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과 군자표변(君子豹變)
묵은 글이다.
***
(* 이 글은 아래 ㅇㅇㅇ님의 "보호소에 정부 예산을 받는법......"을 읽고 느낀 바를 적은 것입니다. )
君子大路行
자귀대로라면 "군자는 대로를 걷는다." 이리 해석됩니다.
대개는 또 이리 알고 이해합니다.
마땅히 군자라면 큰 길을 활보해야지,
뒷골목으로 숨어 다닐 수 있는가 하는 식의 소박한 뜻풀이도 횡행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군자로서 완성되었기에 결과적으로 대로행을 할 수는 있지만,
군자가 대로행을 하는 게 자기충족적 조건행위는 아닙니다.
그와는 역으로 대로행을 하기 때문에 군자가 되는 것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군자가 따로 있어 덕을 베푸는 게 아니라, 덕을 쌓은 결과 군자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앞의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저 멀리 나와 동떨어진 특별한 존재가 있고, 그들은 까마득히 높은 경지에 처하여 생래적인 자질로 덕스런 행동을 하는 양 치부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군자와 차별되는 개인은 군자의 덕에 못미치고 있는 게 당연한 소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분히 현실순응적이고 자제적(自制的)인 이런 군자관은 옳은 생각이 아니며 마땅히 타파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누구라도 덕스러운 행동을 하면 곧 이가 군자인 것입니다.
고려시대 "만적의 난"의 주인공인 만적은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는 따로 없다." 라며 난을 일으킵니다.
원래 왕후장상의 씨 운운은 사기에 전거가 있는 말입니다만,
노예 신분으로는 만적이 제법 공부가 설치 않었는가 보지요.
요즘 말로 하면 아래 소개할 진승을 벤치마킹한 셈이네요.
사기에 보면 진시황이 죽자 2세인 호해가 뒤를 잇습니다.
무능한 호해밑에서 환관 조고는 국정을 농단할 지경이었지요.
당시 진승과 오광은 부역꾼이든가 죄인 무리이든가를(기억이 좀 가물가물하네요) 호송하는 책임을 맡게 됩니다.
호송중 비가 많이 내려 제 기한내에 도착지에 도달할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법에 의하면 기한내 임무를 완성하지 못하면 참수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니 도망을 가도 죽을 판이요, 늦게 가도 죽을 딱한 형편에 처하게 됩니다.
이에 그 무리들을 주축으로 모의하고 나중 농민을 규합하여 반란을 꾀합니다.
이 때 내건 격문(檄文) - 캐치프레이즈(catch phrase)가 유명한 "왕후장상 영유종호(王侯將相寧有種乎)"입니다.
"왕후장상에 어찌 씨가 (따로) 있으리오 !"
시쳇말로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이지 하는 격입니다.
이들은 단기간내에 파죽지세로 천하를 흔들어 놓지만 결국은 실패합니다.
그 원인은 제가 보기엔 인프라스트럭쳐의 부실입니다.
급조된 조직에 물적, 인적토대가 없었던 것. 이를 기획하고 꾸려갈 인재가 없었던 것, 있더라도 이를 활용할 지혜가 없었던 진승의 형편이 가장 주요한 원인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씨가 따로 없다라는 말.
이 인간선언이야말로 참으로 고귀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아직도 인간선언, 그리고 그 내용 이행이 절실한 곳이 지구촌에 적지 않은 실정에 비추어 보면 지금으로부터 대략 2200여년전의 이 왕후장상 영유종호(王侯將相寧有種乎)란 말 한마디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가슴 시린 테제입니다.
이렇듯 왕후장상뿐이 아니라 군자 역시 씨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대로행(=德行)임에 成君子라는 제 생각이 마땅하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저 아래 보면 강유원님의 "동물 영혼 부재"에 임한 고민의 글이 있습니다.
진승의 캐츠프레이즈의 골격을 빌어 이리 한번 작문해볼까요.
"영혼에 어찌 종간(種間) 차가 있을손가"
여기까지 말씀드리고 이어, 한가지 이야기 소재를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에 이런 글을 쓰게 된 소이연(所以然)을 밝히고자 합니다.
이번 이야기는 군자표변(君子豹變)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역의 택화혁괘(澤火革卦)에 보면 대인호변(大人虎變), 군자표변(君子豹變), 소인혁면(小人革面)이 효사에 줄지어 나옵니다.
나오는 위치를 보았을 때, 주역에선 대인을 군자보다는 상위로 취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말의 토씨는 한문을 번역할 때 해석상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군자표변을 풀어 새길 때,
군자가 표변한다라고 "가"로 토씨를 쓰는 것하고
군자도 표변한다라고 "도"로 처리하는 것하고는 천양지차가 있지요.
어떤게 바른 해석일까요 ?
군자는 알다시피 선악시비 중 선 또는 시(是)에 속합니다.
그렇다면 표변은 선, 악 중 어디에 속할까요 ?
만약 표변이 선의 속성이라면 군자는 표변한다가 바른 번역이 될 터이고,
그것이 악의 속성이라면 선량해야 할 군자조차도 표변할 때가 있다라는 의미가 될 터이니 군자도 표변한다 또는 군자조차도 표변한다라고 새겨야 적합할 것입니다.
옳은 답을 먼저 말씀드리면 "군자는 표변한다"입니다.
그렇다면 표변은 선이 되겠지요.
호랑이든 표범이든 모피가 아름답지요.
그래서 늘 이들은 인간으로부터 수난을 당합니다.
이들 모피는 특히 가을에 털갈이가 되면서 멋진 모습으로 바뀝니다.
아름답게 바뀌는 것이 호변이요, 표변인 것입니다.
몇십년이 지나도 발전이 없이 고착된 상태라면 답답한 노릇이겠지요.
그렇다고 바껴야 한다고 추하게 바뀌어서는 이 또한 곤란한 일입니다.
그러니 바뀌더라도 호변, 표변처럼 아름답게 바뀌어야 합니다.
군자는 이렇듯 표변이듯 아름답게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나 소인은 혁면 즉 얼굴만 고칠 따름입니다.
(革은 본시 가죽혁이나 바뀐다는 어의가 있습니다.)
뾰루퉁하고 있다가 자신한테 이로우면 금방 혁면하는 것 이게 소인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표변이란 말이 변절자를 비난하는 말로 쓰이기도 합니다.
손바닥 뒤집듯 재빠르게 잇속을 좇는 자를 이 말로 비웃습니다.
표변이 한국에 들어와 수난을 당하는 사례입니다.
군자는 바뀐다.
그것도 아름답게 바뀐다.
이게 군자표변의 본 뜻이라 하겠습니다.
문제는 추하게 바뀌고 있는 자신을 아름답게 또는 영악하게 바뀌고 있다고 착각하며 우쭐하는 인생이 적지 않다는 것이지요.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마무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저 아래 ㅇㅇㅇ님의 "보호소에 정부 예산을 받는법......"이란 제목의 글을 대하고 나서입니다.
저로서는 그 글에 댓글도 달았습니다만 그후 이런 저런 생각이 나더란 말입니다.
먼저 제 댓글의 내용은 저로서는 모르던 사실을 알게 돼서 감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전 사실 보조금이 이런 경로와 조건으로 수수되는지 구체적인 것은 모르고 있었거든요.
그후 산을 올랐습니다만 등행 내내 그 글 내용중 정부보조금이 안락사를 조건으로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더군요.
저는 사실 동물관련 운동에 참여한 적도 없고, 평소 깊이 있는 연구도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거든요.
관련 단체에 대하여도 아는 게 거의 없습니다.
그저 제 주변 아이들을 챙겨주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곳 아름품도 최근에 접해 아연 놀라고 있는 중입니다.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런 아름다운 분들이 이리 많은지 이제서야 알았습니다.
전 정부보조금 지원이 안락사를 조건으로 한다는 것엔 이면에 열악한 보호소의 환경이란 현실제약조건이 존재한다고 하여도 찬성할 수 없습니다.
이런 지원방식 가운데, 마치 불용품 처리비용을 처리하는 이에게 수고비로 지불한다는 것외에 다른 선의의 의지를 저로서는 찾아낼 수 없습니다.
보조금 수령이 보호소 운영에 필수불가결한 환경조건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사정이라도 문제는 있습니다.
아무리 선의로 보호소를 운영한다 하여도 운영비가 이런 이율배반적인 조건으로 공급된다면 그 비극적 전제를 일순 망각하고 무의식적이라 할지라도 운영비는 운영비대로 많이 취할 것을 기도하게 되지 않을까요 ?
운영비가 많아지면 아이들을 많이 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만큼 안락사 시킬 아이들도 늘어난다.
이런 사태는 지극히 비극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꾸로 안락사 시킬 아이들이 많아지는만큼 보조금이 많아지고 이에 따라 구할 아이들이 많아진다.
이리 생각하는 게 옳겠습니까 ?
저는 이런 상황을 염려하며 자못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다시 인용하자면
"군자는 대로를 걷는 자가 아니다.
대로를 걷기에 군자라 불리우는 것이다."
이리 상기하고자 합니다.
인간은 한없이 취약하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하니 애저녁에 위험한 곳에 가지 말아야 할 노릇이지요.
그러면 비록 자신이 비범하지 않아도 최소한 분수를 지킬 수 있습니다.
선재동자처럼 만행을 수행의 일환으로 기획한 것이 아닐진대,
무엇하러 스스로를 위험에 노출시켜야 하나요.
이런 뜻에서 이 지점에 이르른 분들은 군자대로행이란 말을 상기해주십사 부탁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군자표변은 무엇인가 ?
大를 위해 小를 희생한다.
넘쳐나는 떠돌이 강아지를 방치하느니,
이들을 보호소에 감치하고 그들의 희생을 기초로 나머지 아이들을 구한다.
이런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대의를 내세울 수 있을런가요 ?
이렇듯 적극적인 행위전변, 곧 표변을 한다 이리 되는 게지요.
이 방법은 ㅇㅇㅇ님의 의중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전 보호소의 운영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도 부족하고 이해도 얕기에 곁말이라도 이런 식의 대의에 대해 의견을 내기에는 좀 부족한 처지입니다.
때문에 이런 상상도 해봅니다.
우선은 아이들을 구하는 게 급하다.
자금의 확보를 위해 우선 지원금을 받고 안락사는 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위장하여 관을 속인다.
이렇다면 관을 속여도 양심이 부끄럽지는 않을 상 싶군요.
이런 표변이라면 군자표변의 범주에 넣어도 되지 않을까요.
현 정부의 보호비 예산은 당년에 한하여는 최소한 고정되어 있을 터이니, 보호소 운영자가 자기계산하에 안락사를 하든 하지 않든 소신껏 운영하는 것에 대하여 관이 개입할 여지는 적지 않으냐 하고 조금 억지지만 이리 관에 항변하고 싶군요.
이리 되면 보호소 운영자는 보조금을 받아도 떳떳하고 보람이 있지 않을까요.
이런 당당한 보호소에 여론도 보다 긍정적일 테니 일반모금도 좀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도대체가 타자의 희생을 전제로 지원금을 주는 이런 비인간적인 정책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
동물들에겐 한달이란 짧은 유예기간이 관이 베푸는 양 가장하는 유일한 그들의 체면치례군요.
유예기간도 문제지만, 그 기간동안 원활한 입양이 이루워 질 수 있도록 중계하는 국가 차원의 상설기관 설립도 없이 그냥 민간의 자율운동에 떠맡기는 것도 용서키 힘든 부분이군요.
관의 생명의식 부재, 유기견 원인 제공자에 대한 대책 등등 정리되지 않은 채 떠오르는 생각들의 파편이 저를 혼란에 빠뜨립니다.
저로서는 미숙한 처지니까 이젠 그쳐야 다 아시는 분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게 되겠군요.
다만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덧붙이면,
제 눈엔 이게 완전히 쓰레기 치우는 것을 민간위탁업자에게 위탁하는 방식으로만 보입니다.
물론 보조금을 의지하여 운영하시는 분을 불편한 위치로 모는 듯한 저는 무엇이 잘났느냐 물으면 내세울 것도 별로 없는 처지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분명 이런 방식엔 문제가 있군요.
앞으로 관심을 갖고 열심히 챙겨 보아야 할 과제군요.
열심히 공부하여 정제된 생각을 갖추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의 무지와 안일한 모습이 적지 아니 부끄럽습니다.
제가 놓여 있는 현재의 부족한 형편으론 관을 제외하고는 남을 평할 충분한 입장이 못됩니다.
안락사 조건附 보조금 없이 일반 보호소 운영하시는 분, ㅇㅇㅇ님을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하였다면 해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안락사 조건 없는 지원금도 있는가 모르겠네요.)
특히나 ㅇㅇㅇ님에겐 요 앞에 응원의 댓글도 올렸었는데 몸글을 지워버리셨더군요.
황선생님의 열정과 강아지 사랑에 깊은 존경심과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다만 여의치 않은 사정이 있는 점 충분히 헤아립니다만, 혹여 안락사 조건附 보조금에 기초한 운영방식에 뜻을 두고 계시다면 심사숙고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얘기가 두서없이 길었습니다.
부족한 점이 있다면 일깨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제 품성대로 행복하게 동물들이 살아가길 기원하며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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