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迷路)
농원 하우스 안에는,
방에 깔고 남은 자투리 장판을 맨 흙바닥에 깔아 둔 곳이 있다.
지난겨울 그 위를 지나는데 밑이 울퉁불퉁하다.
땅이 얼어 솟아올랐는가 싶어 발로 꾹꾹 눌러 다져보았으나,
딱딱하니 꿈쩍도 아니 한다.
해서 날이 풀리면 다시 땅을 골라야겠다고 생각하며 뒤로 미뤄두었다.
그러다, 지난번에 구해둔 목봉을 이용해 그 나들목께에 출입문을 다는 작업을 했다.
그 사춤에 장판을 걷어내게 되었다.
확 장판을 거두자 거기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었다.
겨우내 어둠 속에 잠겨 있었을 저것들은,
마치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며 빛살 퍼져 내 눈에 현란히 쏟아져 들어온다.
단박에 떠오른 말 하나는,
“미로(迷路)”
쥐가 장판 밑에 정교하니 교통망을 만들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놀라움을 넘어 갖가지 상념들이 주마등처럼 쏴하니 머릿속을 지난다.
이 추운 겨울에 저 밑에서 저리도 간절하게 삶을 이어갔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자,
울컥 저들이 너무 가엽고 측은해진다.
도대체가 영하 15℃를 넘나드는 엄동에 저들은 어이하여,
저 고단한 삶을 부지하고자 시난고난 앓듯 한 철을 지나야 하는가?
그러면서도 그 한 가운데서 저리들 치열하게 삶을 엮어내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천지자연은 불인하고뇨!
천지불인(天地不仁)
등산길 갓변에 가끔씩 쌀 한 줌씩 부려진 것을 볼 때가 있다.
새 모이거나, 들고양이 먹이일 텐데,
저 측은지심을 낸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어진가 말이다.
저 고은 마음을 낸 분을 만나고 싶다.
아니 만나면 아니 된다.
늘 그러하듯 어짐은, 사랑은 저리 응달에서 제 홀로 피는 것.
양지에 서면 세월에 빛바랜 포목처럼 미움과 갈등으로 얼룩지곤 한다.
그러하니 바위 뒤에 홀로 수줍게 핀 이름 모를 꽃처럼 사랑은 숨겨져야 한다.
곱다고 꺾어오면 이내 시들고 말 사랑은,
그래서 못내 껴안을 수 없는 그리움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천지는 불인하고 무위(無爲)하되,
인심은 유인(有仁)하고 유위(有爲)한 것이어든,
젊었을 때는 뭣도 모르고 노장(老莊)의 유현하되 호방 활달함을 마냥 사모하고,
은근히 유가(儒家)를 한 수 아래인 양 깔보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내 나이가 들어가면서 유가(儒家)의 간절함이 더욱 마음에 와 닿곤 한다.
이게 나이가 들어가는 소이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도 잠깐,
이내 나는 예정된 잔인한 행로를 따르게 될 것이다.
저것을 그냥 두고는 사람이란 도대체가 그냥 견디어내질 못하지 않던가 말이다.
그동안 비누 두어 개도 저들이 다 갉아 먹질 않았던가?
싱크대 위를 좌우로 달려가며 꽃 발자국을 꾹꾹 찍어놓았질 않았던가?
긴 자루 달린 호미를 가져와,
저들의 고단한 삶의 흔적을 행여 다칠세라 천천히 지워나간다.
하지만 속도가 붙자 나는 무자비한 야찰이 되어 저것들을 뭉개고 있다.
수개월 간 인고의 내력(來歷)이 허무히 호미 끝으로 사라져 간다.
이리 남을 해하면서 내 명이 부지가 되고 있음이니,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미심쩍기 짝이 없다.
저것들을 내 미로라 불렀으나,
자세히 보니 마냥 어지러이 길만 나있는 것이 아니라,
깊은 구멍은 어디론가 나로선 알 수 없는 곳으로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그 끝을 따라들면 지어미가 산달을 맞아 새끼들을 막 낳고 있는 방으로 이어지지나 않을까?
아니 이미 대여섯 마리가 꼬물대며 어미젖을 먹고 있으리라.
아비 쥐는 어디선가 숨어 나를 지켜보고 있지나 않았을까?
저것은 인간 눈에 미로로 비추일지언정,
저들 쥐들에겐 명줄임이라, 어찌 어지럽다 할 수 있으랴?
한비자(韓非子)를 보면 迷를 이 정경에 맞춤 맞게도 이리 풀고 있다.
“凡失其所欲之路而妄行者之謂迷,迷則不能至於其所欲至矣。
今眾人之不能至於其所欲至,故曰「迷」。眾人之所不能至於其所欲至也”
“무릇 가고자 하는 길을 잃어, 되는 대로 마구 가는 것을 일러 迷라 한다.
迷한즉 가고자 하는 곳에 이르지 못한다.
오늘 날의 사람들은 그 가고자 하는 길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런즉 이를 일러 迷라 한다.
사람들의 가고자 하는 곳에 이르지 못하는 바임에라.”
내친김에 한비자에 나오는 ‘막삼인이미(莫三人而迷)’란 명구를 마저 음미해본다.
참고로 여기 이야기에 등장하는 안자(晏子)는 안영(晏嬰)을 높여 부르는 칭호로서,
춘추시대 관중(管仲)과 더불어 제나라의 으뜸가는 명재상이다.
관중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으나, 안영은 세인들에게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아마도 관중이 춘추오패 중 가장 으뜸으로 꼽는 제환공을 보필하였음이니,
그 활약상도 당연히 역사적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기회가 많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안영은 영공, 장공, 경공 3대를 내리 모셨지만,
내내 간신은 날뛰고, 군주는 영명하지 못해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안영은 나라가 혼란한 가운데 지혜롭게 잘 헤쳐 나갔다.
“一曰。晏子聘魯,哀公問曰:「語曰:莫三人而迷。今寡人與一國慮之,魯不免於亂何也?」晏子曰:「古之所謂莫三人而迷者,一人失之,二人得之,三人足以為眾矣,故曰莫三人而迷。今魯國之群臣以千百數,一言於季氏之私,人數非不眾,所言者一人也,安得三哉?」”
“이야기 하나.
안자가 노나라에 초빙되어 갔다.
노애공이 물어 가로대,
‘삼인이 아니면 미혹에 빠진다 하더이다.
지금 과인은 온 나라(사람)와 더불어 의논하고 생각을 나누고 있건만,
우리 노나라는 혼란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무슨 까닭이오?’
안자가 아뢴다.
‘옛 말에 이르는 삼인이 아니면 혼란에 빠진다 함은,
한 사람이 길을 잃으면 두 사람이 길을 찾아 셋이 족히 무리가 되나이다.
그런고로 셋이 아니면 미혹된다 하는 것입니다.
지금 노나라 군신들이 수천 수백이나 계씨의 사사로움을 위해 말을 하나 같이 하나이다.
사람 수가 여럿이나 이게 많은 무리가 아니라,
(도리어) 말하는 이는 한 사람과 다름이 없나이다.
(이를 두고) 어찌 셋이라 할 수 있겠나이까?’”
지금 우리나라도 정치판을 보면,
국회의원은 300인이나 되지만,
실제는 하나에 불과하다.
여든, 야든 모두들 제 일신상의 이익을 위해,
公義를 저버리고 私利를 도모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이를 어찌 삼백인이라 할 것인가?
다만 하나의 국회의원만 있을 뿐인 것을.
셋이 아니고 하나임이니 어찌 혼란스럽지 않으리요?
莫三人而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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