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디카는 총구다.

소요유 : 2008. 2. 22. 15:58



타인에게 양해 받지 않고,
함부로 디카가 그를 향하게 하지 마라.

***

카메라 렌즈는 타자를 향한 총구다.
오죽하면 예전 카메라가 처음 등장하였을 때,
카메라에 찍히는 것을 혼을 빼앗긴다며 기휘하기까지 하였을까 ?
뷰파인더(viewfinder)에 잡힌 파사체의 모습은 갈취당한 식민(植民)일 수 있다.

시각을 통해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은 象形言語(picture language) 덕택이다.
인류와 함께 한 이 원시언어가 지금 이젠 폭력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알타미라 동굴의 석화가 디지탈 카메라(차후 디카로 약술)로 변용되어
그 승화된 예술성이 일상의 폭력으로 다가온다.

칼 찬 사무라이처럼 최근엔 장삼이사도 디카로 수월히 무장한다.
그리하여 상형언어 형성에는 사무라이의 칼처럼 타자를 향해 폭력이 준비된다.
사무라이가 새 칼을 장만하였을 때,
지나가던 상민을 상대로 그들을 벼히며, 칼을 시험하였듯이,
이 땅의 디카족들은 그 서툰 솜씨로 렌즈라는 총구를 마구 방사한다.
오죽하였으면, 한 때 카메라폰으로 찍을 때 소리가 나도록 제품생산 스펙을
강제한다든가 하는 법제정까지 하려 하였을까.

지금은 덜 하지만,
가을철엔 너도나도 디카들고 설친다.
지나는 길, 좌도 우도 디카가 나를 겨누고 있을 때가 있다.
자신들이야 그게 즐거움이고, 새겨 간직하고 싶은 삶의 단편들이겠지만,
길손도 덩달아 그들의 삶의 일부로 포착되길 원하고 있는지는
붙잡고 묻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물론 자신들만의 디카 잔치는 존중한다.
남에게 폐가 되지 않는 한.

나는 자신이 사진으로 기록되어 남겨지길 원하지 않는다.
때문에 더욱 남의 디카에 박히는 게 달갑지 않다.

나같은 사람에겐 함부로 디카를 들이밀지 않는 게 예의가 된다.
만약 이런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다면,
아니 단 한 사람만이라 하여도,
디카는 남에게 일종의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남이 지날 때는,
겨눈 총구를 바로 거두워야 한다.
이게 예의다.
내가 그들의 디카질을 참고 인내해 줄 수도 있지만,
그에 앞서,
그들이 "남에게 폐"가 될 것을 염려하는 자각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순서를 뒤집으면,
디카는 총구가 되고, 디카질은 폭력이 된다.

물론 디지탈 카메라의 효용이 마냥 없다라고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이를 활용하는 작업에 적지 않은 관심과 흥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 부분에 관한 논의는 드러내고자 하는 촛점이 아닌즉 접자.

조금 구체적인 예를 들어본다.
오마이뉴스 기자들을 관찰한 적이 있다.
그중 몇 분은 마침 내가 발의한 본 주제에 적합한 재료를 제공해주신다.

JJJ, SSS 두 기자
이분들은 글도 잘 쓰시지만, 디카로 상형언어을 적절히 구사도 잘 하신다.
이분들은 모두 농촌에서 살고 계시다.

KKK라는 기자도 역시 농촌에 사시지만,
JJJ, SSS 두 기자분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현재는 활동이 뜸하지만, 한참 때,
그는 주변 동네 사람들을 가득 찍어 기사 내에 진열해내기 바빴다.
저들 중에는 찍히길 원하는 분들도 있었겠지만,
그 분의 신분이라든가, 안면 때문에 마지 못해 응하신 분도 있을 터이다.

그런데 JJJ, SSS 이분들 기사내의 이미지를 살펴보면,
타자(인물)가 거의 피사체로 등장하지 않는다.
설혹 등장하더라도 몰개성적인 단체인물을 대상으로 한 원거리 사진이거나,
자신의 가족, 동물, 농기구 등에 한정되어 있다.
동네분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의 중심인 기사인데도,
그 주인공은 이미지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역설의 구조로 화제의 내용 안에서 훌륭히 살아 전해진다.

이 분들은 그 거친 총구를 타자를 향하고 있지 않다.
아니 렌즈는 설혹 타자를 향하고 있음에도
뷰파인더에는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이 이중적 구조.
그 위상기하학을 통해 화자는 늘 내면을 성찰한다.
이윽고 그는 깨달음으로 형상화된 배로 독자를 함께 그윽한 곳으로 이끈다.

이즈음 디카는 폭력의 도구가 아니라 활인검으로 몰핑(morphing)된다.
닌자(忍者)가 인자(仁者)로 나투는 기술(奇術)
그들은 디카를 통해 이를 구현한다.
이쯤 되면 메시지가 아니라 매체가 성공하였다고 말하여도 과장이 아니다.

이분들 하고 교류한 것이 아니라 내심을 알 수 없으나,
추측컨대 내가 제기한 그런 문제점에 대한 인식을 이미 하고 계시지 않나 싶다.

타자에 대한 배려,
가다듬은 옷깃(襟度),
절제의 미학,
난 그들을 통해 이를 배운다.

다시 말하지만 겸양이 없는, 절제 되지 않는 디카는 총구다.
수많은 디카가 따발총이 되어 거리를 횡행할 때 난 웬지 모를 슬픔이 인다.
정제되지 않은 거친 서부의 불한당 총잡이들.
뒷골목의 무뢰배, 주먹잡이,
여의도의 면피 두꺼운 정상모리배,
오늘 그 전사들의 후예,
내 무의식의 창에 오버랩된 이들 폭력이,
의식 위로 길어 올려질 때,
난 섬뜩하니 놀란다.

난 KKK의 글에서 문득 또 하나의 무장된 전사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의 쏟아져 나오는 글 욕심은 인정하겠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가 실종된 현장을 목격하는 것은 저으기 괴로웠다.
내 글은 이에 대한 소리없는 외침이다.

맥루한은 매체가 메시지라고 말하였다.
메시지만으로 가벼이 자족하지 마라
지금 난 매체의 책임을 묻고 있다.
아울러, 숨가쁘게 전화(轉化)되고 있는 매체의 폭력성을 난 고발한다.

겸양이 없는 디카질,
그 무딘 감수성,
거친 폭력성을 고발하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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