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보나치 수열과 토끼
Leonardo Fibonacci
이 사람은 중세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아랍 지역을 여행하여 수학을 배웠다.
당시로서는 훨씬 선진적인 수학을 배워와 유럽에 전파하여 명성을 얻었다.
Fibonacci sequence 즉 피보나치 수열은 기실 이미 인도 수학에 기원을 두고 있었음이니,
가령 산스크리트 시의 율격엔 이 수열이 내재되어 있어 이들은 이미 이를 알고 있었다.
어쨌건 지금은 피보나치 수열은 Leonardo Fibonacci에 의해 정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토끼의 번식률을 연구했는데, 이게 피보나치 수열을 따른다고 한다.
물론 실제의 자연계에선 정확히 이를 따르지는 못한다.
몇 가지 제한 사항이 있지만 이를 고려하더라도,
토끼의 번식률이 피보나치 수열을 따른다는 것은 사뭇 흥미롭기까지 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우선 그 수열이란 것을 적어놓고 보자.
Fn = Fn-1 + Fn-2
0, 1, 1, 2, 3, 5, 8, 13, 21, 34, 55, 89, 144, 233, 377, 610, 987, 1597, 2584, 4181, 6765, 10946, 17711, 28657, 46368, 75025, 121393, 196418, 317811, 514229, 832040, 1346269, 2178309, 3524578, 5702887, 9227465, 14930352, 24157817, 39088169, 63245986, 102334155
n Fn
0 0
1 1
2 1
3 2
4 3
5 5
6 8
7 13
8 21
9 34
10 55
11 89
12 144
13 233
14 377
15 610
16 987
17 1597
18 2584
19 4181
20 6765
21 10946
22 17711
23 28657
24 46368
25 75025
26 121393
27 196418
28 317811
29 514229
30 832040
31 1346269
32 2178309
33 3524578
34 5702887
35 9227465
36 14930352
37 24157817
38 39088169
39 63245986
40 102334155
제한 사항이란 것을 잠깐 조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새로 태어난 토끼는 암, 수 짝을 이루며 한 배에 딱 한 쌍만 태어난다.
2. 한 달이 지나야 짝을 지을 수 있다.
3. 수태기간은 한 달이다.
4. 태어난 토끼는 죽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2번이다.
태어나자마자 바로 수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달간의 최소 필요 가임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지나면 그 다음부터는 매달 수태할 수 있다.
수태 주기인즉슨 증식주기일 터인데,
다 큰 토끼라면 그 주기가 한 달이지만,
갓 태어난 어린 토끼는 한 달을 걸러야 하므로,
바로 이 성토(成兎)로 진입하는 들목에서 주기의 결절이 생긴다.
때문에 피보나치 수열과 같이 얼핏 보기에 불규칙한 시리즈 문양(紋樣)이 나타난다.
(※ 紋에 대한 참고 글 : ☞ 2008/02/29 - [소요유/묵은 글] - 무늬, reality, idea)
이게 아니라면 단순히 배증(倍增)하고 마는 그저 그런 매력 없는 수열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Quiz
재미 삼아.
A. 머릿속으로 피보나치 수열을 토끼의 증식과정을 셈하며 바로 그려내기.
B. 머릿속으로는 도저히 아니 되면 메모장을 꺼내 계산해보기.
C. 포기.
뇌력(腦力) 등급
A>B>C
만약 자신의 전공이 이공계열이 아니고 문과계통이라면,
난이등급 하나 내린 급수 조절을 허(許)한다.
오늘 나는 왜 피보나치 수열을 생각하고 있는가?
이게 혹간 주식투자 하는데 쓰이기 때문에 그들은 이를 즉각 떠올리지나 않을까 싶다.
(※ 참고 글 : ☞ 2008/03/25 - [주식/봉도표] - 제 11장 봉테크(棒 Tech) - 10)
하지만 이 피보나치 수열에 갇힌 토끼의 증식문제에 이르러서,
나는 문득 이들이 이리 생의 질곡에 갇혀 있는 까닭을 주섬주섬 챙겨보고 싶었다.
토끼뿐이랴, 개도, 고양이, 돼지도, 소도 모두 이 수열에 갇혀 있긴 매한가지다.
소는 조금 덜하지만 나머지 동물들은 번식력이 대단하다.
이들이 한 세상 살면서 이리 인간에게 푸대접을 받게 된 연유는,
사실 저 왕성한 번식력에 기인하는 바 크다.
단적으로 중국의 판다곰은 생식력이 약하여,
외려 인간으로부터 진객(珍客)으로 대접받으며 호의호식하고 있다.
판다를 중국어로는 大熊猫라고 하는데 당장 이를 검색어로 하여,
중국 사이트에 처넣으면 인공번식에 관한 연구논문도 즐비하고,
번식사육장 또한 명소로 널리 선전되고 있다.
하지만 개, 돼지, 토끼 따위 동물들은
거개가 인간에겐 그저 식육(食肉)의 대상에 불과하다.
혹 강아지는 애완용으로 키어지기도 하나,
기르다가 버려지는 경우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적지 않다.
이 모두 이들의 번식력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도킨스 식으로 생각해보면,
유전자의 기획, 의도는 왕성한 번식력 때문에 종족유지에 성공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문에 이들은 살아가면서,
인간이란 포식자에게 무자비하게 희생당하고 만다.
유전자의 천년, 만년 꿈은,
인간에 의해 트랩에 갇혔음인가?
도킨스 말대로 이기(利己)의 화신에 불과한가?
대저, 자원이란 희소해야 귀히 대접을 받는다.
다이아몬드, 금 따위는 그것들 고유의 매력 외에도 또한 흔치 않기 때문에 대접을 받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매력 가치보다는 희소성이 더 중요 평가요소가 아닌가도 싶다.
가령 도루묵은 과거엔 쳐다보지 않던 생선인데,
요즘에 귀해지니까 제법 비싸게 취급된다.
조기 역시 우리 어렸을 적에는 아주 흔한 것이었는데,
요즘엔 너무 비싸 거의 금값에 버금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연예인 스타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이 한껏 잘나서 그리 부와 명성을 얻기라기보다는,
그의 캐릭터, 재능을 대체할만한 다른 이들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경제학적으로는 이를 희소성의 원리로 파악하든, 지대(rent)로 환원하든,
어쨌건 분수를 넘는 과도한 사회적 대접을 받는 것은,
저 중국의 판다와 무엇이 다를 바 있으랴.
내, 스님 네들이,
소치(小痴)니 대치(大痴)니 하는 법호(法號)를 듣노니,
이게 어리석다하되 작게 또는 크게 어리석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정작은 모두 다 크게 현명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음이다.
그러하다면 이 때 소(小)나 대(大)는 치(痴)를 꾸며 부정하고 있으니,
부정사(否定詞)의 역할을 하고 있다.
소(小)나 대(大)라는 글자는 얄궂다.
아닌 척 의뭉을 떨면서 결국은 실을 취한다.
(※ 참고 글 : ☞ 2008/07/05 - [소요유] - 방(方)과 원(圓))
반면 소(素)자는 절대 긍정의 어의를 갖고 있다.
실제 보건대,
소식(素食), 소찬(素餐), 소지(素地), 소복(素服), 소박(素朴), 소재(素材), 소질(素質)
따위는 모두 본질적인 것, 바탕이 되는 것, 꾸밈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내가 갑자기 왜 이런 글자들을 거들먹거리고 있는가?
블로그 택호(宅號)가 ‘소희원’ 이라는 곳에 잠깐 들려 글을 읽었는데,
(※ 참고 http://blog.joinsmsn.com/cshwang0/11939252)
거기 토끼가 등장한다.
그 글을 대하자 이내 의심이 키워졌고,
댓글로 아연 그러함을 듣잡고나니 며칠 새 간간 마음이 이리저리 떠 흘러 쓸린다.
소희원이 한자로 꼭이나 소희원(素喜園)이라 할 이유는 없다.
만약 이리 지으셨다면 한문 공부 내력이 녹록치 않으렸을만,
대개는 소희(素姬), 소희(昭姬) 또는 소희(*熙) 등의 여자 이름에서 따왔을 확률이 높다.
혹여 笑戱, 所希를 지칭할 수도 있으련만 이 또한 특별한 계기가 아니라면,
원(園) 이름으로서는 일반적이지는 않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나는 순간 소희원(素喜園)을 떠올렸는데,
이게 대단히 실례되고도 남을 일이건만,
나로서는 토끼가 등장하는 글을 보고는 바로 이 글자를 떠올렸음이니,
아니라고 가로 지을 노릇이 아니라 솔직하니 토설하고 글을 이어가기로 한다.
소희(素喜)가 무엇인가?
기쁨(喜)이란 기분이 한껏 고조되어 날아갈 듯하니 영어로 하면,
그저 단순한 happy라도 좋지만 joyfull한 모습이 연상된다.
하지만 여기 소(素)자가 앞에 관형사로 꾸며지면 아연 다른 경지가 펼쳐진다.
희(喜)가 20대 30대의 지경(地境)이라면,
소희(素喜)는 적어도 50대 이상을 넘는 이의 경지라 일러야 한다.
기쁘기는 하되,
마냥 마음이 들떠 잔나비처럼 천방지축 나대지 않고 차분히 가라앉아,
마치 가을 오동닢 하나는 댓돌에 떨어지고,
고아하니 평상에 걸터앉아 차 한 잔을 음미하고 있는 고승대덕의 심경(心境)이 연상된다.
음식으로 치자면 기름지고 고소한 지미(脂味)를 너머,
식재료 고유의 맛이 최고조로 발휘된 지미(至味)로 나아가야 한다.
기름기가 많으면 일응 맛이 있지만 많이 먹으면 이내 느끼해지고 질린다.
하지만 국물 위에 뜬 기름기를 얇은 한지로 차분히 걷어내고 나면,
국물엔 기름기는 없되 그 향(香)과 정(精)은 남아 있다.
이 차분하니 안돈(安頓)된 맛을 지미(至味)라고 한다.
이 경지를 밀고 나가 사뭇 깊은 안 뜨락에 다다르면,
그 때는 지미(至味)를 넘어, 이윽고 지미(至美)에 이르른다.
소희(素喜)란 바로 이런 경지를 뜻한다.
뼈다귀 빼고, 기름기 빼낸 차분한 미각,
그러면서도 고소함을 잃지 않는 경지.
그런데 이는 누구라도 알기 쉽게 동원된 말이니,
제대로 정색하고 말하면 이도 틀렸다.
적어도 50대 이상 미객(味客)이라면 소밥을 알아둘 만하다.
소밥은 일컫노니 이는 소식(素食), 소반(素飯)에 당(當)한다.
고기반찬이 없는 음식이니,
요즘 세태말로는 채식이 되겠다.
(※ 참고 글 : ☞ 2008/02/15 - [소요유] - 육식-채식-소식-단식-죽음-평화)
과연,
채식을 하면서 지미(脂味)를 느끼고,
지미(至味)에 이르르고,
마침내 지미(至美)에 이르를 수 있겠는가?
50객이라면,
한 번 나서볼 만한 여행이 되지 않을까?
소찬, 소식, 소반에 친근하면,
자연 생명을 구할 도리를 찾을 수도 있음이니.
소희(素喜)는 이 때에 이르러 지미(至美), 지선(至善)에 한결같아지지 않을까 싶다.
오늘, 외람되나마 삼가 글 한자락 이리 펴본다.
(※ 이어지는 참고 글 : ☞ 2010/12/06 - [소요유] - 피보나치 수열과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