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뢰배(無賴輩)
소요유 : 2012. 12. 10. 15:11
사양하는 마음이 禮의 단서라 하였음이며,
시비를 가리는 마음이 知의 실마리라 하였음이라.
헌데,
사양지심도, 시비지심도 없다면,
이를 무뢰배라 이른들 무엇이 그르랴?
게다가,
수오지심도 없다면 더불어 뭣을 논하랴?
羞惡之心 義之端也。
羞惡에 대하여는 뻔한 풀이가 있지만,
나는 옳건 그르건 내 식대로 이리 푼다.
‘마땅하지 않음’
이를 부끄러워하는 것.
그런데, 사양지심과 시비지심이 충돌하는 때는 어떻게 하느냐 묻는 이가 있다.
‘무슨 말이냐?’
‘어떠한 때, 시비를 가림이 우선이냐, 그냥 사양하고 넘기는 것이 옳으냐?’
‘그것은 상호 충돌하는 가치가 아니다.
예에 어긋나면 필경은 앎을 모르는 것이요,
앎이 없으면 필경은 예에도 어긋난다.
한즉, 시비를 가림은 예에도 합당한 일이요,
예를 지킴은 곧 시비를 가리는 일이기도 하다.’
人情에 묶여 시비를 가리지 않고 넘기는 것을 예라 할 수 없는 것이며,
情理에 기대어 예를 그르치는 것을 두고 시비를 안다고 할 수 없다.
이 모두를 마땅치 않다고 하는 것이니,
마땅치 않은 것을 보고 부끄러움을 일으키지 못하다면,
義롭다 할 수 없음이다.
한즉 수오지심은 마음의 저울과 같은 것.
저울대가 기울면 내 마음도 따라 이지러지며,
세상엔 怨과 恨이 싸락눈처럼 쌓여 간다.
이런 자들 외에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어디 따로 있을까?
義란,
義로운 행동을 거듭하는데 따라서 속알에서 생기는 것이지,
義가 밖으로부터 들이 닥쳐 취해지는 것이 아니다.
我故曰,告子未嘗知義,以其外之也。
‘그런고로 나는 고자(告子)가 아직 義를 아지 못한다고 하였음이니,
이는 (그가) 義가 밖에 있는 것이라 하기 때문이다.’
기려(飢餒).
무뢰배를 보자하니,.
과연,
맹꽁이 배처럼 잔뜩 욕정이 부풀어,
千年은 허갈져 주린 녀석이고나 싶었다.
맹꽁이 배처럼 잔뜩 욕정이 부풀어,
千年은 허갈져 주린 녀석이고나 싶었다.
하여, 이리 글 하나를 주섬주섬 부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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