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놈, 잡녀가 되어지라
(※ 참고 글 : '잡놈'이 되고 싶다는 나의 그녀는 오늘도)
그 분은 본디 홀로 사셨다.
傷時憤俗하며 獨空雜記나 쓰고 계셨음이라,
헌데, 어느 날 아름다운 여인이 찾아왔다.
그리고는 가연(佳緣)을 맺었다.
그러한데 이 분이 어떤 분(이하 병녀(丙女)라 칭한다.)을 만났는데,
병녀의 말씀이 이러했다 한다.
“당신은 집에 보물을 두고 있다고. 보물을 보물답게 잘 간수해야지 안 그러면 안 된다고,”
이 분이 보물? 하고 반문을 하니 이리 말했다 한다.
“돈 좀 있으세요? 없잖아요. 유명인사 같은 명예 있으세요? 없잖아요. 그렇다면 젊음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글쎄, 아니잖아요. 아무것도 없는 그런 중늙은이를, 응? 이런 어려움 저런 어려움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싹 무시하고 깔깔거리며 붙어 있는 여자를 보물이라고 하지 않으면, 응? 뭐가 보물이겠어요?”
이분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렇구나, 하고 금방 설득되었다 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듣고는 바로 의문을 일으켰다.
젊은 처자가 꿈결인 양 스스로 찾아와 각시가 되었다니,
이야말로 보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헌데, 이게 돈이 없기 때문이라든가, 유명인사가 아니라든가, 중늙이라든가 라는 조건 때문에,
부인이 보물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돈이 많다든가, 유명인사라든가, 청년이라면,
부인은 보물이 아니 되는가?
이런 물음에 저이는 대답하여야 한다.
한편 부인 입장에서 보자 하여도 저 병녀는 사고방식이 영 속물스럽다.
부인이 이 분한테 온 것은 돈이 있고 없고가 아니고,
유명인사 이고, 아니고가 아니고,
중늙은 이고, 아니고가 아니고,
인간 한 분을 사모하여 오신 것이 아니던가?
바로 그리 오셨으니까 보물이신 것이며,
보물로 오셨은즉 남편 분 역시 보물이 되는 것임이라.
(어찌 보면 남편 분이 먼저 계셔,
부인께서 보물이 되는 것이다.
남편 분이 아니계셨으면,
아마도 필시 저 부인께선 늙으막까지 고절(孤節)을 지키시고도 남음이 있다.
나 역시 사내인지라, 슬쩍 이리 남편 분 역성을 든다.
아니 그러면, 부인의 보물 타령을 아마도 평생 듣고 지내실 터인즉,
이리 응원의 말씀을 남겨둔다.)
헌즉, 저 병녀의 말은 부인께는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실인즉 모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이치를 여읜 어떠한 변설(辨說)도 사설(邪說)이 된다.
저 초심(初心)이야말로 귀한 보물의 근거가 된다.
병녀는 우정 부인을 염려하는 듯 괴설(怪說)을 늘어놓고 있지만,
제 말이 얼마나 엉터리인줄 알기나 하는 것일까?
돈에 상관없이 온 이를 두고,
돈이 없는 이에게 왔으니 보물이라 이르고 있질 않으냐?
유명인사에 무관하게 온 이를 두고,
유명인사가 아닌 이에게 왔으니 보물이라 하고 말하고 있다.
이 어찌 괴이쩍은 언설이 아니겠음인가?
남편 되시는 분은 이리 말씀하시고 계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렇구나, 하고 금방 설득되었다. ”
아, 천하에 이리 착하실 수가 있는가?
하지만, 천하에 제일 성질이 고약한 나는 이 장면을 보고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병녀가 병남이라면 그저 그 자리에서 드잡이질을 하고서는 마당가에 내팽겨쳤으로되,
여자인고로 그저 글로만 다스릴 뿐이다.
천만 다행인줄 알아야 하리라.
헌데, 부인께서 잡놈(잡년)이 되기로 작정 하셨단다.
난 화엄경에 나오는 선재동자(善財童子)를 이내 떠올린다.
선재동자는 법(法)을 구하러 53인의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나선다.
바라문은 물론 외도, 어린 아이 그리고 바수밀다란 창녀도 만난다.
53인은 일체지(一切智)를 뜻한다.
53인은 사람 쉰셋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나아가 동식물, 우주 삼라만상의 상징이니,
곧 무량(無量)과 같다.
그러하니 딱 53 선지식만 스승이 아니라,
모두가 선생이며 비로자나불의 당체이며,
곧 우리의 마음이다.
헌즉 맹모가 걱정하던 어린아이가 아니라, 성인(成人)이라면,
선처(善處)가 별처(別處)로 따로 있다 할 것이 아니며,
선지식(善知識)이 따로 계시다 할 것도 없다.
진자리 피하고,
마른자리만 골라 딛고서,
과연 세상의 도리를 옳게 깨우칠 수 있겠음인가?
거기 잡놈, 잡년들이 저지르는 짓을 보면,
선재동자가 만난 이들과 무엇이 다르랴?
그러함인데 부인께선 중도에 ‘불쾌한 냄새’ 때문에 끝을 보지 못하고 그만 두셨다 한다.
바로 이 순간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엿본다.
선재동자는 53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 법을 구했다.
불쾌한 냄새만 있었겠음인가?
하지만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선재동자는 구법행(求法行) 마지막으로 미륵보살을 만난다.
(실제는 그 후에 문수, 보현을 더 만난다.)
唯願大聖。開樓閣門令我得入。時彌勒菩薩前詣樓閣彈指出聲其門即開。命善財入。善財心喜。入已還閉。見其樓閣廣博無量同於虗空。
“그가 미륵에게 청하길 누각 문을 열어 자신을 들이길 원한다 하였다.
미륵이 손가락을 퉁기자 누각 문이 열려, 선재동자가 들어올 것을 명하였다.
선재동자는 마음이 기뻤다.
선재가 들어가자 다시 문이 닫혔다.
그 누각을 보니 광대하기가 끝이 없어 허공과 같더라.“
그러니까 선재동자가 53인을 다 만나고 나서 미륵을 만난 장면이다.
그동안 구법행각을 하여 닦은 바 있다한들,
그게 끝이 아니다.
누각 안으로 들어가자 다시 reset되고 만다.
허공과 같다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53인 만나 끝날 것 같으면,
그 다음은 죽음 밖에 더 있겠는가?
53인은 백, 천, 만, 억 곧 무량(無量)수인 것임이라.
다시 선재 앞엔 허공이 펼쳐지고 있다.
무량이란 말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손가락 한번 퉁 튕긴다는 말을 이해하겠음인가?
미륵이 뭐 대단하다고 신통 자재하여 그런 재주를 피운 줄 아는가?
내 앞에선 어림없는 수작이다.
똥 기저귀 찬 어린아해가 죔죔(잼잼) 한번만 하여도,
단 일각 사이에 108번 누각 문 개폐가 일어난다.
如是自性如幻如夢如影如像。
“이와 같이 자성은 환(maya)과 같고, 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본뜬 형상과 같다.”
아,
나는 부인께서,
부디 잡년이 되시어,
잡놈 부군과 함께 진보부처(珍寶夫妻)로,
이승을 꽃다히 수놓으시길 축원(祝願)드린다.
瓔珞處處垂下
저분들 마당가 꽃밭에 향기로운 꽃과 달콤한 열매가,
영락 구슬처럼 처처마다 드리었으니,
과시 꽃다히 아름다운 두 분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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