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칼
평화와 칼
내가 이 글의 제목을 이리 정하자,
베네딕드 여사의 국화와 칼이 생각난다.
나는 지금 모순(矛盾)에 대하여 잠깐 일설을 풀고 그 다음으로 나아가자 하는데,
이 모순은 영어로는 contradiction이라 하고,
국화와 칼처럼 역설(逆說)은 영어로는 paradox라 한다.
내가 지금은 이 양자를 깊이 논할 여유는 없다.
다만 말이 나왔으니 간략히 언급하고 넘어간다.
모순은 理則學上指不可同為真,亦不可同為假的概念或命題。라는 말이 잘 표현하고 있다.
즉 함께 참일 수도 없고, 함께 거짓일 수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양쪽이 동시에 참이나 거짓으로 서로 대립하고 있는 모습을 그리면 알기 쉽다.
이 둘은 절대 서로 화해할 수 없다.
하지만 역설은 얼핏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 같지만,
종국엔 이들을 넘어 하나의 가치로 귀결된다.
似非而可能正確的議論
아닌 것 같지만, 바른 의론으로 통합되어,
거죽으로 들어난 혼란이나 모순을 초월한다.
국화와 칼을 파라독스로 이해한다면,
일본이란 국지적인 문화 단위를 두고 문화상대적인 입장에 서서 일응 그리 봐줄 수는 있다.
하지만 정치학적으로는 민주시민 자아가 미숙(未熟)한 전체주의적 집단의 양태로 보이기도 하며,
철학적으로는 개인의 주체적, 실존적 각성에 도달하지 못한 전근대적이고 야만적이기까지 하다.
각설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간다.
歷山之農者侵畔,舜往耕焉,期年,甽畝正。河濱之漁者爭坻,舜往漁焉,期年,而讓長。東夷之陶者器苦窳,舜往陶焉,期年而器牢。仲尼歎曰:「耕、漁與陶,非舜官也,而舜往為之者,所以救敗也。舜其信仁乎!乃躬藉處苦而民從之,故曰:聖人之德化乎!」
(韓非子)
“역산의 농부가 이웃 밭둑을 침탈했다.
순임금이 가서 농사를 지었더니 일 년이 되어, 밭도랑과 두둑이 바로 잡혔다.
황하 물가의 어부가 고기잡이 물터를 다투었다.
순임금이 가서 고기잡이를 하다, 일 년이 되어, 나이 많은 이에게 양도하였다.
동이 땅의 도자기 굽는 이가 그릇을 약하게 만들었다.
순임금이 가서 도자기를 구우니, 일 년이 되어 그릇이 단단하게 구워졌다.
공자가 탄식하며 말하다.
‘농사, 고기잡이, 그릇 만드는 일은 순임금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순임금이 가서 그 일을 한 것은 나쁜 일들을 바로 잡기 위함이다.
순임금은 정녕 어지시구나.
바로 손수 몸으로 고생을 행하시니 백성들이 따르는 것이다.
고로 성인의 덕이 사람들을 감화시켰다 이르는 것이다.’”
이것은 유가가 흔히 하는 말이다.
이 말은 얼핏 하자가 없는 바른 말처럼 들린다.
헌데 한비자의 신랄한 다음 말을 마저 들어보자.
或問儒者曰:「方此時也,堯安在?」其人曰:「堯為天子。」「然則仲尼之聖堯奈何?聖人明察在上位,將使天下無姦也。今耕漁不爭,陶器不窳,舜又何德而化?舜之救敗也,則是堯有失也;賢舜則去堯之明察,聖堯則去舜之德化;不可兩得也。
(韓非子)
“어떤 이가 유자(儒者)에게 물었다.
‘마침 그 때 요임금이 어디에 있었는가?’
그자가 말하였다.
‘요임금은 천자였다.’
‘그렇다면, 공자가 요임금을 천자라 부른 것은 어찌 된 것인가?
성인이 천자 자리에서 밝히 살피는 것은 장차 천하에 간악한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제 밭 갈고, 고기 잡는 일에 다툼이 없으며, 질그릇이 약하지 않았다면,
순임금이 또 무슨 덕화를 펼 일이 있겠음인가?
순임금이 구악을 제거하였다 하면, 요임금의 실책이 있었다 할 것이며,
순임금을 현명하다 한다면, 요임금의 명찰이 있을 수 없다.
양쪽을 모두 얻을 수는 없다.’”
알다시피 요임금은 순임금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유가에선 요나 순임금 모두를 현인으로 떠받든다.
위에 든 예로써 순임금을 칭송하나,
순임금을 칭송하기 위해선 앞 선 임금인 요임금의 실책이 먼저 있어야 한다.
하나가 현명하다면 하나는 그렇지 못하여야 한다.
내가 지난번 토요일 광화문 촛불 집회에 참여하고 나서,
한 생각이 일어나 떠나지 않고 있다.
평화시위를 하지 않으면 큰 탈이 날 것 같은 분위기가 시위 현장에 감돈다.
경찰들이 쳐놓은 차벽의 차량에 시위자들이 각종 시위용 스티커를 붙였는데,
이것을 뒤 늦게 나타난 시위자들이 다시 떼어놓는 광경이 보도되었다.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듯 사람들은 행여 폭력이 배제된 평화 시위란 금제(禁制)가
훼손될까봐 안달하듯 조바심을 치고 있다.
그러자 나는 바로 위에서 인용한 한비자의 글귀가 떠올랐던 것이다.
시위가 왜 일어났는가?
위정자, 권력자가 비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닌가?
게다가 공화국에선 그들 권력은 고작 5년이란 한시(限時)로 제한되어 있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공화국 율법에 따라 벌을 가하며 응징함이 마땅하다.
저들은 차벽을 치고, 금을 긋고는 이 선을 넘어오면 용서치 않겠다고 하고 있다.
이는 곧 폭력을 예비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그러함인데 감자바위보다 못한 고작 스티커를 벗겨내면서 평화를 구하고 있는,
시위대들의 모습은 얼마나 어처구니 없게도 안쓰러운가 말이다.
촛불이란 최소한으로 인내가 내재된 시위가 무위로 돌아간다면,
횃불이 등장할 수도 있고, 나아가 죽창이 들릴 수도 있다.
범죄자를 응징하는데 촛불이 들린 것도 실로 우습기 짝이 없다.
공화국 법은 누구라도 죄를 지으면 강행, 강제된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함인데 기껏 촛불로 자진 하야를 권하고 있는데,
왜 평화란 이름으로 스스로를 절제하여야 하는가?
게다가 지금까지는 상대는 촛불을 무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화국 법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횃불 나아가 그 이상의 응징 수단이 동원된들 무슨 잘못이 있겠음인가?
경찰은 일반 범죄자가 항거하면,
경찰봉으로 때리며, 도망가면 가스총으로 쏘거나,
때에 이르면 권총으로 제압하기도 한다.
항차 공화국 대통령이 죄를 지었다면,
시민들의 점잖은 촛불 시위를 막을 것이 아니라,
청와대로 뛰어 들어가 범죄자를 잡아 끌어내려야 한다.
앞에서 인용한 한비자의 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글을 마저 소개한다.
이글은 흔히 우리가 아는 모순(矛盾)의 출전이기도 하다.
楚人有鬻楯與矛者,譽之曰:『吾楯之堅,莫能陷也。』又譽其矛曰:『吾矛之利,於物無不陷也。』或曰:『以子之矛陷子之楯,何如?』其人弗能應也。夫不可陷之楯與無不陷之矛,不可同世而立。今堯、舜之不可兩譽,矛楯之說也。且舜救敗,期年已一過,三年已三過,舜有盡,壽有盡,天下過無已者,以有盡逐無已,所止者寡矣。賞罰使天下必行之,令曰:『中程者賞,弗中程者誅。』令朝至暮變,暮至朝變,十日而海內畢矣,奚待期年?舜猶不以此說堯令從己,乃躬親,不亦無術乎?且夫以身為苦而後化民者,堯、舜之所難也;處勢而驕下者,庸主之所易也。將治天下,釋庸主之所易,道堯、舜之所難,未可與為政也。」
(韓非子)
“초나라 사람으로 방패와 창을 파는 이가 있었다.
이를 뽐내며 말하였다.
‘나의 방패는 단단하여, 꿰뚫을 수가 없다’
또 그 창을 자랑하여 말하였다.
‘내 창은 예리하여, 꿰뚫지 못하는 물건이 없다.’
어떤 이가 말하였다.
‘네 창으로 네 방패를 뚫으면 어찌 되는가?’
그 사람은 대답할 수 없었다.
무릇 꿰뚫을 수 없는 방패와 꿰뚫지 못하는 것이 없는 창은 동 시대에 있을 수 없다.
이제 요, 순 임금을 동시에 칭찬할 수 없음은,
창과 방패를 두고 말한 이치와 같다.
순임금이 나쁜 풍속을 바로 잡았다하는 것도,
일 년이 지나 기껏 하나를 바로 잡았으며,
삼년이 지나 세 가지 잘못을 고쳤다는 것이니,
순임금에게는 한계가 있으며,
그 수명이 다하면, 천하에 잘못이 그칠 새가 없으리라.
다함이 있는 것으로 그칠 줄 모르는 것을 쫓는다면,
그를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이 적을 것이다.
상벌이란 천하 사람들을 반드시 행하도록 시키는 것이다.
명령하여 이르듯,
‘법에 맞는 자는 상주고, 법에 어긋나는 자는 벌을 준다.’라고 한다면,
영(令)이 아침에 이르면 저녁에 변하고,
저녁에 이르면 아침에 변하여,
열흘이면 천하에 다 미칠 것이다.
어찌 일 년을 기다리겠는가?
순임금은 외려 이로써 요임금을 설득하여 이를 따르게 하지 않고,
자신이 몸소 행하였으니, 술(術)이 없음이 아닌가?
또한 도대체가 몸으로써 고생을 하고 난 후라야 백성을 감화시킨다는 것은,
요순이라도 어려운 것이다.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바로 잡는 것은,
평범한 군주도 하기 쉬운 일이다.
장차 천하를 다스리려 하면서,
평범한 군주도 하기 쉬운 것을 놔두고,
요순도 하기 어려운 일을 도모하려 한다면,
정사를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글의 핵심은 中程者賞,弗中程者誅。이 귀절이다.
여기 中程에서 程은 규정, 법률을 뜻하며,
中은 맞는다란 의미이다.
그러하니 中程이란 법에 딱 들어맞는다는 뜻이다.
법의 규정에 맞는 자는 상을 주고,
아니 그러한 자는 벌을 준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태가 벌어진지 사뭇 오래 전이다.
그러함인데 법으로 상대를 규율하지는 않고,
밤낮으로 떠들기만 하다 세월을 다 허비하고 있다.
주범은 놔두고 공범이나 종범만 잡아 깔짝거리고 있을 뿐,
정치권, 사법권은 부지하세월로 때를 흘려보내는 게으름을 피며,
제 잇속을 따지느라 분주할 뿐이다.
탄핵이라는 것도 발의하지는 않고,
부작용이 하나요, 둘이며, 백이요, 천이다, 이리 셈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이게 그나마 현재 적용할 수 있는 법이라면, 즉각 걸어야 한다.
이게 미흡하고 엉성한 것이라면,
이제라도 고쳐 다음 일에 대비할 일이다.
법치국가라면, 범법자를 법으로써 징치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어쨌건 법으로 기소하고 절차를 밟아야 한다.
행한 법이 부족하면 다시 고쳐 보완해나가며,
사회를 끊임없이 변모시켜 나아가는 것이다.
촛불 시위는 범죄자들의 어두운 양심을 밝혀 바른 도리를 따르라는 권유에 불과하다.
이게 통하지 않으면 횃불도 있고 그 다음 죽창도 따르는 것임이라.
어차피 법률적 규율은 폭력적인 것이다.
이게 다만 합법적인 폭력인 것이지,
촛불 시위처럼 평화적 내용은 아닌 것이다.
中程者賞,弗中程者誅。
그러니까,
법에 맞지 않으면 주벌하는 것이다.
誅者,戮其人。
본디 주(誅)란 그 죄지은 사람을 죽인다는 뜻이다.
주벌하지 않고 말로써 이뤄지는 평화란 곧잘 우리를 속인다.
이는 환상일 뿐이다.
為不善乎顯明之中者,人得而誅之;為不善乎幽閒之中者,鬼得而誅之。
(莊子)
“착하지 않은 짓을 하여 드러난 자는 사람이 붙잡아 그에게 벌을 준다.
착하지 않은 짓을 하였으되 숨어 드러나지 않은 자는 귀신이 잡아 벌을 준다.”
잘못하면 귀신까지 나서 잡아 죽이는 법이다.
대자대비를 말하는 불교지만,
보아라, 절집 앞 일주문을 지나, 이내 나타나는 천왕문에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사천왕은 악을 무지막지한 무력으로 진압한다.
이리 악이란 도리 없이 폭압, 무력, 위신력, 형벌로 다스릴 수밖에 없음이다.
사람이란 그리 신뢰할 만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이를 인정하고, 불신할 때라야 세상의 평화가 온다.
법에 맞지 않을 때, 벌을 주어야 세상의 평화가 온다.
평화 촛불을 들었다고 평화가 온다고 마냥 믿을 일이 아니란 말이다.
(※ 참고 글 : ☞ 2015/02/15 - [소요유] - 신이물동)
하지만, 조금 있다가 광화문 집회에 나는 다시 참여할 것이다.
세상일에 나 같은 우부(愚夫)도 한 줌 힘을 보태야 한다.
이 혼탁한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이의 업보이자, 한편으론 도리이다.
그렇지만, 나보다 더 뛰어난 이들은 촛불 집회처럼 점잖은 짓 말고,
법의 위력으로써 악을 응징할 도리를 찾아내고,
부족하면 보완하고, 없으면 새로 만들어,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길 바란다.
만악(萬惡)의 근원은 친일파 척결(剔抉)의 미결(未結)에 있다.
좌, 우,
보수, 진보를 넘어,
이를 지지하면 나의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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