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실 이야기
매실나무가 제가 나다니는 길 구석에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서있습니다.
도시라 그런지 봄철 꽃이 피어도 그게 매실임을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더군요.
그런데, 지금 몽실몽실 알이 하루가 다르게 차오르고 있습니다.
오늘 무심히 보다가 깜짝 놀랍습니다.
어렸을 때 놀던 유리구슬만하게 자라 있었습니다.
저의 맘 속 매실은 어떠한가 ?
참으로 세월만 무상할 따름입니다.
저 아래 어느 글에선가 bongta가 “매실이 익지 않았다” 운운의 말을 했습니다만,
마침, 아까 ooo님 글의 댓글 23/30, 18/30에서
(* 아래 말미 댓글 모음 참조)
“이 때, 먼저 즉심즉불(卽心卽佛)이란 강물에 들은 자들은 모두 익사했음이라.” 이리 써놓고
외출을 했더랬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이게 정확한 말이 아니더군요.
그래 눈 밝은 이가 있어 그 잘못을 지적하지나 않을까 하여,
빨리 돌아가 소명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맘을 바로 돌려 먹었습니다.
사연인즉, 익사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를 바로 잡지 않았다한들, 그가 새삼 제 글로 인해 익사할 까닭이 없으니,
저의 조급함이야말로 익사할 바로 그것인즉, 이내 내버려두었던 것입니다.
그래 이제, 한가하니, 非익사자 그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는 매화의 주인공인즉, 마침 시의도 적절하군요.
달마가 선종 제1조입니다만, 서역국 즉 인도에선 부처이래 제28조에 해당됩니다.
그가 동쪽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일조가 됩니다만, 그의 스승 즉 27조에 해당하는 분이 반야다라입니다.
그 반야다라가 예언하길
“出一馬駒 踏殺天下人”
- “말 새끼 하나가 나와 천하사람을 모두 밟아 죽이리라”
이리 말합니다.
그 당사자가 그 유명한 馬祖道一입니다.
그 밑에 수많은 선사들이 배출됩니다.
마조의 제자 중 대매산 법상(大梅山 法常) 선사가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끌어봅니다.
어느날 대매(大梅)라는 승려가 처음으로 마조를 친견하고 나서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
마조가 말했다.
"현재의 이 마음이 곧 부처다(卽心是佛)."
이 말을 듣고 대매는 문득 깨달았다.
이후 그는 대매산으로 돌아가 몇 년이 지나도록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어느 날 마조는 한 승려를 보내 그를 시험해 보도록 했다.
승려가 대매에게 물었다.
"도대체 마조 스님께 무슨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얻으셨습니까 ?"
대매가 말했다.
"현재의 이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을 들었지."
"그런데 요즘 들어 마조 스님의 말씀이 좀 달라지셨습니다."
"어떻게 달라졌단 말인가 ?"
"이제 마조 스님은 이 마음 자체는 마음도 부처도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非心非佛)."
대매가 말했다.
"그 늙은이가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 짓을 언제나 그만둘까?
그가 아무리 '비심비불(非心非佛)'을 말한다 해도 나는
오로지 '즉심즉불(卽心卽佛)'일 뿐이다!"
승려가 돌아와 마조에게 사실을 이야기하자 마조가 말했다.
"서산의 매실이 다 익었구나!" - 梅子熟也
“따먹고 싶은 사람들은 가서 마음대로 따먹어라”
이 마지막 부분.
서산의 매실이 곧 대매산에 깃든 대매 법상입니다.
30년 홀로 은거하였으나,
저희 동네 그 매실처럼 할 일을 이미 다 마친 것이지요.
아까의 그 댓글에서도 말했습니다만,
일찍이 마조가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 외치니 모두들 늦을세라
다투어 이를 껴안고 그 강물에 뛰어듭니다.
하자, 마조는 비심비불(非心非佛)로 바꾸어 선양(宣揚)합니다.
이 때, 먼저 즉심즉불(卽心卽佛)이란 강물에 들은 자들은 모두 익사합니다.
가엽지만, 법의 바다(강)에선 그들을 죽임은 마땅한 노릇입니다.
마조의 친절한 말씀처럼 우는 아이 달래는 말(爲鳴止小兒啼)이 즉심즉불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비심비불 또한 알사탕이 왜 아닐런지요.
다만 대매만 우는 아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익사자들은 곧 남이 장에 가니 똥지게라도 매고 따라나서는 격입니다.
제가 그 문제의 곳에서 말하길
“이런 싸움질을 삼칠회(三七回) 스물한번 치루어낸 이를 무릇 어른이라 합니다.”
이리 비유하였습니다만,
이를 “어른이 되기 위해 스물한번의 싸움이 필요하다.”라는 투로 독해하는 사람이 나타나더군요.
이런 사람은 그나마 제글을 오독하여 다행이지,
제 말을 자신의 방식대로 믿는다면 아마 21번 손가락 꼽으며 부러라도
꼭 채워놓듯 싸움질을 할 그릇입니다.
이 자 역시 즉심즉불(卽心卽佛)이란 강물에 익사할만한 위인인가 합니다.
그렇다면, 매실 익기를 기다리기 전에
매실나무라도 먼저 심는게 먼저일까요 ?
실인즉, 대매(大梅)는 매화나무에서 열리는 것이 아닌즉
나무를 탓할 까닭이 없겠습니다만,
천제(闡提-Icchantika)가 있기는 있을까 싶은 생각에 빠져드는
매화열매 익어가는 아름다운 밤입니다.
매실이 익으면,
함께 따먹기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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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모음>
bongta :
ooo님/
권태란 글로 시작된 바람이 시방대중을 이리 몰아 붙이고 있으니,
권태의 법력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바람 불어 불길이 치오르니,
아닌게 아니라, 당장 식어가던 노인네를 불러낼 형국입니다.
세가지 재미 있는 구경이라는 불구경, 싸움구경이 한데 아우러지고 있으니,
실로 장관이 여여하군요.
대단히 실례되는 말씀이나 객이라서 한편 자미도 있습니다만,
당사자들이야 맘이 오죽하랴 싶군요.
aaa님이야 감정상의 상해 당사자이시며,
ooo님은 舊怨도 계시던 차, 이리 휘말려 폭풍의 중심에 서시고,
ccc님 등의 대척점에 서 계신 분들의 공방이 요전에 말씀드린 바,
만화경을 그려내고 있는게 아닐런지요 ?
그럴 양이면,
한바탕 걸판지게 싸워야 합니다.
끝까지, 어금니 앙 다물고 악착같이.
그리하여, 제 집, 그 알량한 초가삼간일망정 홀랑 태워버려야 합니다.
그런연후라야, 그 잿더미 현장에서 맥 풀린 다리 꺽고 앉아,
제대로 곡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자,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승부는 싸움박질에 있는 게 아닙니다.
정작은 싸움후에 누가 호곡성(號哭聲)을 잘 내지를 수 있는가 ?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상객(喪客)은 생각하지 마셔야 합니다.
어차피 그들은 제 주린 배를 움켜쥐고 달려와,
부주돈도 내지 않고, 값싼 눈물 찔끔 흐리며,
상주(喪酒)나 탐내고, 부침개에 입맛 다시며 침 흘리기 바쁜 것들입니다.
어릿내기나 찾아 화투패 돌릴 궁리 트기 바쁜 치들이기 때문입니다.
난장질에 익숙한 망나니패들은 그 틈에 뒷간에 들어가 사내계집이
배꼽까지 맞추며 제들끼리의 축제를, 둥지 훔친 뻐꾸기처럼 즐기기도 합니다.
상주(喪主)는 곡진하게 제 맘에 다짐을 해두어야 합니다.
핏빛 절규를 소맷자락 펼쳐 허공중에 내지르며,
무엇인가를 조상(弔喪)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누구를, 무엇을 조상(弔喪)할 것인가 ?
이 물음에 제대로 답할 수 있어야 싸움에서 이깁니다.
이런 싸움질을 삼칠회(三七回) 스물한번 치루어낸 이를 무릇 어른이라 합니다.
그러나,
대개는 기껏 서너번밖에 되지 않으면서도 스물한번째 마지막 싸움이라고
의기양양합니다.
정작은 마지막 스물한번째 싸움이 더 힘들며,
대부분은 미쳐 세번 싸움도 치루지 않아 들녘에 제 해골을 누이고 맙니다.
그러하니,
싸움은 기왕에 벌렸으면 이겨야 합니다.
제 해골을 까마귀 밥으로 남기지 않으려면
누군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조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물음을 미리 챙긴 사람은 싸우기도 전에 이미 이긴 것입니다.
ooo님의 이번 싸움이 스물한번째 싸움이길 바래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쓰던 갑옷을 빌려드리며 무운(武運)을 비옵니다.
bongta의 갑옷은 “眞實”입니다.
진실이 내 편에 있다면, 천하무적입니다.
싸우기도 전에 승리는 내편입니다.
그런 연후라야 저는 상대를 향해 싸움을 즐깁니다.
bongta :
bongta는
“이런 싸움질을 삼칠회(三七回) 스물한번 치루어낸 이를 무릇 어른이라 합니다.”
이리 말했음이니, 이를 오독하길.
으음..님의
“어른이 되기 위해 스물한번의 싸움이 필요하다는 것도 딱 고만큼의 지성에서나 진실입니다.”
이런 독해는 대단히 폭력적인 견해로 읽혀지니라, bongta 다시 몇자 나려봅니다.
“어른이 되기 위해 싸움이 필요하다”
이가 바른 견해라면, 이는 폭력의 공덕이라 할만합니다만,
“스물한번 치루어낸 이를 무릇 어른이라...”할 때,
이 의미공간에서 그대의 심상에 번지는 것이 고작 폭력인가 ?
이를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고 있다면 아직은 아해라 이르지 않을 수 없음이라,
저 폭력을 어이 씻어낼까나 사뭇 걱정이올시다.
폭력을 염오하는 한, 아직은 폭력의 그늘에 갇힌 자인 것.
때론 관운장의 청룡언월도가 이규의 도끼가 내겐 은혜로 보이나니,
사천왕상 발밑에 깔린 누군가의 해골를 보고 그 넓디넓은 자비에 감읍하지 못하는 자,
상기도 봄비에 젖은 未越嶺 잿빛 비둘기인가 하노라.
일찍이 마조가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 외치니 모두들 유행처럼 이를 껴안고 그 강물에 뛰어들더라,
하자 마조는 비심비불(非心非佛)로 바꾸어 선양(宣揚)한다.
이 때, 먼저 즉심즉불(卽心卽佛)이란 강물에 들은 자들은 모두 익사했음이라.
알지니, 心字에 매이면 지옥불에 들지니.
여히, 주먹에 꿰이면 이내 조막손이 되어, 바로 들녁에 해골을 누여 까마귀밥이되리.
bongta 이리 경계의 글을 나려, 뭇 당달봉사를 경계코자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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