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아버님

소요유 : 2014. 11. 27. 20:46


아버님

내가 지난 가을 시골 동네 마트를 들렸는데,
셈을 하는 이가 나를 ‘아버님’ 운운하며 말을 건넨다.

내 그와 이미 낯이 익어 농을 주고받는 사이인지라,
평소 품고 있던 말을 스스럼없이 부려놓았다.

‘나를 두고 어이 아버님이라 부르는가?
만약 내가 총각이라면 이 왜 아니 섭섭한 노릇이 아니랴?
그대와 나는 셈을 하려 이리 마주하고 있음이니,
이 자리. 지금은 주인 또는 이를 대신하는 직원과 손님의 관계가 아닌가?

만남이 일어나고 있는 관계 상황 현장에선,
그에 걸맞는 지칭(指稱), 호칭(呼稱)이 있는 법.
이를 알맞게 찾아 제대로 구사하는 것이 어법에도 맞고,
맡은 업(業)을 잘 이끄는 출발이 되는 바임이라.
결코 소홀히 할 일이 아니다.
이를 사람 사이의 예법(禮法)이라 하는 것 아니겠음인가?

혹, 나를 사적으로 잘 알고 있다면,
아버지가 될 수도 있고, 때론 삼촌, 오빠가 될 수도 있으리라,
이를 굳이 허물이라 탓할 노릇은 아니리라.

하지만 무차별적으로 손님 일반에게 아버님, 어머님이라 부르는 것은,
좀 생각할 구석이 있다.

허나,
그렇다한들 그대가 나를 ‘오빠’라고 부른다면,
내 사양하지는 않으리라.’

‘그럼 무엇이라 불러야 되겠어요?’

‘그것은 그대가 잘 연구를 하며, 궁리를 틀 일이다.’

그가 총명한 이라면,
며칠 새 적절한 말들을 찾아내었을 것이다.
만약 찾아내지 못하였다면,
소심한 이일 경우,
아예 입을 닫고, 그저 턱짓, 손짓으로 살아갈런가?
미욱한 이라면,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제 갈 길을 고집할 수도 있으리라.

내가 오늘 어느 곳 하나를 들렸는데,
거기 직원 역시 말끝마다 이르길 ‘아버님’이라 한다.

저자가 보다 친근한 듯 보여지길 바람이라,
서비스에 보탬이 되리라 여기는 것이리라.

기실 ‘아버님’이란 1차적으로는 친족 간 전속어이다.
아들, 딸, 며느리 등 자손이 제 아버지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랴?
그러함인데 생판 모르는 이가 어찌 함부로 이 말을 쓸 수 있으랴?
사뭇 제 처지를 등지는 월권행위라 이를 수밖에 없다.

내 아들, 딸도 아닌 낯선 자가 나를 어찌 감히 아버지라 부를 수 있음인가?
아버지란 이름이 그리 헐한 것이런가?
아버지란 이름이 그리 가벼운 것이런가?
길동은 제 아비를 두고도 감히 부르지 못했지 않은가?
호형(呼兄), 호부(呼父)는 아무나 내뱉을 수 있는 게 아닌 사정이 있는 게다.

본디, 피로 맺어지거나 의리로 맺어지기 전엔,
이런 친족관계의 지칭어는 설게 통용될 수 없는 게다.

계부(契父)

피로 맺어진 사이가 아니더라도,
길러주심이니 양부(養父)가 되고,
결의(結義) 즉 의로써 맺으면 의부(義父)가 됨이니,
이에 대하여는 내가 별도의 글로 그 숨은 뜻을 밝힌 적이 있다.
(※ 참고 글 : ☞ 의(義))

하기사 이게 더 나아가면,
그 뜻이 온 땅에 퍼지고, 급기야는 하늘가로 날아오른다.

공자와 같은 성인을 두고는 니부(or [니보], 尼父) 또는 니보(尼甫)라 하였다.
노(魯)나라 군주 애공(哀公)은 공자가 돌아가시자 이리 부르며 애통해했다.
기실 역사를 살피면, 왕들이 신민 중에 뛰어난 이를 두고,
부(父)란 말을 곧잘 헌정했다.
가령 항우(項羽)는 그의 책사 범증(範增)을 아부(亞父)라 불렀으며,
관중(管仲)은 제환공으로부터 중부(仲父)라 불리었다.

급기야는
홍수전(洪秀全)의 태평천국(太平天國)에선 상제(上帝)를,
기독교에선 하느님을 천부(天父) 또는 성부(聖父)라 부름에 이른다.

그러함인데,
오늘날에 있어선,
보험 상품 파는 이,
급전 권하는 이,
핸드폰 파는 이 등,
상인들은 지나는 이 아무나 붙잡곤,
‘아버님’, ‘어머님’이란 이 거룩한 이름을,
따발총처럼 마구 난사한다.

백번 양보하여,
혹여, 친구 아버지라든가,
사귐이 오래되어 친분이 쌓인 사이라면,
상황에 따라 ‘아버님’, ‘어머님’이라 부른들,
이를 두고 마냥 탓할 노릇은 아니리라.

혹, 개중엔 이런 말을 아무런 저항 없이 수용하는 이도 있을 터이다.
이 또한 그에게 맡길 노릇이지 이런 태도를 객이 나서며 탓한다면,
이 또한 한가하고도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허나, 때론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로부터 저런 말을 듣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이도 있을 터.

사정이 이러함이니,
자기가 앞에 두고 상대하는 이를 두고,
무작정 ‘아버님’, ‘어머님’이란 말을 물총 쏘듯 함부로 난사할 일은 아니다.
사려 깊지도 못하고, 심히 무례한 짓이다.
사람을 대할 때는 예를 지켜, 삼가고 공경할 노릇이다.

오늘날엔 누구에게나 이 말이 헐케 마구 던져짐이니,
어찌 그 말에 무게가 얹혀질 수 있으며,
귀히 존경하는 뜻이 실릴 까닭이 있으랴?

저들은 저 귀한 말을 빌어,
친근함을 사고,
정을 더해,
손님에게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기를 바라겠음이라.
어찌 그 상인의 마음을 모르랴?

허나,
내 아버지는 온 세상에 하나뿐이어서 섬기어 존경하듯,
나 또한 내 혈족으로부터 하나의 아버지로 받들어짐이기에 귀한 것이 아니겠음인가 말이다.
함부로 저잣거리에서 장삼이사에게 불려질 말이 아니다.

손님이 아직 장가를 가지 않은 노총각이라도 사정은 매한가지이다.
장차 태어날 자신의 아들로부터 들을 말을,
어이 하여 생판 모르는 남으로부터 앞서 헐히 도절(盜竊)을 당한단 말인가?

독신으로 홀로 살아가기로 작정한 이에게도 역시나 욕됨의 말이다.
아버지란 의미 공간에서 이미 진작에 이탈한 사람의,
마음 밭을 허락도 없이 들어와 어지럽힘이니 이 어찌 결례가 아니 되랴?

상황에 처하였을 때,
우리는 업(業)을 짊어진다.
그 과업을 옳게 수행하려면,
마주한 사람에게 성심을 다하여 섬기라.

섬김은 말을 바로 고쳐 닦고,
곧은 행으로 임하여야,
그 맡은 일을 온전히 마칠 수 있음이라.

以財事人者,財盡而交疏;以色事人者,華落而愛衰。

재물로써 사람을 섬기는 이는,
재물이 다하면, 그 사귐이 소홀해지며,
색으로써 사람을 사귀는 자는,
그 용모가 시들면, 사랑도 쇠한다.

‘아버님’, ‘어머님’ 하며 달콤한 말로 다가서는 이는,
계약이 이뤄지지 않으면 욕을 내뱉기 십상이다.
존경심이 우러나 아버지라 부름이 아니요,
사랑하기에 어머니라 부름이 아니니,
그 재물을 얻지 못하고,
어여쁨을 구하지 못하였은즉,
어찌 달콤한 말이 줄곧 이어지랴.

***********

참고로 다음 글 링크를 여기 걸어둔다. 

☞ 수고 
 

'소요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韓非子上  (0) 2015.02.12
곶감  (0) 2015.02.08
북소리  (0) 2015.02.08
아우디와 빈녀일등(貧女一燈)  (0) 2014.11.17
아우디와 손수레 유감(遺憾)  (2) 2014.11.16
알리익스프레스 - 환불  (0) 2014.11.14
Bongta LicenseBongta Stock License bottomtop
이 저작물은 봉타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행위에 제한을 받습니다.
소요유 : 2014. 11. 27. 20: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