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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유불급(過猶不及)

소요유 : 2013. 1. 27. 14:28


과유불급이란 말은 흔히들 많이 쓴다.
이 말을 사전식으로 푼다면,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
이 정도가 되겠다.

그런데 말하는 분의 뜻과 원래의 글이 가진 뜻이,
궤를 달리 나눠 달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여 오늘은 잠시 짬을 내어 그 이동(異同)을 점검해두려 한다.

먼저 “과유불급”의 출처를 따라가 본다.

고전을 보면 이 말은 대표적으로는 논어와 순자에 나오는데,
먼저 논어를 들춰본다.

자공이 여쭙다.
“사(子張)와 상(子夏)은 누가 더 어집니까?”

공자께서 이르시다.
“사는 지나치고, 상은 미치지 못한다.”

자공이 다시 여쭙다.
“그러면 사가 낫습니까?”

공자께서 이르시다.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

『論語』
子貢問:「師與商也孰賢?」
子曰:「師也過,商也不及。」
曰:「然則師愈與?」
子曰:「過猶不及。」

순자의 경우엔,
밝은 군주는 다만 요체를 다스리지만,
암주(闇主)는 말단에 치우쳐 상세하게 다스린다.

하나를 잘 다스리면, 백사가 바르게 되는 법인데,
이를 거꾸로 하면 그르치게 된다 하였다.
이어 다음 글귀가 나타난다.

「... 是過者也,過猶不及也。辟之是猶立直木而求其影之枉也。」

“이는 지나침이니,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
이는 비유컨대, 마치 꼿꼿이 선 나무를 두고 그림자가 굽은 것을 구함과 같다."

過猶不及에서
유(猶)는 “마치 ...와 같다”란 뜻으로 새기면 족하다.
그러함이니 되풀이 하지만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
이 정도로 새기면 무난한 것이다.

그러한데 현실에선 곧잘,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보다 못하다.”라는 식으로 새겨지곤 한다.

이게 현실에선 그럴 듯하니 여겨지며,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과연 그러해도 좋은가?

앞의 논어의 예에선 전자의 사전적인 해석을 따름이 의당 옳을 것이로되,
순자의 예의 경우엔 얼핏 후자의 해석이 그럴싸해 보이기도 한다.

명주(明主)는 요체만 잘 다스리면 될 것인데,
지나치게 지엽말단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니,
과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풀어둘 수도 있겠거니 싶다.

그렇지만 정밀히 읽어보면,
過를 不及과 비교하여 그 못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용해두진 않았지만,
순자가 저 글 앞에서 말하는 “主能當一則百事正。”에서 보듯이,
하나가 백을 당하고 있다.
이는 하나가 不及한 것이 아니라, 백에 미치고 있다.
즉 하나로써 완전한 것이다.
만약 過猶不及을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보다 못하다.”로 해석하게 되면,
하나를 不及한 것으로 보는 것인즉 바르지 않다.
그러므로 순자의 저 글의 경우에도 ,
논어의 예와 마찬가지로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제 진실을 말하자면,
過나 不及이나 모두 마땅치 않은 것이다.
과함도, 미치지 못함도 최선은 아닌 것이다.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보다 못하다.”라는 말은,
일응 때에 따라서는 그럴싸하다.

지나친 것을 교정하는 것보다는,
미치지 못하는 것을 바로 잡는 것이 때론 한결 수월할 수는 있겠다.
그러함이니 현실에선 과유불급을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보다 못하다.”
이리 새기는 것이 그리 저항감 없이 널리 쓰여지는 것이리라.

하지만 정반대의 경우라고 왜 아니 없겠는가?
즉 不及이 過보다 못할 때도 왕왕 생긴다.
가령 조금 과하였으면 일을 얻을 수 있었는데,
不及하여 기회 자체를 놓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물론 過한 것은 그것대로 무리가 따르고 후과를 감당하여야겠지만,
不及하여 때를 잃는 것보다는 나을 경우도 있는 것이다.

하여간,
어떠한 경우라도,
過나 不及은 모두 다 만족해(滿足解), 즉 최적의 solution은 아닌 것이다.

수시처중(隨時處中)

현실은 부단히 변하고 유동적이다.
때는 흐르고 상황은 요동을 친다.
때에 맞춰 최적의 해를 구해내야 한다.
이를 수시처중이라 한다.

이를 중용(中庸)이라고 바꿔 불러도 좋다.
좌와 우의 중간이 중용이 아니다.
지나침도 아니오, 미치지 못함도 아니다.
때에 맞춰 가장 바람직한 판단을 내린 그 자리를 말한다.

속중(俗衆)의 오해는 中에서 시작된다.
중을 중간으로 쉽사리 넘겨짚었기 때문이다.
이보다는 외려 中은 과녁의 한가운데, 수레바퀴의 텅 빈 곳 즉 곡(轂)을 추상해보는 것이 낫다.
과녁을 적중(的中)하다 할 때 그 한 가운데는 딱 하나 뿐이다.
수레 축을 끼어 넣는 가운데 자리 곡(轂)은 수많은 바퀴살(輻)이 하나로 모이는 곳으로,
역시 딱 하나 밖에 없다.
하니 중용이라든가 수시처중은 어중간한 중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의 자리, 최적의 해(解), 하나의 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선 이를
수처작주(隨處作主)라 달리 일러 말하고 있다.
자리마다 주인이 된다.
상황에 임하여 내가 능동 주체가 되어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 자리 역시 하나이다.

수시처중(隨時處中)은 시간을,
수처작주(隨處作主)는 공간을.
이리 각기 한편만을 일러 두는 있는 양 보인다.
하지만 이는 다만 수사 작법의 이동(異同)일 뿐, 
판단 주체, 행위 주체를 함께 아우르며 시시처처(時時處處) 맞춰 그리고 있는 모습의 변용인 것이다.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보다 못하다.”
이 문법을 따르면 유보의 자리에 처하게 된다.
마땅한 곳이 아닌 어정쩡한 임시의 자리에 잠시 머무르고 있는 모습을 여의지 못한다.

게다가 더욱 문제인 것은,
미치지 못함에 머무르고 있는 자신을 용서하고 있는 점이다.
다만 과하지 않았으니까 용서가 되는 것인가?
아직도 최선을 찾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바로 응시하여야 한다.
아직 中을 모른 채 客(나그네)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바로 보고 있다면,
저런 문법에 기대어 자신을 한가로이 위무(慰撫)하는 것이 별로 떳떳한 짓으로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노파심에서 한 마디 더 붙인다면 이러하다.
과든 불급이든 완벽한 그것,
또는 수시처중(隨時處中), 수처작주(隨處作主)이든 하나의 길이라는 것은,
붙박이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늘 변하는 과정 중에서 역동적으로 균형, 조화되며 찾아지는, 또는 찾아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 실상은 동태적이라는 점을 간과하면, 도리를 벗어나 어긋나게 된다.  
진여의 세계가 아닌 생멸문 즉 현상계에선 어제의 일과 오늘의 짓이 한결 같을 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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