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디와 손수레 유감(遺憾)
오언 존스 (Owen Jones)는 영국의 젊은 정치, 사회 비평가이다.
그는 2011년 차브(Chavs)란 흥미 있는 책을 써내었다.
내가 오늘 이 책을 떠올리는 것은 다름이 아니다.
얼마 전 손수레가 아우디 차량을 긁는 사고가 있었는데,
차주가 나와서는 도로변에 주차해서 일이 일어났다며,
외려 사죄를 하였다는 글을 최근 어떤 카페에서 읽었다.
(※ 손수레와 아우디)
그런가 하며, 그저 지나치려는데,
마침 댓글 하나가 달린 것을 보게 되었다.
$$
“전 뒤를 두번받혔는데 아무말 안했어요”
이거 아주 재미있는 말씀이다.
도대체 아우디 차주와 이 댓글주는 무엇이 다르기에,
한 사람은 필경 아무런 관련도 없을 이가 이리 퍼 나르는데 용심(用心)을 다하고,
한 사람은 그에 기대어 자신을 쓸쓸하니 스스로 증언하여야 하는가 말이다.
그래 내가 즉각 댓글 하나를 달아 들였다.
“아우디 차주라면 가만히 계셔도 남이 애써 퍼 나르며 그 미담을 알릴 텐데,
아니니까 직접 나서야 되는군요.
서글픈 일입니다.
이 기사의 내용은 듣건대,
뭐 나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우디 차주는 이리 착한 사람씩이나 되고,
$$님은 뒷북이나 치며 자찬을 해야 하는 현실은 여러 모로 생각을 일으킵니다.
우선 댓글로 길게 얘기할 수 없으니까 하나만 꺼내보지요.
왜 아우디는 이리 뭇 사람의 시선을 끄는가 하는 점입니다.
아우디를 제각(除却)시킨 순수 이야기 현실 속에서 우리는 감동할 수 없는 것입니까?
가령 $$ 님처럼 뒷 꽁무니 두 번 받히고도 아무 말씀 없는 것은,
우리들이 화제로 삼을 수 없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저 이야기가 미담이 되는데,
아우디가 중심 역할을 하였다면,
$$님의 두 번은 아우디가 아니었기에 버려진 것이 아닌가?
이리 의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묻거니와,
아우디냐,
순수 인간의 행동이냐?
그대 당신은 과연 어디에 집중하고 있는가?
저는 이런 회의를 일으키며,
오늘날 아우디에 자지라지며 나자빠지는 사람들을 참담한 심경으로 목격합니다.
그런데,
진정 저것이 미담이기나 한 것입니까?“
그러자, 이런 댓글들이 달린다.
oo
“아우디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사건을 대하는 사람의 인성이 참되었다는 애기 같습니다.
저희차는 아우디의 아자도 안되는 차지만 막상 저런상황이
되었다면 할머니와 손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것
까지는 되도 그 순간 주차를 잘못해서 미안하다고
할 정도의 인격을 갖추진 못한것 같아요.
차라리 차가 아우디라 운전자분의 참다운
인성이 가려지는 듯 합니다.”
xx
“지당한 말씀에 백번 공감합니다.
우리는 종종 사실의 핵심을 간과하며 때로는 백안시하여 진실을 왜곡하는 우를 범합니다.
각박한 세상살이에 미담 하나로 가슴이 훈훈해지면 그만이지 굳이 시시비비를 가려서
남을 불편하게 하여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긍정적인 사고는 삶을 윤택하게 하지만
아름다운 눈을 가지지 않으면 보이는 세상은 늘 어두운 것 이지요.
롤스로이스 안에서도 선한 사마리아인은 가려지지 않을 것 입니다.......”
나는 이에 추가로 댓글을 달아내었다.
“아우디 운전자의 행동에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라,
만약 아우디 운전자가 아니라도 이 이야기가 널리 퍼졌을까 하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퍼나르는 순간 아우디를 의식하지 않았는가?
이를 점검해본 것입니다.
가령 정주영이 된장국을 좋아한다고 하여 입맛이 참으로 서민적이라 이르거나,
아우디이기 때문에 차라리 참다움이 가려진다는 말씀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벌, 아우디란 중심 자료에 의지하거나 갇혀 있는 것이지요.
한국 사람이 된장국 좋아하는 것은 서민적이냐 아니냐와는 전혀 관련이 없지요.
또한 미담이란 아우디 소유 여부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그러한데도 oo 님은 대뜸 아우디 때문에 운전자의 인성이 가려진다고 자탄을 합니다.
애초 자신의 주장과 다르게 역시 아우디에 구속된 모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는 차주를 칭송하고 훈훈한 미담이라 입을 모았다.
난 이게 미담인지 아닌지 하는 점을 두고 의론을 일으키는 일에 관심이 없다.
다만, 그 이야기 구조 속의 문제 하나를 끄집어내어 환기하였다.
그러자 한 분이 내게 이런 글을 주셨다.
###
“뜻 알겠읍니다.
올으신 지적이싶니다.
선물에 검정비닐에있던 포장이쁘게되있든 그 마음만보자는거지요.
더 나가 지켜보는이 훈훈한 정 나누는 모습만 보려해야는데 현실은 그 선물이 뭘까를 관찰하려함이 이세상 보편적임에 그냥 한번 주절됫읍니다.
격었던 도시생활에 잠깐 지나처 그랫으니
혹 다른 마음들으셨다면 사죄드리고 행복하세요.“
내가 그에게 답글을 드렸다.
“사좌라니 아닙니다.
저는 다만 이야기 구조 속을 나름 헤집어보았을 뿐, 남의 미담을 폄훼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말씀을 나눠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긍정적인 사고,
이것이 무작정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론 비판적인 시선이 사회를 옳게 세우는 역할을 합니다.
외려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믿음이,
사태의 진상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며,
맹목적인 인간을 만들어가지요.
불행한 일이지요.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사실이냐, 진실된 것이냐가 중요합니다.
가령 일제시대라면 일정(日政)의 무자비함을 부정적으로 봄이 옳지 않겠습니까?
마냥 긍정적이 좋은 것이란 생각에 매몰되면,
그런 인생은 그저 친일파를 찬양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슬픈 일이지요.
감사합니다.“
차브는 더러운 공영주택에 살면서 정부의 복지예산이나 축내는 소비적인 하층계급을 뜻한다.
이 책의 1장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소개된다.
지난 2000년대 후반 영국에선 마들렌과 섀넌이란 여자 아이가 실종되는 사건이 있었다.
마들렌은 상류층 출신으로 포르투갈의 유명 휴양지에서 사라진 반면,
섀넌은 잉글랜드 북부의 대표적인 낙후지역인 듀스베리 모어에서 종적을 감췄다.
그런데 언론과 유명인들의 동정과 관심은 거의 마들렌에게 쏠렸다.
언론들은 마들렌과 관련되어서는 발생 2주 만에 천백 여개의 기사를 쏟아내었고,
현상금도 150만 파운드에서 260만 파운드로 뛰어 오른다.
정치인들은 마들렌과 관련되어서는 노란 리본을 저마다 가슴에 달고,
포르투갈 현지엔 언론인들이 몰려가 기사를 쏟아내었다.
하지만 섀넌과 관련되어서는 기사가 삼분지 일도 되지 않았고,
그녀와 관련되어 노란 리본도 달지 않았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대개 된장국을 즐긴다.
그러한데 이게 정주영이 먹으면 서민적이라며 칭송의 조건이 되고,
일반인 먹으면 아무런 지시 내용을 지니지 못한다.
동일한 사건이지만,
상류층의 딸이냐, 차브의 딸이냐에 따라,
언론의 주목도가 천양지차로 달라진다.
난,
정주영이 된장국 먹는 것을 비난하는 것도 아니요, 그럴 까닭도 없다.
아니 그 따위 것에 관심이 없다.
도대체가 남이 무엇을 먹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 말이다.
아우디 차량의 소유자가 보인 태도는 뭐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딱 여기까지 내가 외부로 보일 수 있는 한계이다.
그 외 더 생각을 지속한다면 내 머리 밖으론 별별 것들이 다 쏟아져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이 자리에서 내놓을 동기나 의욕은 없다.
스테레오 타입 군중들에겐 나의 선의내지는 진의가 왜곡되어 전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저 기사를 보고는,
입맛을 다시며 퍼 나를 생각을 하고 있는 일을 나는 하지 못할 것 같다.
왜냐하면 저 기사는 아우디란 차량 소유 사실에 심히 갇혀 있기 때문이다.
외적 조건에 구속되면, 바른 판단이 나올 수 없다.
하지만 대중은 저것이 외려 흥을 돋우는 조건이 되며,
자신은 아무런 관련도 없는데 저리로 자신을 투사(投射)하며,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랑스러워한다.
참으로 속(俗)되다.
저들은 미담에 감동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소비할 뿐이다.
진정 미담에 감동한다면 자신도 그러 할 수 있는가 자문하여야 한다.
그러하지 못할 형편이라면 차라리 누구처럼 자책을 할지언정,
퍼 나르고, 박수치며 슬쩍 편승하며 남의 공적을 훔칠 일은 아니다.
미담은 감동하며 일차적으로 소비할 일이 아니라,
행동으로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 있을 때라야 그 의의가 있다.
난 다른 사람이 엮어낸 미담의 주인공이 될 것을 꿈꾸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먹다 버린 것임이라,
도대체가 남의 대궁밥을 기웃거리는 것은 자존심 가진 이가 할 노릇이 아니다.
(※ 대궁밥 : 먹다가 그릇에 남긴 밥)
자존심이 없는 인간은,
저런 이야기 구조 속에 백 번 처하여도,
결코 자신이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언제나 이야기 틀 밖에 있을 때만,
감동을 일으키며 콧물, 눈물을 됫박으로 흘릴 뿐이다.
여기 그 자리는,
도대체가 위험을 감수할 일도, 손해도 볼 일이 없는 안전지대이기 때문에,
여간 수지 맞는 노릇이 아니지 않는가?
착한 사람씩이나 되기엔 제법 알맞으리라.
“전 뒤를 두번받혔는데 아무말 안했어요”
이 초라한 자기 증언.
다만 이 증언 앞에 서 있자니,
여러 모로 서글프고나.
덧붙임)
노파심에서 한 마디 남겨둔다.
내 글을 마치 내가 미담을 훼하는 것으로 독해하는 이들이 있다.
나는 여기 머무르고 있지 않다.
이 글은 그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논의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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