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생법인(無生法忍)과 들깨
유마경(維摩經)을 읽다 무생법인(無生法忍)이란 말씀을 대하다.
이에 최근 내가 쓴 글 ‘들깨도 잠을 자고 싶다.’를 다시 상기하게 되었다.
먼저 무생법인에 대하여 간략히 생각해본다.
무생법인은 경전마다 약간씩 장면을 달리하여 등장한다.
무생법인을 해석할 때 대개는,
법화경에 등장하는 삼법인(三法忍)을 거론한다.
신인(信忍), 순인(順忍), 법인(法忍)
이중 무생법인은 법인(法忍)을 가리킨다고 본다.
한편 인왕경(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에선 오인법(五忍法) 즉,
伏忍, 信忍, 順忍, 無生忍, 寂滅忍의 다섯 수행법을 들고 있는데,
무생법인은 여기 無生忍에 해당된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는 生忍, 法忍의 두 가지 忍이 나온다.
그런데 말씀을 계속하기 전에, 여기 먼저 忍에 대한 이해를 해두는 것이 좋겠다.
인(忍)은 해석이 여럿 되지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따른다면,
인수(忍受)의 뜻으로 보는 것이 바를 것이다.
불교의 대표적 교리 중 하나인 6바라밀 중 세 번째에 인욕바라밀이 있다.
보시(布施)바라밀, 지계(持戒)바라밀, 인욕(忍辱)바라밀,
정진(精進)바라밀, 선정(禪定)바라밀, 반야(般若)바라밀
인(忍)은 바로 여기 등장하는 인욕(忍辱)바라밀의 인욕(忍辱)과 같다고 보면,
논(論)의 큰 뜻을 놓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실제 대지도론에서는 이리 말하고 있다.
修行般若波羅蜜已,入菩薩位,得無生法忍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면, 보살위에 들어가고, 무생법인을 얻는다.”
간혹 인(忍)을 인(印)으로 해석하기도 하나,
인욕(忍辱)은 실천적 수행을 내포하므로,
보다 역동적인 말씀의 훈향을 느낄 수 있어,
나는 이를 좇기로 한다.
다만, 인(忍)은 인욕 외에도 경우에 따라선,
인식(認識), 접수(接受), 담당(擔當) 부책(負責), 화해(化解), 성취(成就)란 뜻도 가지고 있는데,
이들은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일응 수긍이 갈 수는 있겠다.
허나, 나는 나중에 나의 견해를 새로 밝힐 것이다.
(※ 부책(負責) : 책임을 지다.
화해(化解) : 풀다, 없애다.)
이제, 대지도론을 중심으로 무생법인의 뜻을 찾아가본다.
有二種忍:生忍、法忍,生忍名眾生中忍,如恒河沙劫等,眾生種種加惡,心不瞋恚;種種恭敬供養,心不歡喜。
(大智度論)
두 종류의 인(忍)이 있는데, 생인과 법인이다.
생인(生忍)은 중생인(衆生忍)이라고도 하는데,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보살이 중생 가운데 처할 때, 중생이 수없이 많은 해악을 가해도,
마음속으로 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반대로 중생이 보살에게 공경심을 내어 공양을 해도,
마음속으로 즐거워하지 않는다.
大忍成就
중생살이엔 크게 참아야 이룸이 있다.
이제 그럼 법인(法忍)이란 무엇인가?
법(法)이라 하여 뭐 별 다른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일컫는다.
금, 은, 재물, 땅, 집, 아파트,
팔고(八苦),
생고 (生苦) 태어나는 괴로움
노고 (老苦)늙어가는 괴로움
병고 (病苦) 병들어 아픔 괴로움
사고 (死苦) 죽는 괴로움
애별리고 (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
원증회고 (怨憎會苦) 원수와 만나야만 하는 괴로움
구부득고 (求不得苦) 원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는 괴로움
오음성고 (五陰盛苦) 오온에서의 집착에서부터 생기는 괴로움
시비선악 등 유무형 일체의 것을 통틀어 법(法)이라 한다.
만사만법(萬事萬法)
인생을 살면서 닥치는 모든 일에 역량을 다하여 응한다.
이게 법인(法忍)이다.
不悔不沒,是名大忍成就
후회도 말고, 실망도 말고, 큰 인욕으로 나아갈 뿐인 것을.
이를 두고 대지도론에 이런 게송(偈頌)을 지어 노래하고 있다.
因緣生法, 是名空相, 亦名假名,
亦名中道。 若法實有, 不應還無,
今無先有, 是名為斷。 不常不斷,
亦不有無; 心識處滅, 言說亦盡。
이제, 무생법인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무생법인(無生法忍)은 그냥 무생인(無生忍)이라고도 한다.
왜 무생인가?
생(生)은 중생의 눈에 비추인 것이고,
무상정득정각(無上正等正覺)에서 보자면 실상은 차별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인(忍)은 인욕이 아니라 인(認)으로 해석하는 게 옳다.
가령 생인의 경우 나를 중심으로, 내 가족, 친지 .... 등의 친소 관계에 따라,
고통 등의 강약이 달라진다.
무생(無生)은 너와 나를 차별하지 않으며,
그 고통 등의 강약에 층하를 두지 않는다.
그래서 인욕(忍辱)이 아니라,
이런 세상의 실상을 바로 인식(認識)하느냐의 문제가 된다.
그래서 앞에서, 인(認)으로 해석하자고 하였다.
예를 하나 들어본다.
내 가족이 큰 불행에 빠졌을 때,
우리는 직접 나서서 그와 함께 울고, 돕고, 돌보게 된다.
하지만, 나와 무관한 이의 불행을 두고도,
그리 쉬이 도울 것인가?
이는 쉽게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보살(菩薩)의 정신을 가진 이라면,
그게 나의 친척이든, 아니든,
차별을 하지 않고 돕는다.
전자는 생인의 경계이고, 후자는 무생인의 경계인 것이다.
앞에서, ‘무생법인(無生法忍)은 그냥 무생인(無生忍)이라고도 한다.’ 이리 말했다.
그런데 기실 이 말은 이리 말해도 된다.
‘무생법인(無生法忍)은 그냥 무법인(無法忍)이라고도 한다.’
생인과 같은 중생의 문제뿐이 아니고,
법인과 같은 세상의 일체 모든 사물에 관해서도,
바로 위의 논의를 똑같이 진행할 수 있다.
가령 정치 문제를 가지고 생각해본다.
친노, 친박 등은 정치 문제를 각기 자신의 계파의 이익 문제로 환원시킨다.
이를 지지하는 시민들도 자기 진영을 보호하기 위해, 무작정 역성을 들기 바쁘다.
하지만 그게 시민들 전체의 문제라면,
친노니 친박이니 하는 협소한 문제에 계박(繫縛)될 일이 아니다.
설혹 자신이 친노에 속하든, 친박에 속하든 이 따위엔 무관하게,
애오라지 사회 전체의 이익과 정의에 부합되는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이게 무법인(無法忍)이 말하는 경계이다.
그러니까,
무생법인(無生法忍)은 생법인(生法忍)에 대한 부정이다.
즉, 생(生忍), 법인(法忍)에 대한 부정이니,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하는 것이다.
참고로 무생(無生)의 뜻을 유마경을 빌어 여기 되새겨두련다.
無生而說生即是假生。假生即是不生。不生即相空也。故世諦破性立假。真諦破假。即是相空也。
(維摩經玄疏)
“무생이란 말은 생(生)이 임시 가짜의 생(生)란 말이다.
가생(假生)이기에 불생(不生)인 게다.
불생(不生)이기에 상공(相空)인 바라.
그런즉 세간의 이치는 본성을 깨뜨리고, 거짓을 세운다.
진짜배기 진리는 거짓을 파한다.
그런즉 상공(相空)인 게다.”
생(生) ↔ 무생(無生) → 가생(假生) → 부생(不生) → 상공(相空)
경에 등장하는 무(無), 불(不) 등의 자기부정적 형식은,
불교학적 진리 진술(陳述), 교설(敎說) 구조의 핵심을 이룬다.
‘들깨도 잠을 자고 싶다.’
농부 하나가 여기에 있다.
그는 들깨를 키워 이를 팔아야 먹고 산다.
들깨를 열심히 돌보며 잘 자라도록 갖은 정성을 다한다.
여기까지는 생인(生忍)의 경계이다.
헌데, 어느 날 들깨가 잠을 자지 않도록 하면,
잎을 많이, 그리고 오래도록 딸 수 있다는 악마의 말씀을 듣는다.
한편, 각종 매체는 농가에 큰 도움이 되는 연구 성과라 칭찬을 늘어놓으며 소개를 한다.
그러자 농부는 득의양양(得意揚揚) 밤에도 불을 밝혀 들깨가 잠을 자지 못하도록 한다.
처음 이를 시도한 농부는 돈을 좀 벌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정보가 들깨 농부 모두에게 전해지고,
그들이 모두 이런 방식으로 들깨를 키우면,
시장에선 공급이 많아지고, 가격은 기대만큼 오르지 않을 것이다.
결국 들깨만 인간이 편 마수(魔手)에 걸려,
큰 시름 속에 한 평생을 마감하게 된다.
나 같은 자연재배자는 오늘날과 같은 비정상적인 환경하에선,
일반 관행자배자보다 블루베리를 더 비싸게 받고 파느네 마네하며 고민할 것이다.
하지만, 기실 더 받고 팔려 하여도 그리 줄 사람조차 찾기 어렵다.
어차피 시장은 전판이 잠을 재우지 않는 농법이 장악하고 있다.
기실, 가만히 따져보면,
유기농이니 자연재배니 하는 것조차 모두 시장을 겨냥하고, 자본에 복속되어 있다.
모두 시장을 의식하고, 관행농 대신 유기농을 선택하였을 뿐,
무생법인(無生法忍)의 도를 깨우쳐 그리 유기농을 하고 자연재배를 하는 이는 극히 드물다.
만약 모든 이가 정상적인 농사를 짓는다면,
시장에서 구매자는 농산물에 적정 가격을 주고 구입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 들깨는 밤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있다.
이게 과연 꿈같은 이야기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마음을 바로 갖는다?
애시당초, 나는 이런 것을 꿈꾸지 않는다.
그럼, 그게 무엇인가?
나는 법(法)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이에 대하여는 이 자리에서 늘어지니 삼간다.
한편, 농학자라는 이는 열심히 들깨를 괴롭히는 방법을 연구한다.
게다가 건강식품회사와 결탁하여 그게 몸에 좋다는 연구 논문을 양산해낸다.
이 지경에 이르면 이것은 생인(生忍)의 경계를 넘어,
아수라(阿修羅), 아귀(餓鬼), 지옥(地獄)의 경계로 들어간다.
기실, 생인(生忍)은 이런 모습까지도 다 아우르는 말씀이다.
모든 이들이 아귀처럼 살아가는 게 오늘 날 한국 땅의 현실이다.
엊그제 19살 꽃다운 젊은이가 지하철 현장에서 사회적 타살을 당했다.
비정규직은 모든 굳은 일을 떠맡고,
정규직은 낙하산 타고 내려와,
시원한 에어콘 바람 쐬고 앉아,
책상머리를 지키며 고액 연봉을 받는다.
‘들깨도 잠을 자고 싶다.’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다면,
들깨도 편히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며,
소도 좁은 철창에 갇혀 있지 않고, 초지를 거닐며 풀을 뜯을 수 있을 것이며,
19살 비정규직 청춘이 타살을 당하지 않고, 사랑과 꿈을 영글리며 살 수 있었으리라.
이런 세상을 만들지 못하면,
우리는 모두 공범자로 비굴하게 살아가야 하며,
피해자로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여기 두 분의 말씀을 싣는다.
19살 젊은이의 어머니께서 절규한, 그 말씀이 여기 있다.
(※ 출처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7271)
위대한 챔프 무하마드 알리의 말씀이 여기 있다.
“내 고향 루이빌에서는 소위 우리 ‘니그로’ 들이 개 취급을 받고 기본적인 인권도 누리지 못하고 있는데 왜 그들은 나에게 군복을 입고 1만 마일 떨어진 곳으로 가서 베트남에 사는 갈색 인종들에게 폭탄을 떨어뜨리고 총알을 쏘라고 요구하는가?
나는 백인 노예주들이 전세계 유색인종들에 대한 지배를 유지하려고 강요하고 있는, 내 고향에서 만 마일 떨어진 곳의 가난한 나라로 가서 사람들을 학살하고 불태우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바로 그 같은 악이 종식되어야 하는 날이다. 사람들은 참전 거부 때문에 내가 이제 수백만 달러를 손해 보게 될 거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나는 이미 말했고 이제 다시 말할 것이다.
내 동족의 진정한 적은 바로 이 나라 안에 있다.
나는 자기 나라의 정의, 자유, 평등을 위해 싸우는 모든 이들을 노예로 종속시키고자 하는 음모에 나 자신을 도구로 이용당하게 함으로써 내 종교, 내 동족, 나 자신을 욕보이지 않을 것이다…
만일 전쟁에 나가는 것이 이천 이백만 내 동족의 자유와 평동을 가져오기 위한 것이라면 그들은 나를 징집할 필요도 없다. 나는 바로 다음 날로 전쟁터로 나갈 것이다. 자신의 믿음을 위해 싸운다면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
나를 감옥에 가두어 넣는다면 뭐 어떤가? 우리는 이미 지난 400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 출처 : http://www.vop.co.kr/A00001032075.html)
알리 : “나는 그저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그는 그의 바람대로 이제 영원한 자유를 획득하였다.
남겨진 우리는 이 자리, 여기에서부터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한다.
무상법인이 뭐 별 것인줄 아는가?
인욕이라니까 그저 참는 것이 도리인줄 아는데,
이것은 순전 엉터리다.
그리 말하는 이는 전부 악마구리 파순(波旬)이며,
그리 이해하는 이는 모두 제 혼을 잃은 어리석은 이다.
이 도를 닦아,
到達七地至八地之間
칠지, 팔지에 도달한다고 이르지만,
지금 살고 있는 이 땅 말고 다른 곳을 구하지 마라.
不生不滅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하지만,
현상계에 갇힌 중생은 태어나면 죽게 마련이다.
무생법인 죽지 않는 도리를, 또는 不生不滅의 도리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죽는 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외면하면 不生不滅은 순 엉터리가 된다.
2600년 이래,
법신(法身)의 은혜를 입어,
나는 이제 처음으로 새로 말한다.
“무생법인은 자유를 위해 싸우는 법, 그 진리를 일컫는다.”
자유를 얻으면,
그때엔, 무생법인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진다.
이 말은 자유는 무생법인과 하나도 다름이 없다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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