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편의 댓글로 써내렸던 것이나,
쓰다보니 이것, 저것 소회가 오뉴월 쇠부랄처럼 늘어져, 부득이 이리 자리를 옮겨 뒷곁 변소간에 윙윙거리는 파리떼 같은 하찮은 글 부스러기를 갈퀴로 긁어 삼태기째 부려내놓습니다. 그저 송구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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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1과 시소2의 길이는 공히 80으로 하시고, 시소1 각속도는 25, 시소2 각속도는 -25. 위상차는 0으로 셋팅하신 후 운동을 눌러보세요.
( ※ 이리 相似합니다. 길이 : 강도, 자본의 양, 권력 크기, 인품의 무게 .... 각속도 : 고유진동수, 인격, 성품, 정치적 지향 .... 위상 : 작용 주체들이 관계 형성의 장에 참여한 시간 차 )
우측 시간공간 영역에 진폭이 제로인 그림이 그려집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 제 제안대로 시소를 인간이라고 한다면, 인간1과 인간2가 각속도(고유진동수라고 환치하여 생각하셔도 됩니다.)가 정반대, 즉 인격이라든가, 지향하는 바가 전혀 반대라는 것을 상정한 것입니다. 예컨대 ‘빠’와 ‘까’ 사이라고 할 때, 현실세계에서 그들이 창출하는 게 아무 것도 없다라는 것이지요. 진폭을 output의 강도라고 analogy한다면 출력 0인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뭐 이런 식으로 양자의 interaction 정도를 재미 삼아 추적해보려는 것입니다. 실제 이 그림은 파동에 관련된 것으로 대학 1년 차 아이들이 공부하는 내용입니다. 그런 것을 저는 이리 인용하여 소일해보는 것입니다. 저들 물리학도들 중에 저와 같은 사고실험내지는 놀이를 꾀한 자가 있을까 싶군요. 그런 사람을 만나면 술 한잔 받아주고 싶네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위 조건에서 위상차만을 변경시키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집니다. 가령 180으로 바꿔주면 우측에 진폭이 아주 큰 그림이 그려집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 제 제안대로 위상차는 “관계 형성의 장에 참여한 시간 차” 이리 정의한다면, 인간2가 시차를 두고, 가령 180이라는 것은 인간1과 박자를 영 그르치게 system에 뒷북치며 작용 또는 참여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결국엔 현실에선 최대의 output을 냅니다. 이는 코드가 다른 인간들끼리라도 박자를 엇갈리면 오히려 큰 결과를 낼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작용/반응 도식에서, (작용은 좌측 영역, 반응은 우측 영역에 표현됨.)코드가 달라도 작용한 ‘시간’이 다르며, 그들이 결코 의도하지 않았지만 현실에선 협조한 결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공간’에 크게 oriented 되어 있습니다. ‘시간’은 무시하는 경향이 의외로 강합니다. ( ※ 그 이유는 욕심이 눈 앞을 가리기 때문에 최종 결과에 매몰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 ) 이게 성과지상주의, 결과지상주의자들이 갖는 함정입니다.
그런데도, 저들이 현실에서 성공하는 이유는 저들 자체의 능력이 탁월함만이 아닙니다. 저들이 욕심을 행함에 부정과 부패와 손잡기 때문입니다. 이 성공방정식은 ‘시간’을 쉽게 우회합니다. 흔히 얘기하는 ‘급행료’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 바로 이 욕망이 돈이나 부정과 협잡하여 시간을 훔치는 대표적인 기술입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이제는 솔직하니 드러내놓고 이 게임을 즐기자는 태세입니다. 문제는 이를 기속(羈束)할 장치나 의지가 부재하다는데, 지금 한국사회의 불행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실, 모든 사람이 저 게임의 장으로 달려나오면, 게임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저 부정 게임은 실은 부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성공합니다. 부정하기 위한 마당은 실인즉 저들을 제외한 나머지 상대들의 정의로움입니다. 이 때라야 비로서 여유롭게 수단을 부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국민을 달음박질 시키듯 동원하여, 성공할 수 있다고 채근하고 격려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 사실은 이게 모종의 기도하는 바를 위한 저들의 책략에 다름 아닙니다. 그 모종의 기도하는 바를, 엊그제 저들은 거머쥐었습니다.
만인만수(萬人萬獸) 상태에선 모두가 실패합니다. 저들이 멍청하지 않은 바임이라, 새롭게 꾀한 것이 무엇입니까 ? 그게 바로 국토입니다. 멀쩡한 국토를 배 갈라, 저 아귀처럼 허갈진 이들의 배를 구휼하겠다라는 것 아닙니까 ? 저들은 여간 영악한 게 아닙니다. 산천초목, 동물도 아작내겠다라는 것인데, 문제는 그 다음이 아닙니까 ? 꽂감 빼먹기는게 당장 달기는 달지요.
그 날 그 이후. 그곳에 저들은 없을 것입니다. 줄행랑 친 그 자리, 죽 떠먹고 달아난 그 자리, 흔적도 남겨지지 않은 그곳을 지켜야 할 사람은 수수깡처럼 우우 소리를 지르며 내내 우지나 않을까 싶습니다. 칼 물고 뜀뛰기를 한들, 잃어버린 시간을 쫓아 잡을 수 있으랴 ?
역시 시간의 문제입니다. 저들은 시간에 무지합니다. 아니 알면서도, 저 순결한 시간을 능욕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저의 최근 화두는 ‘시간’입니다. 앞의 저의 글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 역시 시간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식시장에서도 분석할 때, 보통은 공간에 강하게 매어 있습니다. 즉 1000원, 1100원 따위의 주가 수준, 즉 공간에 연연합니다. 하지만, 마이더스의 황금치환술은 시간의 함수인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술은 반드시 시간이란 세례를 받아서야 농익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좋은 술’ 그 자체만을 탐합니다. 이미 만들어진 그 결과에 의식이 자석처럼 강하게 달라붙어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사실 이런 욕망을 돈으로 구매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더욱 시간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돈이 없는 사람도 이런 습관에 젖어 있기 때문에 무리가 따르며, 로또 같은 기대 즉 시간이 거세된 꿈의 제단에 기꺼이 자신을 눕힙니다.
주식시장 같은 게임의 장에도 이게 실패의 원인이 됩니다. 예전엔 시간이란 묘약이 발효시키는 ‘사랑’의 세계도 마찬가지였는데, 지금은 이 조차 시장에 나와 있습니다. 요즘 세상은 거의 모든 게 시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주식 게임은 자체가 자본시장이면서도, 그 게임에 이기기 위해서는 공간이 아니라, 지그시 시간에 복무하여야 합니다. 이 부분은 지금은 지나치지요.
“시간을 의식하라”
이 화두의 예가 위 모델에선 ‘위상’ 조건입니다. 모델의 좌측 영역에서는 위상 차가 분명이 차이를 드러냅니다. 하지만, 우측 영역에선 시간공간 도메인임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이게 시간의 무늬를 만들어내는 그 중요 추동 인자인 위상(phase)이 은폐되어 있습니다. 아니, 자세히 관찰하면 알 수 있지만, 대부분은 욕심과 두려움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지나치게 됩니다. 저는 이 부분에 주목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얼개는 얼추 얽어놓기 하였는데, 글로 쓰자니 생각만큼 여의치 않군요. ㅎㅎ
끝으로 또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좌측 frequency domain에서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위 조건하에서, 위상 차가 변해도 모두 직선운동을 합니다. 저는 여기서는 좌측 영역을 내부인들이 만들어내는 힘의 교합상태, 그 에너지들의 패턴, 무늬라고 상정합니다. 외부인은 이를 알지 못합니다. 사실 외부인이 이 내부의 역학관계를 알 수만 있다면, 거죽으로 들어난 동일한 현상이라도, 실제는 영판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도통한다는 것은 바로 이 좌측 영역을 투시하는 것이 아닐까 이리 상상해봅니다.
하여간 이런 식으로 조건을 달리하며, 상상력을 무한 키워 보면 흥미진진한 세계에 빠져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서 제시한 flash는 시소1 끝에 시소 2가 달려 있는데, 이는 주종관계 도식입니다. 즉 노무현이 있고 거기 반응하는 노빠, 이명박이 있고 거기 열광하는 명빠 이런 종속관계 모델입니다.
대등한 관계, 예컨대 비즈니스상 동업관계 같은 것을 상사(相似,analogy)하려면, 시소 2의 중심점을 시소1의 중심점에 겹쳐 놓아야 합니다.
이런 모델을 만들려면, flash를 새로 제작해야 합니다. 이것 만들려면, 저것 decompile 하여 적당히 손보면 될 것같습니다만, actionscript라고 하여 flash 코딩을 다시 해야합니다. 제가 여기 정통한 것이 아니라 만질 틈이 없군요. 머릿 속으로라도 그리 중심점을 겹쳐놓으면 동업 내지는 협업관계에서 벌어지는 힘의 역학관계를 그림으로 추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나이에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는 저를 보자니, 참으로 주책없고, 한가롭기 짝이 없군요. ㅎㅎ
그런데, 제가 글을 올려놓기는 하였지만, 내심으로는 이 글에 함께 동락(同樂)할 분이 몇 분이나 될까 이리 회의하였습니다. jjj님의 댓글을 뵈오니,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놀랍습니다.
②편은 ①편의 보충물이지만, 실은 ①편에서 놀라운 소식을 전하고 있는데.... 거기 소개된
水上泥牛耕月色(수상니우경월색) 雲中木馬製風光(운중목마제풍광) 威音古調虛空骨(위음고조허공골) 孤鶴一聲天外長(고학일성천외장)
이 시를 소시적에도 대했지만, 늘 오리무중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몰랐습니다만 ... ①편은 죽통(竹筒)을 단칼에 쪼개듯 저 시를 파죽지세(破竹之勢)로 헤쳐버릴 만한 소식(?)이 들어 있습니다.
하기사 동산도 제 그림자 보고 깨우쳤다고 하듯이, 모두 저마다의 푼수대로 제 길을 갈 뿐이겠지요.
하지만, 스님네들이 손가락 끊어 단지(斷指)하고, 소지(燒指)하여 태우고, 연비(燃臂)하며, 심지어는 하초하근을 끊어내기까지 한들, 기만기천 중에 몇 분이나 성불하겠습니까 ?
퇴락한 옛 절에 가면 부도(浮屠)가 소소하니 조촐하게 한켠에 조시듯 계십니다. 하지만, 요즘 절집에 가보면 부도들이 하나같이 웅장하고 돈 푼이나 들였음직하게 큼직한 것이 턱하니 자리를 잡고 뽐내고 있습니다. 영업 방침인 것이지요. 저리해야 불사가 세세년년 끊이지 않게, 위엄을 더하고, 신도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겝니다.
단지(斷指)한 손가락은 기천기만이지만, 성불한 이는 없고 다만, 부도만이 화려하니 폼을 잡습니다.
폼생폼사. 장엄만 있고 정작 불상엔 점불정(點佛睛)이 아니 되어 있습니다. 제가 다니는 등산길 돌탑들 역시 매끄럽게 다듬어져 높이 싸여져 있습니다만, 그게 곁을 지나는 길손들이 돌 하나, 둘 고이 정성 받쳐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공원당국에서 필경은 안에다 시멘트로 구조물 만들고, 거죽에도 돌을 가지런히 붙여 만들어 놓은 것일 것입니다. 속을 보지 않았지만 이게 거의 틀림없을 것입니다. 사람 손으로 저변은 그리 좁은데, 저리 높이 돌을 쌓아 올릴 수도 없지만, 거죽이 그처럼 매끄럽게 다듬어질 수 없지요. 게다가 새로 돌을 얹어 놀 틈도 거의 없습니다. 펴션너블한 모습으로 저 탑은 오늘의 소임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저 탑이 성황당으로서, 소망의 증표로서 거기 있어야 하는 것이라면, 저 자리는 실은 우리들의 위선을 증거하고 있음이 아니겠습니까 ? 실제 때때로 저 돌탑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드리는 분들 뵐 때가 있습니다.
시멘트로 처바른 돌탑도 영험하실런가 ? 기도 드리는 저 아낙에게
‘저는(저것은) 神佛이 아니라, 패션이다.”
이리 제가 까발리지 않는 한, 아직은, 저 정성이 하늘가에 사무칠 것이리라 ! 이리 ‘오늘이란 시간’을 짐짓 위로하며 산을 내려옵니다.
퇴계 이황은 ‘산을 오르는 것은 글을 읽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글이든, 산이든 경건한 마음으로 대하였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거기엔 신령스러움이 깃들여 있으니, 삼가 외경하지 않을 수 없음입니다.
그런데, 산에 가서 저리 혀 끝만 차고 내려오는 저는 또 무슨 물건이란 말이며, 온 산하를 유린하고 말겠다고 벼르는, 저들 개발망령들은 또 여하한 귀신들이란 말인가 ? *** ***
다 써놓고 위에
水上泥牛耕月色 이부분과 관련되어 '소식' 운운한 부분은 영 못 마땅하다. 내가 써놓았지만 비릿하니 구린내가 난다.
/// 但盡凡情 別無聖解 단진범정 별무성해 범부의 정취만 다할(떨어질) 뿐, 거룩한 마음 따로 없다.
不用求眞 唯須息見 불용구진 유수식견 참은 구하지 말라, 다만 견해만 쉴 뿐. /// 그러한들, 이미 써놓은 것이라 지운들 허물을 벗을 도리가 없다. 해서 그냥 놔둔다. 빛 바래도록 저리 너럭바위에 널어두고, 내 스스로의 경책으로 삼고자 한다. 역시 구업이 제일 무섭다. 말이든, 글이든 안으로 다스려 삼가야 할 터인데, 명상은 혼자 하는 것이다. 아직도 길은 멀다. 삼가.