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무(橐籥)
제 아무리 계집 사람이 좋다한들,
두 집 살림을 어떻게 감당하였을까?
내가 서울과 시골을 오가며 지내다보니 드는 생각이다.
지금 블루베리 수확이 끝나서 여유를 찾았으나,
수확 철엔 시간이 모자라 잠을 제대로 자기도 어려웠다.
예전엔 첩을 두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소싯적엔 동네에 첩을 둔 집이 몇 집 건너 있었다.
天子一取十二女,象十二月,三夫人、九嬪。諸侯一取九女,象九州,一妻、八妾。卿大夫一妻、二妾,士一妻、一妾。
(蔡邕 獨斷)
“천자는 열두 여인을 거느리니 이는 열두 달을 따르는 것이요,
부인 셋, 비빈 아홉을 말한다.
제후는 아홉 여인을 거느리니, 이는 구주(九州)를 흉내 낸 것이요,
부인 하나, 첩 여덟을 이른다.
경, 대부는 처 하나에 첩이 둘이다.
일반 선비는 처 하나에 첩이 하나이다.“
비운의 천재 채옹(蔡邕)이 쓴 독단(獨斷)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다.
돌이켜 생각하니 여인을 저 정도로 거느릴 정도면,
살림 규모가 얼마나 커졌을까?
이 살림을 제 혼자 하지는 못하였을 터니,
일반 백성들의 도움을 받지 않을 도리가 없었으리라.
헌즉 이게 궁극엔 인민들의 고혈(膏血)을 쥐어짜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자주 농장에 가지 못하니,
비닐하우스 안에 있는 묘목 몇몇이 말라 죽곤 한다.
하우스 안은 여간 뜨거운 것이 아니다.
물을 저들이 원하는만큼 충분히 자주 주지 못하니 이런 일이 생겨난다.
이제 노지는 거지반 식재가 끝났다.
따라서 하우스 안엔 심고 남은 묘목이 자라고 있다.
차후 추가 식재를 위한 일부 중요 품종은 별도로 관리를 하기에,
이런 일이 잘 생기지 않으나,
추가로 심을 계획이 없는 품종은 제대로 돌볼 형편이 되지 않아,
오래간만에 찾아가면 하나, 둘 말라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내가 밭에 풀을 키우지 않았으면,
물을 자주 주지 않는 노지에 식재한 블루베리 나무 중에서도,
아마도 고사한 것이 나타날 수 있었으리라.
이 폭염에도 노지 것은 잘 견디고 있다.
이는 풀로 덮힌 지표면에서 수분 증발이 자연스럽게 억제되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는 재작년보다, 그리고 작년보다 더욱 풀의 축적량이 많다.
초기엔 고생이 좀 되었지만,
이젠 풀의 공덕을 깨닫게 되었기에,
해가 갈수록 마음은 더욱 미더움과 고마움으로 충일(充溢)된다.
하우스 안의 묘목들이 인위적인 가뭄에 어떻게 대처하고, 자라고 있는가?
품종에 따라 그 양식이 사뭇 다르다.
이게 올해 특별히 깨우치게 된 것인데,
좋은 공부 자료가 되었다.
레카 > 엘리자베스 > 선라이즈 > 토로 > 스파르탄
(그 후과로 인한 것일 텐데, 2017년 관찰로는 선라이즈, 엘리자베스, 페트리어트가 특히 순 발달이 늦었다. 다만 이는 하우스 안의 묘목 대상 결과이지, 노지 것은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다.)
이 순서로 가뭄에 강하다.
첨언 허거니와 이것은 나만의 단순 관찰 결과이지,
일반화할 가치 무게는 없다.
내 지역, 용토 조건, 하우스 조건, 재배자의 급수 주기 따위로 제한되어 있다.
주의할 일이다.
그 외 블루레이, 보너스, 패트리오트, 챈들러, 블루골드, 선샤인 따위는,
식재 용토가 남달라 수평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으므로,
줄을 세우지는 않기로 한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던진다.
“가뭄에 단련이 되어 여기 묘목은 한지(旱地)에서도 잘 자랄 것이다.”
나는 이런 말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이런 따위의 인식은 현상(現像)에 발이 묶인 피상적인 관찰에 의지하기 때문에 생긴다.
왜 그런가?
가령 엘리자베스와 스파르탄을 두고 생각해보자.
가뭄이 극심한 경우 엘리자베스는 10주 중 8주가 살아남는다면,
스파르탄은 10 주중 5 주만 살아남을 것이다.
이젠 우리 농장의 스파르탄과 다른 농장의 스파르탄을 가상으로 비교해보자.
아마도 우리 농장의 것이 10 주중 5 주만 살아남는다면,
다른 농장의 것은 4 주 혹은 6 주는 살아남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품종별 즉 유전학적 차이는 어찌 해볼 도리 없이 확고부동한 지배적 요인이 되나,
현실 적응 능력이란 상대적인 것이라 절대 본질을 구속하지 못한다.
만약 한지(旱地)에 심을 블루베리를 구한다면,
굳이 우리 농장 것을 택할 일이 아니라,
가뭄에 잘 견디는 품종을 찾는데 집중하는 것이 낫다.
진화라는 것도 생물들의 적응 능력 향상 때문이 아니라,
자연선택(自然選擇, natural selection)의 결과일 뿐이다.
그러니까 본성이 환경에 적응하여 점차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준비된 환경에 적합한 품종, 개체가 살아남는 것이다.
天地不仁,以萬物為芻狗;聖人不仁,以百姓為芻狗。天地之間,其猶橐籥乎?虛而不屈,動而愈出。多言數窮,不如守中。
(道德經)
“천지는 어질지 않아, 모든 것을 풀강아지처럼 다룬다.
성인은 어질지 않아, 백성을 풀강아지로 다룬다.
천지 사이는 풀무와 같은 것인가?
비어있으나 굴하지 않고, 움직일수록 더욱 세진다.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지니, 허와 같은 본래의 속심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
여기 추구(芻狗)는 풀로 만든 강아지로서,
제사 지낼 때 쓰고는 버리게 된다.
추영(芻靈)의 하나인데, 동물이나 사람 모양으로 만들어,
재해를 없애려고 만든다.
우리나라 세시 풍속에서도 제웅이라고 짚으로 만든 인형이 있다.
정월 대보름에 액막이 하려고 만들곤 하였다.
이것에다 동전이나 지폐를 끼우면 동네 개구쟁이들이 이를 업고 나간다.
동전은 취하고 제웅은 버린다.
이 돈으로 저들은 그날 신나게 즐기며 논다.
액막이를 이런 식으로 하는데,
내 소싯적에는 이런 액막이 행사가 있었다.
제웅을 다리 밑이나 길거리에 미리 버려둔다고 책엔 쓰여 있지만,
우리 동네에선 형뻘되는 큰 아이들이 그 집으로 찾아와,
액막이 할 당해자에게 절을 하고는 업고 나갔다.
그러지 않고 길바닥에 버리면 액이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할 수 없다.
우리 동네 사람들이 훨씬 현명하였다 하겠다.
천지불인(天地不仁)
그러니까, 천지는 유위(有爲)가 아니라, 무위(無爲)로써,
만물을 한번 쓰고 버리는 제사 때의 풀강아지(芻狗) 정도로 여긴다는 말이다.
오늘날 진화의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자연선택(自然選擇, natural selection)이란,
실로 노자의 천지불인과 매한가지다.
돌연변이에 의해 환경에 적합한 요소를 간직한 개체가 준비되어 있다가,
환경 변화에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도태되어 버린다.
이런 유전자들의 개체 집합 즉 유전자 풀(gene pool) 가운데 적합한 것이 선택 될 뿐이다.
여긴 그저 시간의 담금질,
즉 노자가 말하는 무사무위한 풀무(橐籥)질의 역사(役事)가 장구히 일어날 뿐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설에 따르면 즉 신선택(神選擇, god selection)과
노자의 생각은 전혀 일치하는 바가 없다.
사고방식의 극단적 상위(相違)가 여기에 있다.
반면 육종(育種)과 같은 인공선택(人工選擇, artificial selection)은,
다만 인간의 이해를 위해 인공적으로 선택, 개량된다.
여긴 자연선택의 행로에서 소요되는 수 만, 수 억의 시간이 수 년, 수십 년으로 축약된다.
오늘날엔 단순한 육종을 넘어 공학을 생명에 끌어들이고 있다.
이름하여 생명공학(biotechnology)이라,
이들은 유전자까지 조작(造作)하려 한다.
자연 또는 신의 영역까지 넘보려 하고 있음이다.
인간들이 아차 잠깐 방심하는 틈에,
천지지간의 풀무는 인간의 방종(放縱)을 벼락불로 응징할 것이다.
오늘날 생명공학을 앞에 두면,
나는 늘 노자의 천지불인(天地不仁), 풀무(橐籥)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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