기에,
이러저런 조언을 드리는 것을 나는 삼가고 있다.

나로서는 뱀은 참을 수 있지만,
고라니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정말 고민이다.

저 어린 것을 다치지 않게 지키는 것이야,
여름 한 철은 그냥 내버려 둔다한들,
겨울은 어떻게 지낼 것인가 사뭇 걱정인 것이다.

우리 밭은 산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조각달처럼 뱅 둘러 난 도로를 경계로 군부대, 민가 등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주변지역보다 높은 언덕을 이루기에 고립된 섬같은 형상이다.
(어떻게 하다가 우리 밭에 자리를 잡은 것일 텐데,
어미는 봄에 한번 보았지만, 현재는 새끼만 목격된다.
혹 밤에는 새끼를 보려고 올는지도 모르겠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고라니를 산으로 쫓을 수도 없다.
잘못하다가는 도로 쪽으로 도망가다 차에 치어죽을 우려도 있고,
이웃 사람들에게 들키게 하고 싶지도 않다.
행여 그들이 흉한 마음을 내지 않으란 보장이 없다.

자 어찌 할 것인가?
이것이 요즘 내게 부여된 또 하나의 숙제다.

※ 참고 글

☞ 2008/07/23 - [농사] - 아기 고라니
☞ 2008/07/28 - [농사] - 아기 고라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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