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처승
대처승(帶妻僧)은 중이되 결혼하여 처를 거느린 자를 일컫는다.
바라이법(波羅夷法) 제 1계는 음계(淫戒)이다.
음행을 통제하지 못하고서는 수행을 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중이 결혼하고서는 음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가?
정봉주의 전국구 '생선향기'를 듣다보면,
적나라하게 벌어지는 불교계의 난맥상을 알게 된다.
나는 또한 최근 우연히도 주지의 운전수라는 사람의 말을 듣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모시는 주지가 대처승인데, 술 먹고, 룸싸롱 다닌다고 이른다.
내가 아는 주지 스님 한 분은 대처승인데,
학행이 높고 덕행이 향기로와 배움이 크다.
과연 결혼하고서는 수행을 바로 할 수 없는가?
우리나라의 경우 역사적으로는 이판(理判), 사판(事判)의 대립과 긴장,
그리고 일제 잔재 청산 운동과 맞물리며 비구(比丘)와 대처승(帶妻僧)은,
서로 함께 자리를 나눌 수 없는 존재로 나눠져갔다.
결혼한 중을 중으로 봐줄 수 없다는 풍토가 과연 옳은가 그른가?
난 결혼하지 않은 비구의 청정한 모습을 존경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하여 마냥 백안시 하지는 않는다.
비구 중엔 음행을 일삼고, 축재에 혈안이 된 이도 있지 않은가?
한편, 대처승으로 학행이 크고, 도법이 높다란 이도 적지 않다.
내 평소 이 문제를 간간히 생각해보곤 하지만,
그리 깊이 있게 연구를 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기회가 되면 나름 이에 대한 나의 소회를 기록해볼까 한다.
오늘은 처음이므로 우선 기초 자료로서,
여기 당송 시대의 한 모습을 소개해볼까 한다.
당송(唐宋) 시대 중들이 결혼하고 육식을 하였다는 기록이 적지 않다.
광동(廣東) 지방은 독특한 곳이었는데, 외래 종교가 많이 유입되었다.
그 원래의 모습이 변질이 되곤 하였는데, 불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당송시대엔 인도에서 넘어온 중들이 부득이 결혼하고 육식을 하였다.
그러하니 비승비속(非僧非俗) 상태라 하겠다.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중들을 화택승(火宅僧)이라 불렀다.
당시 광동은 상업이 발달하여 시장이 번영하고, 부호들이 많았다.
부호가 상사(喪事)를 치룰 때 중을 초치하는데,
이 때 중들이 이(利)를 많이 취하였으니,
이는 청규(淸規)를 훼하는 일이라 하겠다.
재가승들은 불상을 내버려두고, 불경을 방치하였다.
불사를 재끼고 대신 복을 빌고, 재앙을 피하는 재만 지내며,
다만 돈 버는데 열중하였다.
이는 시중 잡배와 다를 바 없었음으니,
계율을 어기고 취처(娶妻)하고 육식을 일삼았다.
당(唐) 말기에 일부 중들이 사가에 머물며,
불사를 한다며 돈을 모았다.
그 중에게 시집간 여인네는,
중을 사랑(師郎)이라 불렀다.
송(宋)대에 이르러는 광동 지방의 이런 사랑이 더욱 늘었다 한다.
산서(山西) 사람인 장작(莊綽)은 광동으로 내려와
당시의 실정을 ‘雞肋編’에 기록으로 남겼다.
그에 따르면, 광동 지방의 중으로서 상업으로 치부한 이가 적지 않았으며,
취처한 중이 적지 않았다 한다.
실제 그는 부호의 딸과 결혼하는 중의 혼례식에 가서,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남겼다.
行盡人間四百州,只應此地最風流。
夜來花燭開新燕,近得王郎不裹頭。
여기 등장하는 不裹頭는 묶을 머리가 없는 중을 가리킨다.
송 말년엔 원나라 군대가 남하하여, 광동지방은 전란에 휩싸인다.
이에 많은 절이 파괴되고 불교가 쇠퇴하였다.
명나라 때 세종가정년간(1522-1566년)엔 칙령에 따라 사찰을 크게 폐쇄하고,
화택승을 환속시켰다.
이후 기록에서 화택승이라든가, 사랑이란 말을 발견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