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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과 태극기

소요유 : 2016. 11. 30. 12:08


촛불과 태극기


시위 현장에 가면 저마다의 손에 촛불을 들고,

한 줄기 빛을 가슴으로부터 빚어내고 있다.


정치인 중엔 시위 현장에 가거든 태극기를 가져가, 흔들라 주문하는 이들도 있다.

이것 위험한 발상이다.

다행히 나는 현장에서 아직 태극기를 보진 못하였다.

이번 시위에선 태극기는 흔들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것 흔드는 장면을 보게 되면 끔직한 생각이 들 것이다.


촛불은 ‘시민 자각’ 내용의 외적 표상이다.

그러니까 작금에 일어난, 사태의 본질을 개개인이 각각 내적으로 깨닫고,

한데 모여 이를 확인, 표출하는 형식 절차에 동원된 매개물인 것이다.

이것은 시민 각자를 대변하고 있을 뿐,

사회나 국가 등의 집단을 대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태극기는 국가의 상징물이듯,

이를 흔드는 것은 국가의 이름을 빌어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시위는 위임된 권력을 국가란 이름을 빌어 농탕(弄蕩)질을 친 것을 단죄하자는 것이다.


그 동안, 입만 열었다 하면 저들은 애국을 하라하고, 개인을 희생하라 주문하지 않았던가?

나는 담배를 피지도 않고, 담배 냄새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담뱃값 올리고, 노동자 권익 제한하고, 부자 감세하며,

일반 서민들은 좀 더 참아라 하던 이들이 저들 아닌가?

한 마디로 애국하자는 이름으로 북 치고, 장구 치며,

시민들을 불러 동원하지 않않았던가?
그런 한 편 멀쩡한 산하를 유린하고, 화장실 뒷켠으로 재벌 호출하여 으르며, 

숯불처럼 벌겋게 낯 붉히며, 제 사익을 채우려 아귀처럼 공돈을 탐하지 않았던가?

이것 따지고 보면 서민 등 치며, 훑어치기에 재벌가, 부자에게 절로 고인 재부(財富)가 아니던가?


민주 사회는 국가가 먼저가 아니고 시민이 더 중하다.

우리나라 헌법 제1조 ②항의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이를 언명하고 있다.

개개인의 시민이 행복해질 때, 사회는 건강해지고, 비로소 나라가 강해진다.

이게 뒤집히면 오늘날처럼 야릇한 일이 벌어진다.


국가를 위해서 네들은 좀 희생하여라.

이런 주문과 강박이 위정자들에 의해 시민들에게 행해지곤 한다.

그러니까 국가란 이름으로 포장하여 시민들을 수단화하고, 객체화한다.

넋이 부실한 시민들도 이게 옳다 여기고 곧잘 따르곤 한다.

어림없는 소리다.

국가를 위해 시민들이 일방적으로 희생할 일이 아니라,

거꾸로 시민들의 행복을 위해 국가가 봉사하여야 한다.

민주 경찰, 공화국 군대 역시 시민들 권리를 제한하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 안전을 도모하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시위 현장에서 태극기를 흔들 때, 

부지불식 간 시민들 자신이 아니라 국가란 거대한 전체 조직에 함몰될 위험이 있다.

자신들을 위해 나아간 자리,

실상인즉 자신을 뒷전에 버리고 국가란 허울에 스스로를 방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리 반문하여야 한다.

시민은 어떠한 자리에 서든,

결코 국가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적 주권자임을 자각하여야 한다.


때문에, 국가란 이름으로 시민들에게 자행된 폭력에 항거하는 자리,

국가 상징물인 태극기는 마땅한 도구가 아니다.

이에 반해 촛불은 낱낱의 시민 각자를 대변한다.

200만 시민이 참여하였다면,

一燭一民,

시민 하나 당 촛불 하나,

낱낱의 200만 촛불이 타는 것이다.


하지만 태극기는 200만이 동원되어도,

종내는 그 시위 내용이 하나의 상징 국가 내로 수렴되고 만다.

민주 공화국에선 전체는 결과일 뿐이지, 결코 원인이 아니다.

원인이 되는 것은 낱낱의 공화국 시민일 뿐이지 국가가 아니다.

개별 단위 시민의 행복 총화로써 비로소 국가가 상징 대표될 뿐이다.


그렇다고 하여 지금 태극기를 혐오한다든가 불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우리가 독립운동을 한다면,

빼앗긴 나라를 찾고자 함이니 태극기를 앞세우며,

투지를 불태우며 일제히 뛰어나가 일제를 무찌를 수 있다.


오늘 시위하는 것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잃었던 시민의 권익을 회복하고,

엉터리 가짜 박가를 단죄하고자 함이다.

헌즉 태극기는 가당치 않다.


아우성치며,

정의를 부르짖을 때,

무엇인가 허전하다면,

태극기 대신 차라리 촛불을 들라.


하지만 말이다.

저 촛불 든 사람 중에, 반 수가,

지난번에, 이번 문제가 된 박가를 지지하였음을 기억해내야 한다.


오늘의 시위에 촛불을 듦에,

박가를 탓하는 것과 동시에,

어제의 제 양심 속도 한번 밝히 들여다보았으면 싶은 것이다.

촛불로 제 가슴 속 안을 헤집어 볼 일이다.


과연 우리들은 박가의 양심과 다를 자신이 있는가?


끝으로 옛 말씀에 기대어, 촛불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或問「仁、義、禮、智、信之用」。曰,「仁,宅也;義,路也;禮,服也;智,燭也:信,符也。處宅,由路、正服,明燭,執符,君子不動,動斯得矣。」

(揚子法言) 


“어떤 이가 물었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쓰임은 무엇인지요?’


답하다.


‘인(仁)은 집이요, 의(義)는 도로이며,

예(禮)는 옷이고, 지혜(智)는 촛불이며, 신(信)은 부절이다.


집에 처하고, 도로를 걷고, 옷을 바르게 입고, 촛불을 밝히고, 부절을 집는다.

군자는 움직이지 않지만, 일단 움직이면 (이와 같이) 바름을 얻는다.’”


우리가 촛불을 드는 바는,

바른 지혜로써 사물의 이치를 밝히기 위함이다.


혹자는 시위 현장을 보고,

마치 축제와 같다고 감탄하곤 한다.

이것 기분은 이해하지만, 조금 위험한 생각이다.


우리가 시위하는 것은,

남의 잘못을 밝혀 시비를 가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은 자신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바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살피는 것도 중요하다.

지난번에 바른 이를 가려내지 못한 잘못은 정작 시민 자신에게도 있음이다.

헌데 매양 남만 탓하며, 기분 낼 일만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반듯하니 제 집에 처하여 안돈하고 있는지?

옆길로 새지 않고, 도로를 바로 걷고 있는지? 

남의 옷을 빌려 입고 으시대거나, 옷을 흩뜨리고 있지나 않은지?

부절처럼 똑 들어맞는 믿음의 자리에 거하는지?

지혜의 촛불을 밝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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