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종취전(鑽種取錢)
때는 소설 삼국지의 끝자락,
조조가 잠시 천하통일을 하는 듯싶었으나 그 공은 사마씨에게 넘어갔다.
이 사마씨의 나라가 진(晉)이다.
조조의 위(魏)가 사마의 진(晉)으로 교체되는 즈음 소위 죽림칠현이 등장한다.
죽림칠현이라 후대에 칭하여 지는 인사들은,
진이 나타나자 모두 다 세상을 등지고 몸을 사린다.
이런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자연스런 인간의 모습일 따름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으로 그만인가?
혜강(嵇康), 완적(阮籍), 유령(劉伶), 완함(阮咸)은 시종일관 노장지학(老莊之學)을 닦았고,
산도(山濤), 왕융(王戎)은 노장지술과 함께 유가를 아울렀으며,
상수(向秀)는 명교(名教)에 밝았다 한다.
이들이 예법에 얽매이지 않고,
청정무위(清靜無為), 갈주(喝酒), 종가(縱歌)하며,
진(晉)에 출사하지 않았음을 두고,
세상 사람들은 저들을 사뭇 고상한 사람들인 양 여긴다.
그런데 사실 그게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정체(政體)가 한번 뒤바뀌어 버리고 말았는데,
자반뒤집기를 하여 자리를 옮기는 것이 과연 괜찮은가?
설사, 저쪽에서 이리 나와 벼슬을 해라 권하여도,
또한 기실 하고 싶다한들 넙죽 받아먹고 무탈하니 살 수는 있는가?
사마씨 밑에 죽 늘어선 기세등등한 작자들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저들이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여차칙하면 똘똘 뭉쳐 모함하고 음해할 것이다.
나아가려한들 그게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물론 전 정권에 대한 충성심이, 울분이 왜 아니 없겠는가?
하지만, 잠시 명 보전하고 사태가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러할 때, 우리들은 정치에는 일체 관심이 없다는 외표(外表)가 필요하다.
여기 노장의 무위사상, 음주, 가무 따위만큼 딱 맞춤 맞는 적절한 연출 장치는 없다.
이게 곧 명철보신(明哲保身)하고 안심입명(安心立命)하자는,
극히 현실적인 타산지책은 아니었을까?
나는 그들의 마음이 그야말로 '죽림에 든 현자'처럼 그리 순수했을까나?
하며 이를 잠깐 의심해보는 것이다.
하기사 이들 칠현이 노닐던 곳에 실제 죽림은 없다고 한다.
칠현(七賢)이란 말이 먼저 생기고 후에 죽림(竹林)이란 말이 덧붙여졌다는 것이다.
7(七)이라는 것은 논어의 ‘作者七人’에서 따왔다는 것이니,
의(義)로움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리라.
여기에 당시 불경에 등장하는 죽림정사(竹林精舍)란 말에서 죽림을 빌려,
죽림칠현이라 하였다는 설이 그럴싸하니 지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왕효의(王曉毅) 같은 사람은 실제 위진 시대의 황하에 죽림이 있었다며,
죽림 실재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자자,
오늘의 이야기는 죽림의 진위를 밝히려는데 있지 않다.
오늘 아침 밥상머리에서 '엣징'에 대하여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식탁 끄트머리, 사각 그릇 가장자리 전 각진 부분을 둥그러하니 깎는다.
행여라도 사람들이 거기 부딪혀 다칠세라 그리 다듬는다.
이를 edging이라 하지 않는가?
내가 집식구에게 이른다.
엣징은 각진 것을 둥글게 다듬었으니 외양 덕스럽고 온화하게 보인다.
하지만 숨 죽인 저 밑, 사물의 본성 속엔 아직도 지난날의 흔적이 남아있다.
날카롭게 각진 옛 기억을 잊지 않고 추억해내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식탁을 만들려할 때 나무를 깎고 아귀를 맞춰 짜 나아갈 때,
모서리는 각지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게 사물이 갖춘 제 본성일진대,
사람이 필요에 의해 비록 엣징 처리를 하였다한들,
그 감추어진 것이 어디로 달아났을 터인가?
그러면서 나는 위진 시대의 죽림칠현 이야기를 이어 꺼내었다.
죽림칠현이 은사(隱士)인 양, 일견 그럴 상하니 고상한 듯 보이지만,
저들의 내심도 과연 그러할까?
실인즉 저들도 출사(出仕)한 이들과 하등 다를 바 없이 정치지향적이었다.
그 증거도 있다.
가령, 일곱 중 혜강을 빼고는 나중에 전부 진(晉)나라에 사환위신(仕宦爲臣)하였다.
때를 고르고 있었거나 결국은 절개를 꺾고 벼슬로 나아간 것이다.
왕융(王戎) 이야기는 또 어떠한가?
왕융은 공명심도 많고 인색하기 짝이 없는 위인이었다.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이자를 셈하기 사뭇 바빴다고 한다.
왕융은 좋은 자두나무를 갖고 있었다.
그것을 따다 팔았는데,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왜인가?
사간 사람들이 나중에 살펴 보니 종자마다 구멍이 뚫려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딸이 하나 있었는데 수만 전을 빌려주었다 한다.
딸이 집에 찾아왔건만 낯색을 바꾸고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딸이 빚을 갚으니 이내 풀어져 환히 맞았다 한다.
이 이야기는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나온다.
王戎有好李, 賣之, 恐人得其種, 恆鑽其核 。
王戎女適裴頠, 貸錢數萬 。 女歸, 戎色不說, 女遽還錢, 乃釋然 。
이러하듯,
시절인연 따라 제 본성이 일시 다치거나, 혹은 스스로 감추어지는 것일 뿐,
게 본바탕이 어디로 달아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함이니 거죽 외양 보고 섣불리 모든 것을 재단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니라.
이리 이르고 있자하니,
왕융이 자두 씨앗에 구멍을 뚫는 장면이 둥드런히 의식 한가운데로 떠오른다.
이게 어찌 현대라고 다를쏜가?
지금 시중엔 씨알머리 없는 종자가 전판을 휩쓸고 있다.
배추 씨앗을 심은들, 무 씨앗을 심은들,
그것들이 당년도엔 다 그럴 듯이 잘 자라지만,
그 씨앗을 받았다 이듬해에 심으면 다 반편, 쭉쟁이들이 되고 만다.
몬산토 같은 종자업자들은 세상의 씨앗이란 씨앗엔 모두 조작질을 가하여,
내년을 기약할 수 없는 쭉쟁이 고자(鼓子)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을 과연 종자업자들이라 불러도 가한가?
불(睾丸)을 베어내는 자를 도자장(刀子匠)이라 한다.
오늘날의 종자업자들이야말로 비정한 도자장들이 아닐까?
왕융을 두고 누가 죽림칠현이라 부르고 있는가?
내 학교 다닐 때 무슨 열이 뻗쳤다고,
혜강(嵇康), 완적(阮籍), 유령(劉伶), 완함(阮咸),
산도(山濤), 왕융(王戎), 상수(向秀)
이들 이름씨까지 낱낱이 외웠단 말인가?
도대체가 씨앗에 구멍을 뚫는 저 불한당을 두고도 현자(賢者)라 이름할 수 있음이며,
무위자연(無爲自然), 염정(恬靜)한 세계를 그리는 위인이라 이를 수 있는가 말이다.
찬종취전(鑽種取錢)이라,
씨앗에 구멍을 뚫고 돈을 탐하는 불한당이니,
왕융이야말로 오늘날에 태어났다면 몬산토 수장이 되어 있지 않으리?
몬산토도 이리 말하고 있지 않은가?
“한 알의 작은 씨앗이 건강을 증진시키고, 환경을 보존하고, 경제 성장률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 http://www.seminiskorea.co.kr/about/default.asp)
이들이 목청 가다듬어 은근히 뱉어내는 저 매끌매끌한 화법과,
청정무위(清靜無為)의 경지를 노닌다는 죽림칠현의 문법에 정녕 한 터럭인들 차이가 있음인가?
그러함이니,
엣징 처리된 저 식탁의 본성이 어찌 각(角)짐을 여위었다 할 수 있음인가?
죽림칠현이 세속을 등진 것은 貴, 富를 염오(厭惡)하였던 것이 아니라,
일편으로 보자면 보신(保身)하기 위한 위장책이었을 것이다.
실제 왕융은 나중에 진나라에 출사하여 사도(司徒)란 벼슬에 오른다.
죽림칠현씩이나 된 사람들에게도 貴, 富는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던 것이다.
아니, 죽림칠현이란 이름은 그저 계집 사람이 둘러쓰는 너울 같은 것이 아니었으랴?
두어라,
왕융이든 몬산토이든,
제 이름을,
모두 다 그날 그 때 이래,
숲 깊이, 하늘 높이 드날린 현자(賢者)일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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